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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계 최고 권위 시상식 중 하나인 ‘더 게임 어워드’(TGA) 2023년 각 부문 후보작이 14일 공개됐다.
좋은 작품들이 각축을 벌였던 한 해인 만큼, TGA를 향하는 시선도 뜨겁다. 특히 올해에는 대중 투표까지 결과에 반영되면서 관심도가 더 높다. 하지만 사실 투표 반영 비율은 10%로 미미하다. 결국 전처럼 대중이 아닌 전문 평가 매체들이 좌우하는 시상식이라는 의미. 그런데도 그 결과에 시장의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는 뭘까?
한 가지는 바로 수상 기업(혹은 개발사)이 누리는 명예와 그에 따르는 부가적인 효과(예를 들어 마케팅)다. 굳이 비교하자면 타이어 회사가 여행지의 맛집을 소개하는 것에서 시작한 미슐랭(혹은 미쉐린) 가이드를 떠올리면 된다. 이 미슐랭 별을 획득한 식당은 전세계 미식가들의 인정을 받고 셰프는 해당 업계에선 명예를, 일반 사람들에겐 요리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각인 효과를 얻는다.
TGA 2023 GOTY 후보작들
다시 말해 고티(GOTY, Game of Year)로 등 주요 게임상을 받은 개발사는 자기 브랜드를 간결하고 임팩트 넘치게 설명하고 대중에 인식시킬 강력한 기회를 얻게 된다. 사실 대부분의 시상식이나 스포츠 이벤트의 챔피언은 이런 효과를 누리게 되어 있다.
때로는 후보군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이런 효과가 발생한다. 올해의 경우 <앨런 웨이크 2>가 그 수혜자다. 시상식에 임박해 출시된 호러 서바이벌 <앨런 웨이크 2>는 연작인 데다 마니아 장르에 속하며, 에픽스토어 및 PS5 독점 타이틀이어서 다른 후보작들에 비해 접근성이 많이 떨어진다.
그런데도 ‘올해의 게임’(GOTY) 부문에서 ▲<발더스 게이트 3> ▲<마블 스파이더맨 2> ▲<바이오 하자드 RE:4>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원더>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더 킹덤> 등 유수의 작품들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그 의외성만으로도 <앨런 웨이크 2>는 충분한 홍보 효과를 누릴 것으로 보인다.
<앨런 웨이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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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사 입장에서 TGA와 같은 대형 시상식이 가지는 의의는 이토록 분명하다. 그렇다면 일반 게이머들에 안겨다 주는 혜택은 무엇일까? 단순한 재미와 흥미 이상의 효용이 있을까?
시상식은 업계를 장기적으로 윤택하고 풍요롭게 할 긍정적 창작 트렌드를 부각시키고 이를 업계에 권장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이런 작품이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담론을 조성한다.
일각에서는 그러한 담론에서 ‘게임 시상식’은 끼어들 여지가 없거나, 없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개발사들이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일반 소비자의 반응뿐이라는 논리다.
온라인 시대에 접어들어 대중문화계의 지형이 대대적으로 개편된 이래 비평 권력은 많은 부분 해체됐다. 실제로 많은 게임 소비자가 비평가의 역할을 분담한다. 누적된 정보력과 전문성을 자랑하는 마니아 유저들은 타 유저들의 소비 가이드 역할에 손색이 없다.
이런 ‘소비자 겸 비평가’들이 형성한 여론은 개별 게임의 시장 성적으로, 그리고 다시 개발사들의 차기작 계획으로 잇달아 반영된다. 이런 일련의 흐름을 볼 때, 업계의 창작 트렌드에 있어 오로지 시장 반응만이 중요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유저 평가와 매체 평가의 불일치는 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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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장 성과만을 기준 삼아 개발 트렌드가 형성되어서는 안 된다는 시각에 누구보다 공감하는 것은 다름 아닌 게이머들이다. 예를 들어 2023년 국내 출시작 중, ‘최고 매출’을 기록한 게임들과 ‘수작’이라는 찬사를 받는 게임들은 서로 거의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둘 중에선 후자에 속하는 <P의 거짓> 및 <데이브 더 다이버>가 국내 소비자 사이에서 ‘2023년 대한민국 게임대상’의 강력한 최고상 후보로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 나아가 전 세계 단위로 후보 게임들을 선정하는 골든 조이스틱 어워드나 이번 TGA 후보에도 올랐다.
이는 게임 시상식이 단순히 ‘매출’이나 ‘인기’ 등 표면적 성과 이상의 가치를 부각하고 보전해야 한다는 인식을 단적으로 대변한다. 그런데 그 ‘이상의 가치’란 정확히 무엇일까? 혹은 무엇이어야 할까?
앞서 말한 대로 게임 시상식이 업계에 나타난 긍정적 창작 기조를 포착해 고무시키는 역할을 실제로 수행하려면, 개별 게임이 제공한 즐거움의 ‘총량’을 기준으로 최고 작품을 선정하는 것 역시 게으른 접근일 수 있다. 이번 TGA의 GOTY 후보작들만큼 서로 비슷하게 수준 높은 재미를 달성한 작품들 사이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데이브 더 다이버>가 올해 국내 게임중 '매출 1위'는 아니다. 그리고 많은 유저에게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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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재미의 양 못지 않게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재미의 속성이다. 업계가 아직 상상하지 못했거나 이전까지 기술적 한계로 구현하지 못했던 시도를 더 많이 성공시킨 작품일수록 업계에 더 긍정적 영향을 많이 주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미답지로의 모험을 시도하면서도 완성도와 흥행 양면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하는 ‘모범사례’가 새로운 업계 표준으로 강하게 자리할수록, 게이머들이 누릴 수 있는 다양성이 함께 강화되리란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지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사실 이미 TGA 2023 GOTY 후보군에도 반영되어 있다. 이들 6개 게임은 대부분 업계의 동종 작품 대비, 아니면 적어도 시리즈의 기존 작품 대비 뚜렷한 새 시도가 있었던 게임들이다.
<앨런 웨이크 2>는 이전까지의 액션 게임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유형의 스토리텔링 시각화 메커니즘을 통해 복잡한 플롯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시도와 함께, 현시점 업계 최고 수준의 비주얼 연출을 구현했다. 그 결과 상대적으로 뒤늦게 출시했음에도 GOTY뿐만 아니라 ‘최고의 내러티브상’, ‘최고의 아트디자인상’ 등 다수 부문에 후보로 오를 수 있었다.
최근 골든 조이스틱 시상식을 휩쓴 <발더스 게이트 3>
PS5의 성능을 십분 활용, 딜레이 없는 로딩으로 두 주인공 사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게 한 <마블 스파이더맨 2>, 횡스크롤 <마리오> 시리즈의 오랜 전통 위에 각종 장르 융합을 시도한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원더>, 아이템과 오브젝트를 자유자재로 결합하는 매커니즘으로 전편의 창발적인 모험과 전투를 심화한 <젤다: 왕국의 눈물> 모두 유사한 맥락이다.
일반적인 유저의 상상력으로는 그 자유도를 온전히 누릴 수 없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현존 RPG의 정점에 우뚝 선 <발더스 게이트 3> 역시 말할 것도 없다. 이미 혁신적 명작으로 평가받던 원작을 더 높은 완성도로 끌어올리면서 오로지 ‘품질’로 승부수를 띄운 <레지던트 이블 4 리메이크>가 그나마 하나의 예외로 언급될 만하다.
반대로 올해 기대에 반해 실망을 안겼다는 평가의 대형 게임들, 즉 ▲<스타필드> ▲<디아블로 4> ▲<어쌔신 크리드 미라지>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 3> ▲<포스포큰> 등의 게임은 모두 그 비판에 있어서 ‘자기복제’나 ‘혁신 부족’ 등의 키워드를 공유한다는 점 역시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역대급 한해의 역대급 시상식. 쉽지 않겠지만 최고 게임의 영예는 ‘가장 재미있는 게임’일 뿐만 아니라 ‘업계가 앞으로 나아갈 바’의 본을 보인 게임에 돌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