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큰 시장이라고 인정하지만 진입을 시도하는 것조차 힘들어 하는 지역이 있다. 바로 유럽이다. 축구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K리그 선수가 프리미어 리그에게 진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국내 게임들도 유럽 진출을 위해서는 진입 장벽을 깨뜨려야 한다.
아직도 우리에게 유럽은 생소한 시장이다. 가까운 일본과 오래 전부터 진출한 북미 지역은 많은 경험과 함께 이미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아직 유럽은 인프라와 현지 진출 노하우 등에 있어서 갈 길이 멀다.
그렇다면 어떻게 유럽에 진출해야 할까? 아니 그 이전에 유럽은 어떤 시장일까? 디스이즈게임은 유럽 퍼블리셔 중 하나인 게임즈마스터(Games-Master.com)의 하워드 리(Howard Lee) 대표를 만나 유럽 시장의 현주소에 대해 들어 봤다. /디스이즈게임 정우철 기자
세미나에서는 유럽은 잘 알지만 한국 게임업계를 잘 모르는, 혹은 그 반대의 강연자가 많았다. 즉 유럽과 한국의 게임업계를 모두 파악하고 있는 전문가는 많지 않았다. 지금까지 유럽 시장에 대한 분석은 많았다. 관련 세미나도 적잖게 열렸다. 하지만 뭔가 부족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디스이즈게임이 만난 하워드 리 대표(오른쪽 사진)가 운영하는 게임즈마스터는 유럽에서 한국 온라인 게임을 퍼블리싱하는 업체 중 하나다.
그는 과거 한국에서 게임 개발사를 운영하면서 한국 게임시장의 경험을 쌓았다. 한국과 유럽에 대한 이해도를 바탕으로 온라인 게임을 서비스하는 그는 유럽 시장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결과부터 말한다면 분명히 가능성은 높은 시장이지만, 결코 쉽지는 않은 곳이다. 특히 유럽이 EU 체제로 통합되면서 시장 상황이 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 사용하던 진출 전략도 달라질 필요성이 있다.
지금부터 그가 말하는 것이 모두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유럽 시장 진출을 위한 참고로서 가치는 있을 것이다.
하워드 리 대표는 최근 몇 년 동안 국내 개발사들이 캐주얼 게임에 집중한 모습을 보고 아쉬웠다고 말했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유럽에서 한국의 캐주얼 게임은 극히 일부만 살아남고 모두 실패했다. 캐주얼 게임에 집중했던 시간과 노력을 판타지 기반의 MMORPG에 투자했다면 더 좋은 성과를 거뒀을 거라는 이야기다.
그가 바라본 유럽 시장의 성향은 캐주얼보다 판타지에 강한 면모를 보인다는 것이다. 일단 캐주얼 게임은 서양, 특히 유럽에서는 좋아하지 않는 유저가 많다고 한다. 동양풍 캐릭터를 좋아하지 않고, 미완성 게임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다는 것이 이유다.
유럽에서 350만 다운로드를 기록한 <건즈 온라인>은 유료화 단계에서 고전했다.
“현재 유럽에서 자리를 잡은 한국 온라인 게임으로는 <프리프> <메틴 2> <아이온> <영웅> <라그나로크> <실크로드> 정도를 들 수 있다. 캐주얼 게임은 거의 없다. 캐주얼에 집중할 시간에 차라리 MMORPG를 준비했다면 유럽에서 도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온라인 게임을 개발하면서 기획력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럽에 진출할 생각이 있다면 처음부터 유럽 시장도 감안해서 개발을 시작하는 게 맞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실제로 실천하기란 쉽지 않은 말이기도 하다.
현재 유럽 퍼블리셔의 현황. 지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초기 유럽은 <다크 에이지 오브 카멜롯>과 같은 게임이 인기를 얻었지만 지속되지 못했고, 한국 게임들이 틈을 파고들면서 성과를 보였다. 하지만 캐주얼 게임에 집중하는 동안 중국 개발사들이 틈새를 파고들었고, 이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가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궁금한 것이 생겼다. 유럽에서 성공했다고 나열한 게임 중에는 한국에서 빛을 못 본 것도 있었다. 그 이유를 정확히 진단한 경우는 없었는데, 그는 해당 게임들이 유럽에서 성공한 이유를 어떻게 분석하고 있을까?
‘선점효과’. 이것이 그가 분석한 성공요인 중 하나다. 선점효과를 누린 대표적인 게임으로 그는 조이맥스의 <실크로드 온라인>을 꼽았다.
선점효과, 브랜드 시너지, 글로벌 서비스에 주력한 <실크로드>는 유럽진출의 대표사례.
“<실크로드>는 말 그대로 선점효과를 제대로 누린 경우다. 독일에서 폭발적인 성과를 거뒀는데, 이는 독일 온라인 게임 시장의 성장세에 그대로 올라탄 것으로 보고 있다. 중요한 것은 <실크로드>는 브랜드 자체로도 준비된 게임이었다는 점이다.”
<실크로드>가 현지화를 미리 제대로 준비하고 유럽에 진출했기 때문에 성공했다는 말이다. 특히 유럽에서 누구나 알고 있는 ‘실크로드’라는 단어가 현지 유저들에게 각인되면서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는 역할을 했다.
브랜드 명칭을 활용한 또 하나의 사례가 <메틴 2>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메틴’이란 단어의 뜻은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나 터키에서는 아주 간단한 의미로 통용된다고 한다. 우리에게 ‘철수’와 ‘영희’처럼 가장 일반적인 이름 중에 하나가 ‘메틴’이기 때문이다.
독일에 이어 터키에서도 흥행에 성공한 <메틴 2>는 이른바 ‘철수 2’ 같은 느낌.
물론 게임명을 일부러 사람 이름처럼 만들지는 않았겠지만, 터키에서는 쉽게 게임을 기억하고 떠올릴 수 있는 시너지 효과를 누렸다. 그러나 이런 요소는 게임의 성공에 부가적일 뿐 필수는 아니다. <실크로드>와 <메틴 2>의 성공요인에서 중요한 것은 좋은 현지 파트너를 만났던 점이라고 한다.
하워드 리 대표는 “당시 <메틴 2>의 파트너는 게임포지라는 퍼블리셔였다. 게임포지는 유저 기반의 DB가 상당히 잘 구축된 업체로 평가를 받는다. 당시 온라인 게임 유저들은 대부분 텍스트 기반의 머드 게임에 몰려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게임포지 유저들은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화려한 게임을 신선하게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 현지화? 번역보다 고객 서비스가 먼저
보통 유럽 진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현지화를 꼽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하워드 리 대표는 문화적 현지화(컬처라이제이션)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유럽은 약 42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50여 국가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현지화에서 모든 언어를 소화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차라리 언어보다 문화적 취향을 파고드는 편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게임 내에서 본다면 현지 복장과 외모를 가진 캐릭터 등의 여부는 물론이고, 그들에게 익숙함을 전달하는 분위기가 중요하다. 즉 클라이언트를 현지화하되 최악의 경우는 영어로 서비스해도 문제는 없다고 한다.
다만, 전제조건이 붙는다. 게임의 공식 홈페이지와 고객 서비스는 철저한 현지 언어로 제공돼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도 존재한다.
“<카발 온라인>은 게임 내 언어로 영어만 지원했다. 하지만 고객 서비스는 19개 언어를 지원했고 덕분에 커뮤니티 서비스가 폭발적인 유저 증가로 이어졌다. <나이트 온라인>도 터키에서 영어로만 서비스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박을 쳤다. 즉 고객 관리만 철저하게 현지화해도 충분히 서비스가 가능한 시장이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어서 그는 “다만 할 거라면 제대로 하는 것이 좋다. 언어의 번역이 완벽하지 못하면 스토리와 메시지 전달이 제대로 안 되고 게임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유럽 유저들은 솔로 플레이를 하는 경향이 짙다. 단순 반복적인 게임성은 환영 받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번역할 언어를 선택할 때도 시장의 가능성을 보고 결정하라고 충고했다. 유럽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를 꼽을 수 있다. 때문에 대부분 국내 게임들이 유럽 서비스를 준비하면서 3개 언어로 번역된다.
그런데 하워드 리 대표는 프랑스어 대신 터키어를 선택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프랑스어가 많이 사용되는 것은 맞지만 온라인 게임 시장으로 본다면 터키가 더 크다는 이야기다. 많이 쓰이는 언어와 게임 시장의 크기는 같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충고다.
예를 들어 사용 언어 비율을 따진다면 스페인어로 가야 하지만 실제로 현지화하고 서비스해 봐야 1인당평균매출액(ARPU)이 낮기 때문에 수익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하워드 리 대표는 달라진 유럽 시장을 이해하고 이에 맞는 전략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EU로 통합된 2002년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유럽이라는 시장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유럽통합 이전에는 유럽이라고는 하지만 나라별로 다른 전략을 사용했고, 이는 곧 상권이 명확하게 구분된 상황을 의미했다. 하지만 유럽통합 이후 화폐와 기본적인 경제적 시스템이 통합되면서 언어권에 따라 국가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국가로 구분되던 상권이 언어에 따른 권역으로 나뉜 것이다.”
“이는 인터넷 사업도 마찬가지다. 현재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 동유럽, 북유럽, 러시아 및 CIS의 7개 권역으로 구분된다. 그렇다면 이에 맞는 사업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과거처럼 전시회에 독자적으로 나가서 비즈니스 미팅을 하는 방식은 이제 아니라고 본다.”
과감한 발언이다. ‘게임스컴’이나 ‘게임 컨벤션 온라인’ 등 유럽 게임쇼에 참가해 현지 바이어를 만나 사업을 논하는 것은 낡은 방식이라는 것이다. 대신 그는 “진출할 업체들이 컨소시엄을 형성해 하나로 뭉쳐서 나가는 편이 좋다”고 조언했다.
작은 업체일수록 컨소시엄을 형성하고 이를 정부가 지원해 주는 방식이면 더욱 좋다. 즉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격언이 통용되는 것이다. 하워드 리 대표는 “자금력이 부족한 국내 업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말했다.
“한국 개발사들의 상대는 유럽 현지 개발사들이 아닌 중국과 일본 업체들이다. 특히 중국 업체의 경우 막강한 자본력으로 밀어붙이기 때문에 영세한 한국 업체는 각개격파 당하기 십상이다. 한국 업체도 규모를 키우고 상대가 고를 수 있는 카드를 많이 제시해야 한다.”
일본 게임인 <대항해시대 온라인>은 CJ인터넷을 통해 유럽에 진출했다.
다양한 장르를 가진 업체끼리 모여 컨소시엄을 구축하면 현지 퍼블리셔도 다양한 카드를 선택할 기회를 갖게 된다. 하나를 선택하기보다 다양한 패키지로 구성된 제안을 받는 셈이기 때문에 동반진출의 가능성도 높아진다.
끝으로 그는 “현재 온라인 게임 시장 분포를 보면 북미가 30%, 아시아가 40%, 유럽이 3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계속 성장세인 유럽 시장은 2011년 이후 더 커질 것이다. 상대적으로 중국과 미국은 포화상태로 가고 있다.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지 못하면 유럽에서 후발주자에게 추월 당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