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기업마다 메타버스라는 용어를 조금씩 다른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빅테크 기업들의 포부는 조금 더 커 보입니다. 그중 단연 두드러지는 것은 사명마저 ‘메타’로 바꾼 구) 페이스북입니다.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가 메타버스 전격 진출을 선언하며 직접 입에 담은 말들을 잘 살펴보면, 메타는 현재 가장 과감한 메타버스 비전을 품고 있는 기업입니다.
그 과감함은 SF에 비견될 정도입니다. 그리고 메타는 그 구현의 난도를 스스로 잘 인지하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메타가 바라는 메타버스 세상은 다른 기업들과 얼마나 다를까요? 과연 실현 가능할까요? 한 번 짐작해봤습니다. / 디스이즈게임 방승언 기자
SF급이라는 얘길 했으니, 진짜 SF 작품을 하나만 끌어 오겠습니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메타버스를 가장 개연성있게 표현한 영화로 스티븐 스필버그의 <레디 플레이어 원>을 꼽습니다. 이 영화가 자꾸만 소환되는 데에는 확실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직 안 본 분들도 많을 테니, 이야기의 기본 전제 두 가지를 짚은 뒤에 설명해 보겠습니다.
첫째, <레디 플레이어 원>은 현실과 구분이 어려울 정도의 VR기술이 보편화한 세계를 묘사합니다.
둘째, 극 중에는 전 세계인 대부분이 매일 접속해 시간을 보내는 <오아시스>라는 게임이 존재합니다.
<오아시스>는 제임스 할리데이라는 괴짜 천재의 유작이고, 그의 사망 이후에도 -유지보수도 없이- 어떻게든 계속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현실의 게임 장르 중에는 오픈월드 MMO에 가장 가깝습니다. 주된 콘텐츠는 물론 게임이지만 자유도가 높아서, 인게임 아이템 거래, 댄스파티 주최 등 수많은 액티비티가 가능합니다.
여기까지 봤을 때 현실의 MMO와 비교해 <오아시스>만의 주요한 특징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현실과 구분 불가능한 수준의 VR기술에 기반 ▲현실 이상의 자유도를 제공 ▲전 세계인 대부분이 매일 열광적으로 사용. 아직 현실에는 이중 하나라도 충족한 서비스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 하나 더 있습니다. 설정상 다른 기업은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기술로 보입니다. 극 중 악역인 초거대기업 IOI는 사운을 걸고, 범죄까지 저질러가며 <오아시스>의 운영 권한을 얻어내려 노력합니다. 비슷한 걸 하나 더 만드는 대신에요.
다시 돌아와서, 생각을 조금 더 확장해봅시다. 제임스 할리데이는 ‘게임밖에 모르는 바보’이기 때문에 <오아시스>를 게임 외 다른 용도로 활용하지 않았을 듯합니다. 그러면 IOI와 같은 기업이 <오아시스>의 소유권을 정말 이전받아 다용도 플랫폼으로 개방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기업, 정부, 심지어는 다른 게임사까지 <오아시스>에 입점해 판매, 홍보, 서비스를 벌이는 경우를 가정해볼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전 세계인이 접속하는, 무한한 자유도의 플랫폼인데 조건만 맞는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심지어 그 안에서 커머스까지 가능하다면 더욱 놓칠 수 없는 기회입니다.
개인에게 게임 내 ‘부동산’을 판매해 자기 공간을 점유할 권한을 줄 수도 있겠죠. 또는 대형 가수가 그 안에서 공연을 열 수도 있습니다. 등교하지 않고 교육을 받고, 출근하지 않고 회의할 수 있게 됩니다. 실제 유적지를 게임에 똑같이 구현해놓고 방문객을 받을 수도 있을 겁니다. 어쩐지 최근에 자주 듣던 얘기와 비슷하지 않나요?
이론적으로, 현실 사회가 수행하는 기능 상당수를 대체하거나 연동하여 보조할 수 있는 거대한 가상의 체계가 탄생할 겁니다. 현재 대기업들이 제시하는 메타버스의 개념은 여기에 상당히 근접합니다. ‘메타버스’라는 말에 ‘제 2의 인터넷’, ‘인터넷의 미래’, ‘3D 인터넷’ 같은 거창한 꼬리표가 붙는 이유입니다. 메타버스는 거창한 것이 맞으니까요. 적어도 개념상으로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상을 실컷 즐기다가, 현실의 메타버스 기사들로 눈을 돌리면 어쩔 수 없는 혼란이 찾아옵니다. 뉴스에서는 <로블록스>나 <제페토>는 물론이고 구글 지도마저 메타버스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만만한 서비스들이란 건 절대 아니지만, <오아시스>와는 격차가 너무 크지 않나요?
이런 불일치가 어디에 기인하는 건지 알기 위해서는 요즘 눈에 많이 띄는 사분면 하나를 잘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 미래학단체 ASF(Acceleration Studies Foundation)가 제시한 메타버스 분류 매트릭스인데요. 아마 메타버스에 관심이 있다면 적어도 한 번은 마주쳤을 겁니다.
해당 사분면에서 ASF는 메타버스를 ▲증강현실(AR 게임, 구글 글래스 등), ▲라이프로깅(블로그, SNS 등), ▲미러월드(지도 앱 ‘거리보기’ 기능, 박물관 VR 관람 등), ▲가상세계(<제페토>, <로블록스> 등 서비스)의 네 가지 분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꼭 짚어야 될 사실은, ASF는 이 네가지 분야가 ‘하나로 융합된’ 상태를 메타버스로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증강현실, 라이프로깅, 미러월드, 가상세계는 메타버스의 ‘하위분류’가 아니라, ‘구성요소’에 해당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현재 적잖은 기업, 매체가 네 가지 구성요소를 따로 떼어서 ‘메타버스 사업’이라고 일컫는 상황입니다. 여기서 미묘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마우스패드 생산 기업이 ‘PC 관련 사업을 하고 있다’고 말하면, 거짓일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실을 오해 없이 설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걸까요? 여기에는 여러 답변이 나올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이 시점에 메타가 어떤 메타버스를 구상하고 있는지 한 번 보겠습니다. 10월 말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는 자사 홍보 영상에 직접 출연, 목표하고 있는 궁극적인 메타버스의 비전을 전달했습니다.
영상 속 묘사된 메타버스는 ASF가 제시한 네 가지 메타버스의 구성요소를 빠짐없이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영상은 다분히 SF적입니다. 어떻게 보면 <레디 플레이어 원>보다 더 그렇습니다.
영상 초반부에서 저커버그는 자신의 실제 집과 똑같이 디자인된 가상공간을 걸어갑니다. 현실의 장소를 가상 세계에 똑같이 구현한 ‘미러월드’입니다. 그런 뒤 친구들의 호출에 따라 ‘가상세계’로 넘어가 함께 카드게임을 즐깁니다.
몇 장면 건너뛰면, AR 글래스를 착용하고 서재에 앉아 회사 업무를 보는 직장인이 등장합니다. 그는 ‘증강현실’을 통해 현실에 3D로 덧씌워진 사무실의 모습을 둘러보고, 직장 동료와 인사를 나누기도 합니다. 현실의 업무를 가상 세계에 데이터로 기록하고 있으니 ‘라이프로깅’ 활동 중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듯 메타는 다른 기업들이 아직 차마 ‘이런 걸 만들겠다’고 자신감있게 이야기하지 못한, ‘완성형 메타버스’의 이상향을 과감하게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정말 하겠다는 선언입니다.
여기에 필요한 하드웨어부터 개발 중입니다. 당장 내년 상반기 출시한다는 차세대 VR기기 ‘프로젝트 캄브리아’는 사용자의 손을 인식해 컨트롤러 대신 쓰게 해주는 ‘핸드 트래킹’ 기술, 외부 카메라로 주변을 인식해 스크린에 출력해주는 패스쓰루(Passthrough) 기능 등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둘 다 현세대 VR기기 오큘러스 퀘스트 2에 구현되어 있기는 하지만 아직 제한적인 수준입니다.
‘햅틱 장갑’ 시제품도 최근 공개했습니다. 가상의 사물을 만지고 집어 드는 감각을 전달하기 위한 기기입니다. 여기에 5mm 두께로 만들어진다는 AR 글래스 ‘프로젝트 나자레’까지 더하면, 메타가 꿈꾸는 메타버스 세계의 윤곽이 대충 그려집니다.
더 나아가 기술, 교육, 보건 관련 기관/기업과의 협력관계 수립도 계속 발표하고 있습니다. 메타는 현재 영국·독일·이스라엘 등 국경을 넘나들며 ‘동료’를 모으는 중입니다.
메타의 오큘러스 사업 자문을 맡은 존 카맥은 11월 초 페이스북 커넥트 기조연설 서두에서 페이스북의 메타버스 사업을 향한 회의를 드러내며 화제를 모았습니다.
카맥은 “메타버스 수립계획을 세우는 것은 메타버스를 실현하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실현’의 의미로 ‘wind up with’라는 표현을 썼는데, ‘~하게 되다’라는 의미의 피동성이 강한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메타버스란 기술 발전의 흐름상 사회가 자연스럽게 도달하게 되는 어떤 지점일 뿐, 누군가의 인위적 주도로 구현될만한 개념이 아니란 생각을 넌지시 밝힌 셈입니다.
심지어 메타 역시 이런 분석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메타버스 사업 포부를 밝힌 공식 페이지에서 이들은 “메타버스는 한 기업이 만드는 단일 상품이 아니다. 마치 인터넷처럼, 페이스북의 참여와 상관없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사의 관리 노력과 업계 컨소시엄, 관련 단체 협력 등이 더해지면 종국에는 완성할 수 있다는 태도입니다. 같은 글에서 메타는 현재 제작 중인 메타버스 관련 상품들이 메타버스 체계 구축이라는 최종 목표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책임감 있게(responsibly) 개발하겠다는 다짐을 밝혔습니다.
그러한 노력의 예시로 든 것이 상호운용성(interoperability) 구현입니다. 아마존의 전략 책임자 출신 벤처캐피탈리스트 매튜 볼은 메타버스가 온전히 기능하기 위한 7가지 핵심 속성을 정의했는데 ‘상호운용성’도 그중 하나입니다.
‘상호운용성’은 메타버스 안의 특정 플랫폼에서 활용되는 디지털 아이템이나 디지털 자산을, 그대로 다른 서비스에서 활용할 수 있는 특성입니다. 거칠게 비유하면 A사 플랫폼에서 구매한 아이템을, 다른 모든 플랫폼에서도 그대로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죠.
참여한 주체들의 사전 동의와 순조로운 협력이 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물리적, 사업적, 정치적 난제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메타는 상호운용성 구현을 비롯한 기타 난관을 극복하며 장기적으로 매달리겠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하루아침에 이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메타버스 관련 상품이 향후 10~15년 사이에나 완성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장기적이고 불확실하며 어려운 비전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메타가 메타버스에 매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앞서 <레디 플레이어 원>의 <오아시스>를 설명하면서 ‘전 세계인들이 애용하기 때문에 각종 기업과 기관이 참여하고 싶어할 플랫폼’이라고 말했던 것 기억하시나요? 그런데 우리는 이런 설명에 실제로 근접했던 현실의 플랫폼을 하나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페이스북입니다.
다만 잘 알려져 있듯 페이스북의 시장 독점적 지위는 영원하지 않았고, 다른 매력을 어필하는 소셜 미디어에 생각보다 쉽게 지지기반을 빼앗겼습니다. 메타와 저커버그에게는 매우 뼈아픈 경험이었을 듯합니다.
메타버스는 소셜 미디어에 비해 훨씬 ‘무거운’ 프로젝트입니다. 만약 메타가 메타버스 구축이라는 거대 프로젝트의 첨단에 서서, 흉내내기 힘든 연합체를 구성해 시장을 선도해나간다면, 어쩌면 후발주자들의 의기를 빠르게 꺾고 다시 예전의 영광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존 카맥의 최근 발언처럼, "불안함에 머리를 쥐어뜯게 만드는" 위태로운 계획인 것 또한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메타 스스로 인정했고, 많은 전문가가 동의하는 것처럼, 메타버스는 누군가의 주도로 ‘만들어지는 것’보다는 각 주체의 유기적 융합으로 ‘도달하는 곳’에 가까워 보이니까요.
메타는 과연 최근 악화한 기업 이미지 쇄신을 위해 메타버스 사업으로 '도망쳤다'는 일각의 비판을 불식할 수 있을까요? 그 전에, 정말 메타버스 구축의 미래적이고 혁신적인 가치를 신뢰하고 진심으로 나서고 있는 것이 맞을까요? 향후의 발걸음을 면밀히 살펴볼 일인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