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디아블로 이모탈> 출시 이후 서구권 게이머 사이에 오간 열띤 논쟁은 이 지역 올드 스쿨 게이머들이 느끼고 있는 어떤 위기의식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서양 게이머들은 동아시아의 선례를 통해 확률형, 핵과금형 BM이 가지는 업계 장악력을 확인한 바 있다. 그래서인지 <디아블로 이모탈>이 ‘슬리퍼리 슬로프’(slippery slope), 즉 한 번 미끄러지기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는 불가역의 경사로가 될 것이라고 여기는 소비자가 많다.
다시 말해 <이모탈>이 성공을 거두면 서양 게임사들도 너나 할 것 없이 같은 BM을 따를 것이라는 추정이다. 대형게임사들도 <이모탈>의 뒤를 따라 과금형 게임에 역량을 집중시킨다면 ‘좋은 게임’은 멸종하고 말 것이라는 우려도 뒤따른다.
한편 이미 오래전에 그 경사로 위를 한참 달려내려온 국내 소비자들의 시선은 훨씬 여유롭다. 과금형 게임이라면 일단 코를 틀어막고 보는 '패키지 선호형’ 소비자들의 (시니컬하고) 유유자적한 태도도 전혀 이전과 다를 바 없다. “<이모탈> 같은 과금형 게임이 아녀도 좋은 게임이 잔뜩 있다”고 짐짓 큰 목소리로 말한 뒤, 스팀이나 여타 패키지 게임 스토어로 향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런 유형의 게임 팬들이 말하는 ‘좋은 게임’의 기준은 뭘까? 신규 과금형 게임이 출시할 때마다 쏟아지는 코어 게이머 커뮤니티의 부정반응을 보면 쉽게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이들은 매번 ‘돈 벌 생각만 하지 말고 게임다운 게임을 만들라’고 주문한다.
‘수익 창출에 중점을 맞춰 만들어진 게임은 게임답지 못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특정 게임이 재미보다 수익성에 비중을 두었는지 여부는 또 어떻게 판가름할 수 있단 말일까? 거의 모든 게임사가 수익과 재미를 함께 추구하고 있으므로 이런 식의 구분은 사실 결코 분명하거나 쉬울 리 없다.
이때 게임 설계상에서 게임의 수익성과 재미가 서로 어떤 ‘역학관계’에 있는지 들여다보는 것은 유의미한 분석의 틀이 될 수 있다.
유사한 디자인을 가지고 있는 <디아블로 이모탈>과 <디아블로 3>의 예시를 통해 보자. 두 게임은 모두 스토리 퀘스트와 레벨링을 통해 게임에 익숙해진 뒤, 본격적인 콘텐츠는 엔드게임부터 제공되는 구조를 특징으로 한다. 그런데 이렇듯 비슷한 두 게임에서 콘텐츠의 재미와 게임 수익성 사이의 역학관계는 상반되게 나타난다.
패키지 게임인 <디아블로 3>의 경우 공식은 간단하다. 게임이 재미있을수록 수익성은 커진다. 하지만 <디아블로 이모탈>에서 이 공식은 묘하게 달라진다. <이모탈>의 수익성은 게임의 재미를 무한정 제공하는 데에서 오지 않고, 오로지 적절한 순간에 제한/차단함으로써 증대한다.
이것을 일각의 주장처럼 마냥 사회악으로 규정하기란 힘들다. 이렇듯 콘텐츠/기능을 가로막는 페이월(paywall) 비즈니스 모델이 업계 밖에서 비교적 흔하다는 점을 볼 때 그렇다.
다만 ‘게임은 재미 제공의 수단’이라는 공리를 부분적으로 위배함으로써 수익을 창출한다는 점에서, 고전적 형태의 게임들과는 분명 궤를 달리한다. 이런 까닭에 과금형 게임모델은 전통적 패키지 게임에 익숙한 게이머들에게는 거의 도착적인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우려되는 것은 이렇듯 ‘사업적 필요를 위해 재미를 제한, 희생할 수 있다’는 인식이 과금형 게임이 아닌 다른 게임들의 제작 과정에서도 점점 더 많이, 그리고 사뭇 침습하는 형태로 포착된다는 데 있다. 이는 비단 최근에만 두드러지는 관행도 아니다.
유튜버 ItsJabo는 ‘<폴아웃 4>를 망칠 뻔한 퀘스트’라는 제목의 비디오 에세이에서 이러한 경향의 대표 사례를 짚는다. 100만 회 이상 시청되며 뜨거운 반응을 얻은 이 영상은 2015년 작품 <폴아웃 4>의 극 초반 튜토리얼 퀘스트인 ‘자유가 부를 때’의 디자인적 선택이 게임 전반을 망칠 뻔했다고 지적한다.
해당 퀘스트에서 주인공은 처음으로 ‘미닛맨’ 팩션을 만난 뒤 곧이어 시리즈의 상징적인 외골격 강화 수트 ‘파워 아머’를 얻어 적들을 쉽게 물리친다. 그런데 이는 시리즈 팬들에게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던 전개다. 기존 작품들에서 파워 아머는 획득 전후의 게임 양상을 완전히 뒤바꿔버리는 일종의 최종병기였기 때문이다.
파워 아머는 설정상으로나 시스템상으로나 독보적으로 강력해, 이를 얻기까지의 우여곡절은 클래식 폴아웃에서는 중요하게 다뤄져 왔다. 대체로 중반을 지난 시점에 제공되는 파워 아머를 얻은 이후 플레이어는 기존 상대하기 어려웠던 적들을 전혀 다른 시각에서 마주하게 된다. 이는 게임에 또 하나의 층위를 더해주는 장치로써 유효하게 작동해왔다.
전통을 깨고 파워 아머를 게임 전면에 내세운 베데스다의 결정에 대해 ItsJabo는 게임플레이 트레일러를 통해 투자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한 사업적 결정이었다고 추측한다. 실제로 해당 퀘스트의 화려한 파워 아머 전투씬은 트레일러에서 아주 요긴하게 사용되었으며, 투자자는 물론 시리즈를 잘 모르는 팬들에게서도 좋은 반응을 끌어냈다.
다만 그 대신에 희생된 것은 야만스러운 미래 세상에서 정체와 소재조차 모호하던 파워아머를 발견함으로써 느껴지던 전통적 카타르시스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조기 등장’으로 인해 파워아머의 성능 관련 설정도 불가피한 재조정을 거치면서, 파워아머 고유의 ‘파워 판타지’ 역시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배틀필드 2042> 출시 전, 사전 정보들을 접하면서 기대감보다 불안감이 점점 더 커지던 당시의 기억이 아직 선하다.
시리즈 골수팬으로서 그렇게 느낀 이유는 단순하다. 4배로 커진 전장에 게임 인원은 2배로만 늘어난다니 도무지 셈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존 <배틀필드> 시리즈의 플레이어 밀도는 대체로 적절했기 때문에 의문은 더욱 컸다. 노하우가 있는 개발사 다이스라면 방대해진 공간을 메울 전문가다운 신묘한 해법이 있을 것이라 희망했을 뿐이다. 결과는 잘 알려진 대로다.
‘시리즈 사상 가장 큰 전장’은 <배틀필드 2042> 마케팅에서 가장 강하게, 끊임없이 강조됐던 캐치프레이즈다. 그러나 급조된 듯 단순한 지형, 미처 채워 넣지 못한 맵 곳곳의 공간, 낮아진 게임플레이 밀도를 보충할 시스템적 장치의 부재 등은 <배틀필드 2042>의 게임 기획과 개발 일정이 '마케팅 포인트'에 맞춰 무리하게 확대됐다는 의심을 거두기 힘들게 한다.
‘작품’ 보다는 ‘상품/서비스’로서 게임을 설계하는 트렌드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앞선 예시들과 같이, 비즈니스적 필요와 재미 추구가 충돌했을 때 후자를 여상한 희생양 삼는 일이 반복된다면, ‘게임조차 아니다’라는 일각의 극단적 주장에 반박할 말이 점점 곤궁해진다. 이는 많은 미움을 받는 과금형 게임에 한정해 나타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재미 타협'은 업계에 은근슬쩍 확산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