독일은 보드게임계의 최강국 중 하나다. 흔히 보드게임을 나누는 2가지 분류 중 하나인 ‘유로게임’은 흔히 ‘독일식 보드게임’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독일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또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다른 한 분류인 테마게임은 미국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하지만 독일이 처음부터 보드게임 강국이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과거엔 영국에 크게 밀렸고 보드게임 시장조차 협소한 국가였다. 이런 독일이 현재 보드게임 강국이 된 것은 보드게임 개발자들과 업계의 꾸준한 노력 덕분이었다.
보드게임 강국 독일이 탄생하기까지는 보드게임계의 많은 노력이 있었다. 이 중 독일의 보드게임 상 Spiel des Jahres(이하 SDJ)와 보드게임 작가(개발자) 길드 SAZ에 대한 이야기가 17일, 부산에서 공개됐다. 이 두 요소의 의의와 효과는 한국 보드게임계는 물론, 게임계에도 일부 도움이 될 법 하다.
디스이즈게임은 17일, 부산에서 열린 ‘보드게임 디자인 라운드 테이블’ 행사에서 관계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독일 관계자들을 바탕으로 이 두 시스템의 탄생과 효과, 의의 등을 정리했다.
# 보드게임계의 오스카상 ‘SDJ’은 독일 보드게임계를 어떻게 바꾸었나?
앞서 얘기했듯, 독일 보드게임계는 20세기 중반만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위상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이런 독일 게임계가 바뀐 것은 1979년 SDJ가 탄생하면서부터다. 당시 독일 보드게임계는 보드게임을 즐기지 않는 유저들도 믿고 살 수 있는 합리적인 기준, 보드게임 유저들에겐 모두 인정받을 수 있는 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2가지 이유에서였다. 권위 있는 상이 탄생한다면 보드게임 유저들에게 양질의 게임을 조명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이 상의 권위가 대중에게까지 퍼진다면 보드게임을 깊이 있게 즐기지 않는 유저들도 상의 권위를 믿고 게임을 보다 쉽게 선택하고 구매할 수 있게 된다. 즉, 권위있는 상 하나가 탄생함으로 인해 시장의 다양성과 확장성이 확보되는 셈이다.
물론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상이라는 것은 쉽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SDJ 위원회는 엄격하다는 말이 모자랄 정도로 수준 높은 윤리 원칙을 만들어 지키고 있다.
일단 SDJ를 심사하는 위원회엔 개발자나 유통업자가 들어갈 수 없다. 위원회엔 이해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언론, 평론가들이 들어간다. 또한 위원들은 어떤 식으로든 특정 단체에 편의를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 심지어 SDJ 시스템을 배우고 싶다고 외국에서 위원들을 초청해도 그 과정 자체에서 이해관계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거부할 정도다.
(실제로 부산 보드게임 디자인 라운드 테이블에서 위원들에게 강연을 부탁했지만 위 이유로 거절당했다)
물론 이럼에도 보드게임 트렌드는 계속 변하기 마련이고, 사람의 기준도 바뀌거나 변하기 마련이다. SDJ 위원회도 이 때문에 코어 유저들에겐 ‘저런 게임 같지도 않은 캐주얼 게임에게 대상을 주지 말라’, 반대측에게는 ‘제발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게임을 조명해 달라’는 불만을 듣는다. SDJ 위원회는 이런 피드백에 시달리면서도 떄론 어린이게임상이나 전문가게임상 등 새로운 부문을 신설하며, 때론 대상(올해의 게임상) 기준을 바꾸며 최대한 많은 이들을 만족시키려 하고 있다.
그 결과, SDJ는 <카르카손>, <도미니언>, <코드네임> 등의 명작을 끊임 없이 발굴했다. 그리고 SDJ는 현재 ‘보드게임계의 오스카’ 상이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전세계’ 보드게임 유저들에게 권위 있는 상으로 인정받고 있다. 독일에서는 보드게임이 SDJ의 상을 받으면 판매량에 최소 0 하나가 추가될 정도로 인기를 얻으며, 전세계 보드게임계에서도 관련 게임의 판매량이 폭증한다. 해당 작품과 작가에게 전세계 보드게임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기본이다.
SDJ의 의의는 단순히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상이라는 데서 국한되지 않는다.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게임, 깊이 있는 게임이란 SDJ의 기조는 독일 보드게임계의 문법과 대중성을 성장시켰고 이는 곧 시장 성장으로까지 이어졌다. (물론 이 부분에선 SDJ 뿐만 아니라, 함께 진행된 각종 지역 이벤트도 큰 몫을 했다)
또한 SDJ의 권위는 보드게임을 잘 즐기지 않는 유저, 보드게임을 1년에 하나 살 정도로 가볍게 즐기는 유저들이 쉽게 좋은 게임을 선택하고 꾸준히 좋은 보드게임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유저들의 이런 행동은 보드게임 시장을 넓혔고 게임사를 성장시켰다.
즉, 권위 있는 상 하나가 단순히 게임을 조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시장 자체를 성장시키고 그 나라를 보드게임 강국으로 성장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셈이다.
# 개발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라! 보드게임 작가 길드 SAZ
독일의 보드게임 작가 길드 SAZ는 1991년 설립된 단체다. 처음엔 독일 보드게임 작가들의 권익을 위한 단체였지만, 이제는 유럽 각국의 작가들도 가입한 범국가적인 단체로 성장하고 있다.
SAZ의 설립은 보드게임 작가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함이었지만, 그 배경은 보드게임이 창작물이라기보단 상품처럼 취급되기 시작한 1960~70년대 트렌드로 거슬러 올라간다.
보드게임 작가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세기 말부터다. 과거엔 누가 만든 것인지 알려지지도 않은 채 게임만 팔렸지만, 19세기 말부터 일부 출판사(당시엔 보드게임사가 아니라 출판사에서 주로 보드게임을 유통했다)가 박스에 작가를 명시하며 이들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하지만 이 시기는 길지 않았다. 1960~70년대, 일부 거대 회사가 보드게임을 상품으로만 취급하며 작가 이름을 가리기 시작했고, 이런 행태는 곧 다른 회사로까지 번졌다.
이런 형태가 극심해지자 보드게임 작가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1988년, 작가 이름을 공개하지 않는 회사에 게임을 팔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3년 뒤, 독일의 보드게임 작가 길드 SAZ가 설립됐다.
이런 태생 때문인지 SAZ는 보드게임 작가들의 권익 보호, 보드게임의 예술적 가치 인정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다. 실제로 현재 이들이 하는 업무는 정부를 상대로 보드게임의 예술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 받을 수 있도록 활동하고 있고, 소속 작가들에게 각종 법률적/학문적/마케팅적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SAZ의 행동은 독일에서 보드게임 작가들이 자질구레한 어려움 없이 작품 활동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예를 들어 작가가 사전에 다양한 셈플 계약서를 열람할 수 있어 실제로 보드게임 회사와 계약할 때 손해 입을 일을 막는다던가, 작가가 저작권과 같은 법률적 문제에 휩싸였을 때 변호사 비용을 지원하는 것 등이 대표적이다. (SAZ는 이외에도 작가들에게 정기적인 교류 기회 제공, 보드게임 기획 노하우 공유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실제로 <Twixt>를 개발한 알렉스 랜돌프는 미국에서 게임의 상표권과 관련해 문제가 발생했을 때, SAZ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있었다. 미국과 오스트리아 두 국가의 법적 문제가 꼬여 있었던 건이었기에, 알렉스 랜돌프 개인이 처리했다면 굉장히 힘을 들였어야 할 건이었다.
이 덕에 독일의 보드게임 작가들은 다른 국가보다 보다 합리적인 조건으로 게임을 계약할 수 있으며, 만에 하나 문제가 생겼을 때도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이는 독일이 좋은 보드게임을 개발할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SAZ의 주요 업무들
- 보드게임의 문화적 가치를 인정 받기 위한 각종 정치적 활동 (ex: 국립도서관에 보드게임 보관 추진 등)
- 작가와 회사 간 계약서 작성 도움
- 작가와 회사 간 법적 문제 발생했을 때 법률 서비스 지원
- 신생 보드게임사의 계약서 작성 자문
- 보드게임 작가 포럼 개최
- 보드게임 디자인 노하우 문서 공유
- 작가와 퍼블리셔, 미디어 연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