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 칼럼을 쓴 글쓴이는 국내 구글플레이 스토어에 게임을 출시해 무난한 성적을 거둔 중소 모바일 게임사의 사업 PM입니다. 업계에서 민감한 사안을 다루고 있는 만큼 글쓴이의 신상정보를 노출하지 못 함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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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게임업계에서 많은 화제를 모은 이른바 '확률형 아이템(뽑기 아이템) 규제' 문제를 보고 있으면 게임업계의 녹을 먹고 있는 사람으로서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무엇보다 셧다운제 같은 다른 규제안에서는 누구보다도 믿음직스러운 아군이 됐던 게이머들이 이 문제에서만큼은 게임회사들을 '일정한 패턴(강강강강강강강 계속해서 강강강강)'으로 '난타'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유구무언' 이라는 사자성어가 절로 떠오를 지경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필자 역시 '가슴'으로는 유저가 말하는 것처럼 모든 확률형 아이템의 확률을 공개하고, 보다 투명하게 게임을 서비스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장기적으로는 게임이라는 문화 콘텐츠의 사회인식을 재고시킬 수 있고, <바다 이야기> 이래로 게임업계의 철전지 원수와도 같은 저 사행성 산업과의 근본적인 차별화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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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머리'로는 그런 주장을 쉽게 할 수 없는 것 역시 현실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대한민국 게임업계. 정확하게 말하자면 ' 확률형 아이템'을 주력 BM(비즈니스 모델)으로 채택하고 있는 대다수의 모바일 RPG/카드 게임들. 나아가 그 그런 게임들을 주력으로 서비스하고 있는 다수의 게임업체 입장에서는 이 '확률 공개'라는 처방이 치명적인 극약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게이머 입장에서는 ‘그깟 확률 공개가 게임 서비스에 얼마나 영향을 끼친다고 죽는 소리 하는가? 혹은 엄살이 심하다’고 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현재 '확률형 아이템'은 수많은 게임에서 이미 단순한 상품의 차원을 넘어서서 '게임의 밸런스' 내지는 '재미'의 영역에 도달할 정도로 뿌리가 깊게 자리 잡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보다 섬세하고 신중한 처방을 하지 않고 그저 단순하게 ‘확률형 아이템이 문제니 확률을 공개하라’ 라고 하는 것은 ‘암이 폐에 자리잡고 있으니 일단 폐를 통째로 쨉시다’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발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캐릭터 뽑기가 주력 BM'인 모바일 게임을 서비스하고 있는 게임사 입장에서는 확률공개도 확률공개지만, 사실 그만큼이나 두려워하는 것은 따로 있다. 바로 ‘확률 공개로 인해 확률형 아이템의 확률을 수시로 변경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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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실제로 필자가 게임업계에 있으면서 직접 경험한 '캐릭터 뽑기가 주력 BM인' 모바일 RPG들의 확률형 아이템 확률 변경 사례다. 아마도 일부 유저들은 아래 텍스트를 읽고 마치 암이 걸리는 듯한 느낌을 체험할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미리 사죄의 말을 전하겠다.
(1) 한 모바일 RPG는 게임 출시 이후 순조롭게 유저들이 몰려 성황을 이루었다. 하지만 일부 과금 유저들이 "고급 캐릭터가 뽑히는 확률이 너무 낮다"며 악평을 남기고, 공식 카페 등을 통해 여론을 몰아갔다. 이런 악평이 신규 유저들에게 나쁜 인상을 주고 실제 지표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자 결국 게임사는 유저 몰래 고급 캐릭터의 뽑기 확률을 올렸다. 이후 과금 유저들 사이에서 '고급 캐릭터를 뽑았다' 라는 경험담이 퍼지고 결국 악평은 사라진 채 게임은 다시 초기의 활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
(2) 다음 신규 스테이지의 업데이트를 준비하던 게임사는 난감한 상황에 부딪혔다. 새롭게 추가될 스테이지에서는 A라는 캐릭터가 공략에 거의 필수적으로 사용되는데, 현재 유저들 사이에서 A는 낮은 평가를 받고 있을뿐더러 많이 풀리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게임사에서는 유저들 몰래 업데이트 수일 전 A 캐릭터의 뽑기 확률을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 2배 이상 올렸다. 그 결과 A는 순조롭게 보급되었고 유저들은 대다수가 수월하게 신규 스테이지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
(3) 어떤 모바일 RPG는 출시 1달을 맞이해서 '캐시 아이템'(루비, 사파이어, 다이아몬드 등등)을 이전에 비해 50%의 덤을 더 얹어주는 이벤트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 이벤트는 바로 문제가 발생했는데, 유저들의 과금이 늘어난 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고급 캐릭터'들이 공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다급해진 서비스사는 유저 몰래 고급 캐릭터의 등장 확률을 낮췄고, 그 결과 게임은 밸런스가 붕괴되는 일 없이 순조롭게 서비스를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
(4) 한 게임사는 고민에 빠졌다. 뽑기 확률이 다른 게임에 비해 다소 후하기 때문에 '뽑는 맛이 좋은 RPG'라고 소문이 난 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이게 지속된다면 1달도 되지 않아 게임 밸런스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와중에 뽑기 확률을 무턱대고 낮출 수도 없는 법. 결국 게임사는 유저 몰래 뽑기에 변수를 넣어서 '뽑기를 특정 회수 이상 한 유저는 그 이상 뽑을 시 확률이 떨어지는' 조치를 취했다. 결국 게이머들은 계속해서 뽑기의 맛을 느끼면서도 게임은 밸런스 붕괴 없이 순조롭게 서비스가 이어지게 되었다. (^^)
(5) 한 모바일 RPG에서는 A라는 캐릭터가 갑자기 '대세 캐릭터'로 등극하면서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적게는 수 십, 많게는 수 백 만원을 지른 게임의 핵심 골수 과금 유저들이 A 캐릭터를 뽑지 못했다고 카페에서 하소연을 하는가 하면, 당장 게임을 접겠다는 유저까지 등장하기 시작했다. 결국 게임사는 특정 액수 이상 지른 유저들이 A 캐릭터를 뽑을 수 있는 확률을 아무도 모르게 높였다. 결국 이 게임은 골수 과금 유저들이 떠나가거나, 이로 인해 그들과 같이 게임을 하던 사람들이 연쇄적으로 떠나가는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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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유저들은 위의 텍스트를 읽고 심각한 괴리감(내지는 역겨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위의 사례들은 필자가 게임업계에 있으면서 경험한 것 중 빙산의 일각,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이나 현재 '캐릭터 뽑기가 주력 BM'인 모바일 게임들은 '뽑기'와 '게임의 밸런스', 'BM' 나아가 '재미'에 이르기까지 따로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한 몸이 되어 움직이고 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섣부르게 '뽑기 확률 전면 공개(및 공개한 확률의 변경 금지)' 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해보자.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
정말 아이러니한 상황이지만, 위에서 예시로 든 5가지 사례만 보더라도 만약 게임사에서 유연하게 확률을 변경하지 않았다면 해당 게임들은 유저나 게임사 모두에게 배드엔딩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개발사는 게임이 망해서 밥줄이 끊기고, 유저는 일단 시간과 노력(그리고 돈)이 들어간 게임이 갑작스럽게 서비스를 종료하는, 그런 엔딩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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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필자는 이와 같은 확률형 아이템의 사례들이나 지금의 상태가 결코 '정상' 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앞에서도 말했듯이 게임업계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이번 기회에 다소간에 출혈은 감수하더라도 확률형 아이템에 대해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라도 대한민국 게임업계를 대표한다는 '협회' 그러니까 한국 인터넷디지털엔터테인먼트협회(K-IDEA)와 그 협회의 주축이며 근간이기도 한 소위 '업계를 이끌어간다는' 대형 게임사들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고 있다.
특히 대형 게임사들은 확률형 아이템 이슈가 처음으로 불거졌을 때부터 계산하면 무려 7년이나 최소한의 피해로 조기 진압할 수 있는 찬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다가 결국 일을 크게 키운 원죄(?)가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번 이슈에 대해 누구보다도 큰 책임이 있고, 그만큼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뜻이다.
지난 2008년 처음으로 자율 규제 선언이 나왔음에도 이를 온갖 방법으로 무력화 시키고 '약속과 믿음'으로 보답했던 것은 다름 아닌 회장사와 부회장사 등을 거친 N사(들)이었다는 것은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게이머들도 잘 알고 있다.
지난 2008년 게임물등급위원회가 확률형 아이템 조사대상으로 포함한 10개 게임사. 단 한 곳도 제대로 협조하지 않았다
협회 역시 보다 적극적이고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현재 협회가 이번 확률형 아이템 이슈에 대해 내놓은 대안이라는 것은 사실 지난 2014년 11월 '청소년 보호'를 목적으로 내놓은 자율 규제안 하나뿐이다. 하지만 이 자율 규제안은 사실 필자 같은 사업 PM의 전문적인 시각도 아닌, 그냥 '게임을 좋아하는' 일반인의 시각에서 봐도 '면피용'임이 너무나도 명백한 수준 낮은 규제안에 불과하며, 그나마 협회에 가입하지 않은 대다수의 중소 게임개발사들에게는 어떠한 강제력도 없는 허울뿐인 종이 방패에 불과하다.
다행히 협회에서도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고 밝힌 상태며, 자율 규제안을 수정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오는 4월 8일에는 신임 회장의 취임이 예정되어있는 만큼 이전보다 보다 나아진 행보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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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했지만, 결국 정리하자면 확률형 아이템에 대한 이슈는 솔직히 이제는 그냥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스리슬쩍 넘어갈 수도 없고, 넘어가서도 안 된다. 게임업계 입장에서는 제대로 한번 부딪히고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된 것이다.
다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서 '모든 종류의 확률형 아이템 확률 일괄 공개' 같이 게임의 장르, 소재, 특성, 속성, 야근, 철야 등 모든 것을 상큼하게 무시하는 '극단적인 극약 처방'은 설사 내리더라도 굉장히 신중하게 해야 한다. 물론 게이머 입장에서야 "그냥 확률형 아이템 뿌리를 뽑으면 안 되요?" 라고 반문할 수도 있고, 그 심정은 같은 게이머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이해를 한다. 하지만 현재 그 뿌리는 업계라는 지반에 있어 굉장히 단단하고 깊숙하게 박힌 상태이기 때문에 무작정 뽑으려고 들면 지반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을 한 번만 생각해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협회와 대형 게임사들은 이 이슈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고 보다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야 한다. 확률형 아이템이 지금과 같은 이슈로 자리 잡기 전에 해결할 수 있는 '골든 타임'을 놓친 것은 누가 봐도 협회. 그리고 그 주축인 대형 게임사들이라는 점을 면피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