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스토리’를 내세운 온라인게임으로 살아남는다는 것.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미친 짓’에 가깝습니다. 일단 스토리를 내세워 성공한 온라인게임이 드물고 시스템과의 연계, 스토리의 개연성, 제작 속도 등 다양한 한계가 드러난 지 오래입니다.
스토리를 잘 만든다고 무조건 성공한다는 보장조차 없죠. 이 정도면 더할 나위 없는 자폭입니다. (타칭) ‘스토리덕후’라고 불리는 저조차도 주변에서 스토리를 내세우겠다는 게임만 봐도 찾아가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설득하고 싶은 게 현실이니까요.
그런데 넥슨의 <마비노기 영웅전>(이하 영웅전)은 2년째 이 ‘미친 짓’에 도전했습니다. 업데이트까지 스토리에 맞추던 <영웅전>은 지난해 12월 시즌 1을 끝내며 (나름대로) 하나의 이야기를 일단락 짓고 올해 시즌 2를 시작할 예정이죠.
의의가 깊습니다. (수익성이 안 보이면 빠르게 게임을 접거나 방향을 전환하는 온라인게임 업계에서) 2년을 버텼고,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스토리를 <영웅전> 최대의 아이덴티티로 내세우고 있으니까요.
비결이 뭘까요? 어디서 희망을 찾은 걸까요? 2012년 1월. 시즌 1을 마친 <영웅전>의 스토리에 대한 도전을 돌아봤습니다. (콘텐츠와 버그 등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도, 불만도 많지만 글이 지나치게 길어지는 관계로 스토리에만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미리니름(스포일러)도 가득합니다.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1. 온라인게임 스토리의 암흑기
“우리 온라인게임은 최고의 스토리를 내세우겠다.” 개발사 대표가 인터뷰에서 자신 있게 포부를 밝힙니다. 그리고 다음날 기사에는 이런 댓글이 달립니다. “퍽이나.” 불과 4~5년 전만해도 흔히 볼 수 있었던 장면입니다.
기도 안 찬 태클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닙니다. 누구나 최고의 스토리를 만들었다고 자신 있게 밝혔지만 정작 유저가 ‘스토리’를 체감할 수 있는 온라인게임은 거의 없었거든요. 대부분 게임들의 스토리는 그야말로 ‘홈페이지의 프롤로그’ 정도를 채워주는 역할이었죠.
물론 온라인게임 개발사의 심정도 이해가 갑니다. 한 명, 혹은 정해진 숫자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이나 영화나 달리 온라인게임의 주인공은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고 주인공의 행동을 원하는 대로 이끌어 나갈 수도 없습니다. 스토리로 모든 것을 풀기엔 온라인게임의 플레이시간도 지나치게 깁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국내 론칭 이후 반짝하고 불었던 ‘퀘스트를 통한 스토리 전개’ 붐도 지나치면 부족한 것만 못하다는 과유불급의 교훈만 남긴 채 서서히 잊혀졌습니다. 마음은 콘솔게임처럼 대단한 스토리를 내세우고 싶어도 현실의 제약이 너무나 심했죠.
언제부터인가 온라인게임 인터뷰에서 ‘스토리’를 내세우는 개발자는 사라졌습니다. 기자 입장에서도 스토리에 대해 묻지 않는 게 당연해졌죠. 국내 온라인게임의 ‘스토리 암흑기’입니다.
2. <영웅전>의 도전
2010년 1월 오픈 베타를 시작한 <영웅전>은 스토리를 전면에 내세우며 금기에 도전했습니다. 2011년 12월 예상 이외의 반전과 함께 시즌 1을 끝낸 <영웅전>의 엔딩 영상은 유저들에게 큰 충격을 남겼죠.
3. <영웅전> 스토리텔링의 힘 - NPC
<영웅전>은 NPC의 개성에 희망을 걸었습니다. 온라인게임의 스토리의 연출 방법에 대해 많은 고민을 거친 <영웅전>은 MORPG에 맞는 스토리와 연출방법들을 찾아냈죠. 그 결과가 대화 중심의 퀘스트 진행입니다.
<영웅전>은 NPC와의 대화를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게임에 나오는 대부분의 텍스트도 ‘대화’입니다. 일방적인 설명 대신 NPC가 한 문장, 한 문장을 직접 ‘말하고’ 이는 자연스럽게 캐릭터의 감정과 설정을 전달해줍니다.
‘난 예의를 모르는 사람에겐 말해줄 것 없으니 나가주시죠?’라는 브린의 대사나 남에게는 공손한 존대를, 자신의 부하와 말할 때는 하대를 쓰는 법황 레우러스의 말투는 별도의 설명이 없어도 캐릭터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시시콜콜 플레이어를 괴롭히며 ‘죽이고 싶다’는 건의까지 받았던 게렌부터, 비밀을 간직한 용병대장 아이단, 일편단심 카단만 바라보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드윈.
드넓은 필드를 돌아다니는 MMORPG와 달리 던전 중심의 MORPG는 언제나 거점을 두게 됩니다. 파티를 찾고 커뮤니티를 이어 나갈 공간이죠. 거점과 던전을 오가는 만큼 등장하는 NPC의 숫자도 적습니다. 개발팀이 NPC의 개성을 살리기에도 최적의 환경입니다.
결국 <영웅전>은 게임을 즐긴 유저들이 대부분의 NPC를 기억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죠. 그리고 이렇게 유저의 머릿속에 누적된 NPC의 정보는 이후 보여줄 스토리에 ‘강력한 원동력’이 됩니다.
4. <영웅전> 스토리텔링의 힘 – 시즌제의 도입
‘스토리텔링’의 비중이 높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보면 확장팩마다 하나의 주제를 내놓습니다. <불타는 성전>에서 켈타스와 일리단을 무찌른 플레이어는 <리치왕의 분노>에서 아서스와, <대격변>에서 데스윙과 맞닥뜨리죠.
플레이어는 굳이 스토리를 다 깨지 않아도 어느 정도 시나리오를 예상하고 누구와 싸우게 될지 기대하게 됩니다. 여기서 반전도 생겨납니다. 플레이어의 생각과 다른 결과를 보여주면 되니까요.
<영웅전>은 시즌제 업데이트를 선택했습니다. 미국 드라마처럼 각 업데이트를 시즌과 에피소드로 구분하는 방식이죠. 각 에피소드는 중요한 한 가지 이야기를 주제로 다루고, 다음 에피소드에 대한 ‘떡밥’을 던지면서 끝납니다. 스토리를 에피소드 단위로 짧게 즐길 수 있고, 에피소드마다 기승전결이 갖춰진 만큼 한층 쉽게 몰입됩니다.
여기에 이야기도 ‘상황중심’에서 인물 중심으로 바뀝니다. 종탑에 오르는 거대한 거미를 막는 프롤로그에서 시작된 <영웅전>의 이야기는 에피소드 1에서는 놀과의 전쟁, 에피소드 2에서는 코볼트의 습격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다가 에피소드 8에서는 잉켈스의 반란, 에피소드 9와 10에서는 카단과 티이의 이야기 등 점차 인물을 내세운 이야기로 옮겨가죠. NPC를 내세운 <영웅전>에서 인물중심의 이야기는 그만큼 쉽게 와 닿고 이해도 빠릅니다. 배신과 죽음이라는 반전을 꾀하기에도 좋죠.
5. <영웅전> 스토리텔링의 힘 – 기획부터 함께 가는 스토리
현재 <영웅전> 개발팀에는 시나리오만 작성하는 인원이 없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기획자들이 게임의 콘텐츠 기획과 시나리오를 함께 진행합니다. 특정 인물 한두 명에 의해 제작되는 스토리는 그만큼 게임 콘텐츠와 따로 놀기 쉽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시나리오는 회의를 통해 개발진의 의견을 묻고 결정됩니다. 담당은 있지만 전담은 없습니다. 회의를 통해 시나리오가 결정되면 자연스럽게 에피소드의 맥락과 보스가 정해지고 이는 바로 게임 콘텐츠 제작으로 이어집니다.
여기까지가 2년 동안의 과정에서 배운, 혹은 처음부터 많은 고민을 거쳤던 ‘<영웅전>의 스토리가 보다 게임에 녹아들 수 있는 힘’입니다.
6. 부정적인 결과들
다른 개발사는 왜 이런 방법을 안 쓴 걸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부작용이 너무 많거든요. <영웅전> 역시 스토리텔링의 부작용을 고스란히 떠안았습니다.
스토리에 치중하다 보니 업데이트가 상대적으로 늦을 수밖에 없고 운신의 폭도 좁습니다. 당분간 하수도의 리자드맨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데 유저 반응이 안 좋다고 다짜고짜 평원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만들 수 있는 시스템도, 몬스터도, 보스도, 아이템도 시나리오에 맞춰야 합니다. 아니면 시나리오를 콘텐츠에 맞추기라도 해야죠. 유저 입맛에 맞는 콘텐츠를 잔뜩 만든 후 ‘갑자기 동쪽 지역에 마계로 가는 던전이 발견됐다’거나 ‘의문의 집단이 마왕을 소환했다’ 같은 속 편한 변명을 대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스토리가 끊기고 난 후도 문제입니다. 짧게는 몇 백 시간에서 길게는 천 시간을 가뿐히 넘기는 온라인게임에서 유저들의 플레이시간을 모두 스토리텔링으로 채우는 건 불가능합니다. 소위 말하는 ‘던전 뺑뺑이’나 PvP처럼 자연스러운 반복 콘텐츠가 필요하죠.
하지만 스토리가 중심이 되는 <영웅전>에서는 자연스러운 반복이 무척 힘듭니다. 스토리가 끊기는 순간 유저는 ‘이제 콘텐츠가 끝났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요. 다른 게임에서는 20~30번은 너끈히 클리어할 던전도 <영웅전>에서는 두세 번을 돌았다는 이유로 지겨워집니다.
서브 캐릭터라도 키운다면 NPC와의 기나긴 대화와 이미 끝을 아는 반전은 지루함만을 안겨 줍니다.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서 ‘이제 영화를 다 봤으니 앞으로 돌려서 재미난 구간을 다시 찾아서 보자’고 생각하는 유저가 드문 것과 마찬가지죠.
에피소드 9 이후 대부분의 전투는 보스전 위주로 구성하고, 미궁과 보스랠리, PvP 등 스토리와 연관 없는 반복성 콘텐츠도 만드는 등 지겨움을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 중이지만 여전히 확실한 정답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7. 희망 – 업데이트마다 찾아오는 유저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웅전>은 시즌 2에서도 스토리를 강조해 나갈 예정입니다.
<영웅전>은 새로운 에피소드가 업데이트 될 때마다 동시접속자가 대폭 늘어납니다. 당연한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영웅전>은 그 폭이 다른 게임보다 큽니다. 그리고 다시 유저들이 스토리를 끝낼 때쯤 되면 접속자가 줄어들기 시작하죠. 바꿔 말하면 ‘스토리를 보기 위해서’ <영웅전>을 즐기는 유저가 그만큼 많다는 뜻입니다.
물론 스토리에 의존한 게임은 위험합니다. 설정에 빈틈이 생기거나 스토리가 조금만 재미없어져도 유저들이 등을 돌리기 십상이죠. 일정을 다 못 채우고 끝나는 일일 드라마처럼요. <영웅전>도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거듭하고 있는 셈입니다.
돌이키기엔 이미 늦었습니다. 아무도 간 적이 없는 길을 간다는 개발팀의 자부심도 한몫합니다. “유저들이 스토리를 파고들고, NPC의 대화나 상황을 통해 앞으로의 이야기를 예언할 때 보람을 느낀다.” <영웅전>을 개발하는 정승우 기획팀장의 이야기입니다.
스토리가 부담이 된 시대에서 스토리를 내세운 온라인게임으로 살아남기. 지난 2년 동안 이어진, 그리고 앞으로 계속될 <영웅전>의 고민이자 달성해야 할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