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차세대 게임포털을 표방하는 ‘스타이리아’의 발표회가 있었습니다. 그라비티와 손노리는 3개의 신작 게임과 11곳의 쟁쟁한 써드파티가 발표했죠. 관련 동영상이나 행사 사진들은 많이 보셨을 테니, 그 뒷면의 의미를 3가지 키워드로 다소 주관적으로 짚어볼까 합니다. (해설기사가 다소 늦은 점 사과드립니다.) /디스이즈게임
‘스타이리아’ 발표회 첫 인사말을 한 김정률 회장(그라비티)은 “고통의 터널을 지나고 새로운 이원술 시대가 올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다소 낯뜨거운 레토릭(수사)이지만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손노리. 90년대 소프트맥스와 함께 PC패키지게임 전성시대를 이끈 쌍벽이었죠. 그 중심에 섰던 인물이 이원술입니다.
93년 손노리팀에 합류해 국산 RPG의 고전으로 꼽히는 <어스토니시안 스토리>(94년)를 비롯, <포가튼사가>(97년, 판타그램), <강철제국>(99년), <악튜러스>(2000년, 그라비티와 공동제작) 등 유명한 RPG를 만들어냈죠. 그 시절, 개발자 하면 이원술, 최연규(소프트맥스)가 항상 첫 손가락에 꼽혔습니다.
하지만 게이머들은 급격히 온라인으로 쏠렸고, ‘비운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화이트데이>(2001년, 위 이미지)마저 엄청난 찬사에도 불구하고 불법복제 때문에 울어야 했죠.
그 뒤 손노리는 플레너스라는 대형 엔터테인먼트 그룹에 합병되면서 좀더 안정적인 기반에서 다시 비상할 준비를 하게 됐죠. <몬스터 꾸루꾸루>(2002년) <카툰 레이서> <트릭스터> (2003년) 등 온라인게임도 나오게 됐구요. 하지만 이때 나온 게임들은 과거의 명성에 비하면 크게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인기를 얻었던 <카툰 레이서>마저 <카트라이더>의 등장으로 급브레이크가 걸렸구요.
큰 기업 안에서 대규모 인원으로 여러 프로젝트들을 진행하는 게 손노리 같은 엽기발랄한 개발사에게는 버거운 짐이 됐던 모양입니다. 결국 손노리는 2003년 12월 플레너스에서 나옵니다. 이때 개발팀 일부가 ‘엔트리브’라는 이름으로 분리됐구요.
이원술과 손노리가 이렇게 뒤뚱거리는 사이, 90년대의 ‘2S’(Softmax, Sonnori) 대신 ‘5N’(NC, Nexon, NHN, Netmarble, Neowiz)이 게임계를 장악했습니다. 또 함께 패키지 게임을 만들던 김학규(IMC게임즈 대표, 라그나로크 온라인), 김동건(데브캣 실장, 마비노기), 서관희(엔트리브 이사, 팡야) 등은 확실한 히트작으로 온라인 쪽에 안착했구요.
과거의 화려한 명성에 비해 현재 손노리와 이원술은 10대보다는 20~30대 게이머, 게이머보다는 업계 관계자들에게 친근한 게임사가 되어버렸습니다. 90년대 재기발랄함과 코믹함으로 게이머들을 사로잡았고, 국내 최초로 게이머를 대상으로 게임페스티벌을 열었던 개발사로는 참 곤혹스러운 현실이죠.
그런 점에서 “내 인생 마지막 작품”, “승부를 걸겠다” 등 이원술이 하는 말은 아주 절박하게 느껴집니다. 까까머리 이마 위로 새긴 ‘V’ 모양의 스크래치가 ‘Victory’를 의미한다는 이야기도 예사롭지 않구요.
90년대의 슈퍼스타가 다시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지, 그 시절의 자질구레함(김학규_심경주와의 삼각관계, 위자드의 미인 홍보담당자, 버그, 출시연기, 불법복제 등등)을 함께 경험했던 필자도 굉장히 기대가 됩니다.
그라비티, 참 대단한 회사입니다. 대표작인 <라그나로크 온라인>은 기네스북 감입니다. 5대양 6대주, 총 47개 나라에나 나가 있죠. 덕분에 미국 나스닥 등록까지 했구요.
얼마 전 디스이즈게임에 “<라그나로크 2>. 9월 CBT한다”는 기사가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디스이즈게임 멤버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뉴스 조회수가 확 늘어났는데, 상당 부분이 일본에서 오는 것이더군요. 추적해보니, 그 기사를 인용한 일본 커뮤니티와 웹진 등의 링크를 통해서였습니다. <라그나로크>라는 브랜드 파워를 가늠할 수 있는 사건이었죠.
하지만 <라그나로크>는 그라비티의 자랑이자 한계입니다. 엄밀히 말해 현재 그라비티는 ‘one product company’에 가깝기 때문이죠. <라그나로크>에 이어 야심차게 내놓았던 게임포털 ‘로플넷’, MMORPG <로즈 온라인>의 잇따라 실패했습니다. <라그나로크>가 상용화한 게 2002년 8월이니, 그라비티는 그후 3년 동안 후속 인기 게임을 내놓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되죠.
경쟁사인 엔씨소프트, 넥슨 등이 캐주얼 장르와 MMORPG로 진출하고 있고, 다른 대형 퍼블리셔들도 공격적으로 게이머들을 공략하고 있는 시점에서 그라비티로서는 다소 갑갑한 상황이었습니다. 8~9월께 CBT에 들어갈 것으로 전망되는 <레퀴엠>도 유저들 사이에 아직까지 별다른 관심을 못 끌고 있구요. <라그나로크> 팬층과는 거리가 좀 멀어 보이죠.
이런 점에서 ‘스타이리아’는 꼭 필요한 카드였다고 여겨집니다. 손노리와 ‘국내 6개월, 해외 5년’이라는 특이한 조건으로 계약하게 된 것은 이런 절박한 상황을 반영한 것일테구요. 어쨌든 그라비티는 9월 CBT가 예상되는 <라그나로크 2>와 함께 MMORPG와 캐주얼 양쪽에서 <라그나로크> 팬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후속작을 확보했습니다.
그라비티가 ‘스타이리아’를 통해 ‘one product company’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을지, 47개 나라에서 <라그나로크> 말고도 다른 게임으로 계속 인기를 지속시켜 나갈 수 있을지 흥미롭게 지켜보도록 하죠.
지금까지 국내 게임포털 중 처음부터 11개 개발사와 어깨를 걸고 나온 곳은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스타이리아’와 함께 하는 개발사 규모는 그 동안 개발사를 찾기 위해 열심히 발품을 팔았던 엔씨소프트나 NHN, 네오위즈 등 대형 퍼블리셔들을 머쓱하게 합니다.
이원술 대표는 써드파티가 호응한 이유를 “개발사들에게 환상적인 조건”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두 가지 방식으로 수익을 나누는데, ▲개별 게임 아이템은 수수료만 빼고 그 게임 개발사에게 가고 ▲공통적인 아이템은 동시접속자 수 기여도에 따라 모든 개발사에 배분되는 게 개발사들에게 어필했다는 거죠.
하지만 이런 수익배분 방식 이전에, 써드파티를 모이게 한 것은 이원술 대표와 써드파티 개발자들과의 인간적인 인연이었을 겁니다. 함께 개발자로서 즐거움, 아쉬움, 아픔 등을 겪어왔고 맥주 한잔 나누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테죠. 개발자들을 더 잘 배려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이런 인연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가능하겠구요.
현재 11개 써드파티 개발사들의 진용은 중견개발사와 신생개발사가 어울려 있는 모양새입니다. 중견 개발사 입장에서는 퍼블리셔 눈치 볼 것 없이 자유로운 자세로 게임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반면 신생개발사는 마케팅의 장점 외에도 SDK(Software Development Kit) 덕분에 캐릭터 제작 등 개발 과정의 30% 가량을 절약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일 테구요.
기존 게임포털과는 완연히 다른 그림이죠. 덕분에 ‘퍼블리셔-개발사’의 수직적 모델 대신, ‘개발사-개발사’의 자유로운 연대가 두드러지는 수평적 모델의 느낌이 듭니다. 대규모 퍼블리셔가 여러 개발사들을 이끄는 요즘 트렌드와 확실히 다른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런 자유로움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몇몇 개발사에게 물어보니”언제까지 만들 것이다”는 제약이 없다고 하더군요. 따라서 책임감이 떨어질 우려, 즉 개발사가 여러 게임을 만들 때 우선순위에서 밀릴 우려가 있겠죠.
또한 수익 배분과는 별도로 마케팅 포커스를 어디에 둘 것이냐는 우려도 있습니다. 수평적 연대이므로 ‘선택과 집중’이라는 측면에서 손노리와 써드파티 간의 의견충돌이 빚어질 우려가 있을 테니까요.
이런 우려들을 불식하고 대형 퍼블리셔 모델에 대항하는 새로운 연대의 모델이 성공할 수 있을지 눈여겨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