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치민 아저씨. 그가 조국의 독립을 선언했고, 영원히 잠든 곳. 그곳에 드디어 갔습니다. 가기 전부터, 마음은 들떴습니다. 한대수의 <호치민>을 듣고 또 들어서 그랬던 모양입니다. 그가 독립을 안긴 베트남은, 알면 알수록 우리나라와 인연이 깊은 나라입니다.
그 인연의 끝자락에는 온라인게임도 살짝 얹어져 있고요. 덕분에 제가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베트남 게임산업과 관련된 꼭지를 계속 쓸 예정입니다. 그에 앞서 편협하고 산만한 이 칼럼은 온라인게임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베트남의 인연을 듬성듬성 더듬어봅니다. ‘허접한’ 칼럼답게 게임 이야기보다 잡설이 훨씬 많습니다. 양해 부탁 드립니다. /하노이(베트남)=디스이즈게임 임상훈 기자
■ 호치민과 <목민심서>
허울 좋은 대항해시대, 향료 전쟁에서 영국을 이긴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먹자, 영국은 나중에 ‘면화 로또’가 터지는 인도를 차지했습니다. (▷관련 칼럼) 네덜란드와 영국에 밀린 프랑스는 이제 남은 땅을 노립니다. 인도차이나였습니다. 향료와 면화의 뒤를 이어, 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에서는 고무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본국의 노동운동과 환경제약으로 갑갑했던 제국주의 자본에게, 식민지의 값싼 노동력과 풍부한 자원은 맘껏 유린할 수 있는 밥이었죠. (지금도 이런 자원·인력 수탈은 그치지 않고 반복되고 있습니다.) 나라를 뺏긴 것도 그렇지만, 그 후 낙인처럼 찍혀 굳어버린 지역 명(名)도 억울합니다. 인도와 중국 사이에 있다고 해서, 대충, 인도차이나.
지구 상의 80%가 식민지였던 끔찍한 그 시대, 나중에 ‘호치민’으로 불리게 되는 사내가 이 반도의 한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고전을 배우던 영민했던 소년은 스물 한 살 때 프랑스 선박의 조리 보조로 혈혈단신 베트남을 떠났습니다. 조국을 독립시키려면 더 넓은 세상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그 후 20여 년의 생사를 건 떠돌이 생활. 조국에 돌아와서도 연달아 이어진 강대국 프랑스, 일본, 미국과의 전쟁. 생전에 ‘아저씨’라고 불리던 그는 사후에는 전설이 되었습니다. (호치민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베트남전에 참전한 미군 장교 출신 듀이커가 쓴 <호치민 평전>을 강력하게 권합니다. 꼼꼼하고 재미있는 책입니다.)
호치민과 관련된 일화 중 우리나라와 관련된 게 있습니다. 그가 정약용을 존경했고, <목민심서>를 애독했다는 이야기죠. 한시를 지을 정도로 한문에 조예가 있었고, 평생을 청렴하게 살아, 그럴 듯합니다. 하지만, 몇 년 전 연합뉴스 특파원의 취재 결과, 이에 관한 물증은 발견되지 않았죠, 아직.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풍문 두 꼭지가 있긴 합니다. 하나는 그가 소련에서 함께 수학했던 박헌영과 만나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베트남전쟁 중에도 해외로 보냈던 수 만 명의 유학생 중 북한에 갔다 온 이들이 <목민심서>를 그에게 선물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북한에 간 베트남 유학생들은 호치민에 대한 애정과 존경이 더욱 짙어졌다고 합니다. 이미 독재와 개인숭배가 진행됐던 유학지가 본국과 비교됐겠죠.)
호치민과 정약용에 관한 이야기의 사실 여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국 유학자가 베트남 지식인층과 맺은 인연은 약 4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확실히 있습니다.
■ 유학의 영향과 최초의 한류 스타
앞에 언급했듯, 베트남도 유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몇몇 역사적인 장면은, 중국의 서남쪽과 동남쪽 가장자리에 닮은꼴의 형제가 있는 느낌마저 듭니다. 중국 한나라 때 한반도에 ‘한사군’이 설치됐듯, 베트남에는 ‘한삼군’이 세워졌고, 당나라 때는 ‘안동도호부’(한반도)와 ‘안남도호부’(베트남)가 만들어졌으니까요. 국자감과 문묘, 과거시험의 시행 등 중국 유교의 영향도 닮은꼴입니다.
비행기가 없던 시절, 두 나라 사람이 만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래도 기회는 있었겠죠. 이를 테면, 양국 사신단이 꼭 출석해야 하는 중국 황제가 여는 행사 같은. 중국 황제 등을 만나는 자리니, 학식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겸비한 인재가 차출됐습니다. 그래서 양국 문인이 필담과 시를 주고받았다는 이야기를 사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봉유설>(1614년)로 유명한 이수광도 1598년 중국 연경에서 베트남의 대유학자였던 풍콱꾸안과 필담과 시를 주고받았죠. 그때 이수광이 풍콱꾸안이 엮은 한시를 모은 시집의 서문을 써줬는데, 이 덕분에 베트남에서 가장 유명한 외국 문인이 됐다고 합니다. 베트남 유생들이 이 시집으로 한시를 열심히 공부했는데, 그 첫 페이지에 이수광의 글이 있었으니까요. 비록 유학자들의 제한된 커뮤니티 안에서였겠지만, 지봉을 베트남 최초의 한류 스타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중국에서 받아들인 성리학은 세월이 흐르면서 독(毒)이 됐습니다. 자기 수련과 바른 치세의 도구에서 까다로운 제사의식 등을 통해 보수적 지배계급의 방어논리가 되기 시작했으니까요. 중국보다 더 성리학에 매달리던 게 우리나라만의 일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시대에 뒤떨어진 ‘소중아’(小中亞) 사상, 사대주의는 베트남의 엘리트들도 닮은꼴이었습니다. 결과도 닮은꼴.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처럼,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돼버렸습니다. (외국의 큰 세력을 숭배 수준으로 의존하는 것이 특정 세력에 유리할 뿐, 민족 전체로는 매우 위험하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수차례 입증됐지만,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더불어, 국민 생활에 영향이 큰 조약 등은 돌다리도 짚어보듯, 철저하고 냉정하게 검토한 뒤 가는 게 순리입니다.)
2차 대전 때 프랑스령 베트남은 일본군에 점령당했고, 고국으로 돌아온 호치민은 미군의 도움을 받으며 일본군과 싸웠죠. 일본의 항복 선언. 호치민은 하노이로 돌아와 조국의 독립을 선언(45년 9월 2일)했지만, 식민지의 향수를 못 잊은 프랑스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치열한 공방 끝에, 그 유명한 디엔비엔푸 전투로 프랑스를 꺾어버렸죠. 그러나 열강의 역학 관계상 바로 남쪽 영토까지 독립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2년 이내 총투표를 통해 통일정부를 구성하기로 국제사회와 합의했지만, ‘매파’(보수강경파)의 도미노 이론에 빠져있던 미국과 그 지원을 받는 남쪽 정부가 이를 거부하면서 엄청난 전쟁이 다시 불붙었습니다.
베트남전쟁을 끝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유명한 사진(73년 퓰리처상). 일명 ‘소녀의 절규’로 알려진 이 사진은 AP종군기자였던 베트남인 후앙 닉 우트가 72년 네이팜탄 공격 후 열 때문에 불 붙은 옷을 벗고 탈출하는 소녀를 찍은 것입니다. 사진기자는 촬영 후 그녀를 병원까지 안전하게 데려갔습니다. 그녀는 다시 건강을 찾았고, 현재 ‘용서와 평화 공존을 위한 대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참전한 베트남전. 미군은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된 것보다 3배 이상 많은 1,300만 톤의 폭탄을 떨어뜨렸습니다. 베트남 전역에 최소한 2,500만 개의 웅덩이(지름 약 55m)가 생겨났죠. 남베트남 숲의 20%에 해당하는 지역에 뿌려진 2,000만 갤런의 살충제 중 ‘에이전트 오렌지’로 불리는 고엽제는 전쟁 후에도, 베트남 여성들의 유산과 기형아 출산을 초래하고 있고요. 54만 명의 참전 미군 중 5만5,700여 명이 사망했고, 우방국 전사자는 약 5,200 명. 그중 한국군은 4,407 명. 전사자 수가 어느 수준을 넘어가자 언론에서는 이 내용이 발표되지 않았고, 결국 미군의 패배. 베트남과 한국은 아주 멀어지게 됐습니다. (전쟁 중 죽은 미군은 대부분 흑인 등 유색인종이나 저소득층이었습니다. 전쟁은 대부분, 하층민들에게 더 가혹하죠.)
■ 김우중, 경제를 일으켜준 한류 스타
호치민은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습니다. 자신의 시신을 화장해 조국의 북부, 중부, 남부에 나눠 뿌려달라는 조촐한 유언을 남겼지만, 당 간부들은 이를 따르지 않고 시신을 방부 처리했죠. 후임자들은, 외교를 중시하고 실용주의적 자세를 견지했던 호치민과 달랐습니다. 캄보디아, 중국과 잇따라 전쟁을 벌였죠. ▲전쟁으로 파탄 난 국토와 산업시설 ▲전쟁 중 죽거나 빠져나간 인재 ▲중국과의 불화 ▲자본주의권과 단절 등이 경직된 원칙주의와 맞물리며 극심한 경제난을 겪습니다. 특히 78년 대홍수를 비롯해, 77년 이후 4년 동안 이어진 대재해는 농토를 황폐화했죠. 베트남전의 후유증이었을 겁니다. 그 많던 삼림이 사라져버렸으니, 가뭄과 홍수의 피해가 극대화됐겠죠. 그래서, 개발도 중요하지만, 환경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에 베트남은 86년부터 ‘도이모이’(쇄신) 정책을 펼칩니다. 중국을 본떠, 사회주의 1당 체제는 유지하되 자본주의 경제를 일부 받아들인 거죠. 87년 12월부터는 외국 자본 유치에도 나섰고요. 하지만, 외국 사람들이 쉽게 들어오지 않았죠. 베트남전이 끝난 게 불과 10년 전인데, 그 험한 전쟁의 기억을 그렇게 쉽게 지우고 자본을 투자하기 쉽지 않았죠. 정말 갑갑했을 베트남, 그때 은인이 등장합니다. 김우중 전 대우 그룹 회장. 90년대 초 모두 무모하다고 말리던 때 베트남에 거금을 투자한 거죠. 베트남은 전쟁 이후 경제를 일으킨 우리나라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그를 경제고문으로 삼기도 했고요.
전쟁 직후 아시아 최빈국 중 하나였던 베트남에 김우중 회장의 투자 이후 다른 국가들의 투자가 이어졌고, 현재까지 고속 성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기업들이 베트남에 들어왔지만, 지금도 공산당이나 정부 고위 관료들에게는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의 영향력이 꽤 있다고 합니다. 용병으로 참전했던 베트남전 이후 소원했던 양국은 92년 다시 수교했고, 현재 베트남은 우리나라가 가장 많이 투자한 국가 중 하나가 됐습니다. 삼성의 가장 큰 휴대폰 공장이 여기 있고, 오리온이 스낵 업계 1위며, 1위 영화관 체인을 인수한 CJ는 TV홈쇼핑을 하고 있습니다. 2010년 한국은 베트남 투자국가 중 투자건수는 세계 1위고, 투자액은 2위 수준이죠.
■ 인터넷의 보급, <뮤>의 전성기와 몰락
베트남은 우리나라보다 더한 압축성장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90년대 후 진행된 산업화에 이어, 2000년대에는 급속한 정보화가 이뤄졌으니까요. 2010년 말을 기준으로 베트남은 아시아 국가 중 인터넷 보급율(31%)이 8번째로 높은 국가입니다. (한국>일본>싱가포르>타이완>홍콩>말레이시아>중국>베트남 순). 인터넷 이용자 수(약 2,700만 명)로 보면 7위고요. (중국>일본>인도>한국>인도네시아>필리핀>베트남 순). 아시아 주요 선진국들이 90년대부터 정보화에 나섰다면, 베트남은 21세기에 들어와 IT 인프라가 급성장 중입니다. 덕분에 2000년부터 2010년까지 10년 사이 인터넷 유저 증가율이 무려 12,035%로, 멀찌감치 1위죠. 10년 사이, 한국은 2배 남짓, 중국은 18배 정도 늘어났는데, 이 나라는 120배입니다.
이런 인터넷 붐을 타고 베트남 젊은이들이 처음으로 열광한 온라인게임은 우리나라의 <뮤>였습니다. 2000년대 초반 불법 프리서버를 통해 베트남 젊은이들 사이에서 선풍적으로 퍼져나갔죠. 워낙 인기가 있던 터라, 베트남 최초의 게임회사 VNG(당시 비나게임)이 정식 라이선스를 잡으려 했지만, 베트남 최대 IT업체인 FPT에게 무릎을 끓었습니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2004년 FPT가 지른 금액은 무려 20억 원 가량. (베트남의 물가를 생각해보면 엄청난 금액입니다.)
그런데, 온라인게임이 처음이었던 FPT는 엄청난 실수를 하고 맙니다. 상용화를 하면서 CBT와 OBT의 유저 계정을 모두 삭제해 버린 거죠. <뮤> 대타로 중국 킹소프트의 <무림전기>(Swordman online)을 론칭했던 VNG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작은 벤처에서 베트남 최대의 온라인게임 퍼블리셔로 자리를 우뚝 잡게 됐습니다. 이후 베트남에서 유명한 투자사인 IDG와 중국 텐센트의 투자를 받게 되죠.
■ 중국 게임과 한국 게임
FPT의 실수와 <뮤>의 몰락은 우리나라 MMO에게는 안 좋은 전조였습니다. 이후 VNG이 들여온 한국산 MMORPG <라그나로크> <길드워> <구룡쟁패> 등은 모두 흥행 실패. 초창기 동남아 최고의 히트작, 고퀄리티 3D MMO, 무협 MMO 등 각각의 ‘포텐셜’(잠재력)은 충만했지만, 현실은 우울했습니다. 반면, 킹소프트의 <무림전기> 후속작 두 편은 연달아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이래저래 호치민의 한국 온라인게임은 잔뜩 우울한 상황이었죠.
햇살은 북쪽 하노이에서 비췄습니다. 2006년 1월 베트남에서 두 번째로 큰 방송사는 VTC 온라인(당시 VTC 인테콤)이라는 회사를 세웠습니다. 이 회사에서 그 해 6월 서비스한 <오디션>은 동시접속자수 10만 명을 돌파하는 흥행을 기록했죠. 역시 VTC 온라인이 서비스한 <크로스파이어>(2008.4)와 <피파 온라인 2>(2008.11)가 잇따라 최대의 히트작으로 떠올랐고요.
하노이와 호치민은 세로로 길게 뻗은 베트남 북·남의 중심지들입니다. 하노이는 정치와 문화의 중심이고, 호치민은 경제의 수도라 할 수 있죠. 두 도시는 마치 베이징과 상하이처럼 사뭇 다른 정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연치곤 희한하게 두 도시의 게임 회사들의 상황도 매우 다른 모양새입니다. VTC(하노이)와 VNG(호치민)은 베트남 온라인게임 시장에서 1, 2위를 다투고 있는데, VTC는 한국산 캐주얼게임으로, VNG는 중국산 MMORPG로 시장을 양분하고 있죠. 우리나라 MMORPG의 약세는 아쉬운 부분입니다. 이에 관련된 이야기는 이어지는 기사에서 좀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 베트남 게임산업의 아킬레스건, 규제, 그리고 잡설 하나
9,000만 명에 가까운 인구와 날로 뻗어가고 있는 인터넷 인프라. 온라인게임 산업에서 베트남은 매력적인 시장입니다. 하지만, 이 곳에도 아킬레스건이 분명히 있습니다. 권위주의 체제에 따른 온라인게임에 관한 규제죠. 한국과 베트남이 닮은 점은 이 부분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한국은 오는 11월 20일 일명 ‘신데렐라 법’으로 불리는 셧다운제(16세 미만의 0시~6시 인터넷게임 접속 차단)가 시행되는데, 베트남에서는 이미 2006년 말부터 비슷한 법규를 시행해 오고 있었으니까요. 5시간 넘게 플레이하면 경험치가 전혀 안 쌓이죠.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베트남 PC방은 무조건 밤 11시에는 문을 닫아야 합니다. 학교 근처 200m 이내에는 신규 PC방이 생기면 안 되고요. 그리고 지난해 3분기부터 신규 게임 판권(라이선스)을 내어주고 있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각종 규제와 관련해 베트남 게임업체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이후 기사에서 좀더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규제와 관련된 잡설을 하나 더합니다. 시장이나 개인의 자유가 최선이라는 생각은 위험한 발상입니다. (그랬다면, 우리나라나 베트남의 고속성장은 없었습니다.) 건강한 사회에는 적절한 규제와 관리가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그게 도를 지나치면 안 됩니다. 그걸 그냥 지나쳐서도 안 됩니다. (규제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은 큰 일 아니라고, 당장 내 일이 아니라고 눈 감으면 정말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온라인게임 규제와 관련돼 베트남에서 진행됐던 일들이 우리나라에서도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규제 관련 정책에 관해 캐묻는 제게, 베트남 게임업체 분들이 역으로 많이 묻더군요.
“한국에서는 온라인게임 업체들의 매출 1%를 진짜 세금으로 내게 되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