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동안 디스이즈게임에서 ‘웰메이드’ 이슈가 뜨거웠습니다.
러프의 칼럼 ‘로한의 흥행은 가문의 위기?’가 나간 다음부터였죠. 상당한 많은 댓글이 붙었는데, 단순히 기사가 좋다, 구리다 식이 아닌 ‘MMORPG에서 웰메이드의 기준’이나 ‘혁신 VS 상업적 완성도’ 같은 진지한 내용이 많았죠.
댓글을 읽다가 문득 게임 쪽에서도 ‘웰메이드’라는 용어가 많이 쓰이고 있는데, 제대로 정리된 적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덕분에 자꾸 논의가 옆길로 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일단 제가 아는 허접한 수준에서나마 '웰메이드'(well-made)라는 용어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개념이라는 게 대개 그렇듯, 칼로 무 자르듯 간단히 정리되긴 어렵습니다. 게다가 저는 정교하게 글을 쓸 자신이 없습니다. 다만 개념을 잡아가기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도움되는 때가 가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가끔'을 기대하며 영화 쪽 이야기를 빌려 ‘웰메이드’를 풀어보겠습니다. /디스이즈게임
‘웰메이드’가 인구에 회자된 것은 영화 쪽에서부터였습니다. 2003년께 <살인의 추억>(봉준호 감독), <올드보이>(박찬욱 감독)의 개봉과 함께 영화 관련 지면을 장식했죠. 운좋게 당시 신문사에서 영화 쪽을 취재하던 저도 이 단어를 자주 썼으니까, 나쁜 머리로도 확실히 기억하죠. -_-;;
당시 ‘웰메이드 필름’은 흥행성을 갖춘 완성도 높은 영화를 의미했습니다. 이에 대해 씨네21 김소희 편집장은 “장르의 관습, 스타 시스템 등을 활용하되 감독 감독의 개성적인 스타일과 문제의식을 겸비함으로써 대중의 호응까지 얻어낸 잘 만들어진 상업영화”라고 깔끔하게 정의한 바 있죠.
그 전에도 ‘웰메이드’한 영화들이 없진 않았을텐데, 왜 하필 이 시기에 이 용어가 널리 퍼졌을까요? 제 생각으로는 국내 영화환경의 물질적, 기술적 발전(최소한 스크린에 빗줄기는 안 새잖아요. ^^) 말고도 영화 기획사와 평론가, 기자들의 공이 컸던 것 같습니다.
<살인의 추억>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이 영화, 정말 잘 만든 영화입니다. 그럼에도 개봉 전, 흥행에 관해선 우려가 많았죠. <플란더스의 개>를 데뷔한 봉준호 감독. 저는 대학시절 봤던 단편영화 <지리멸렬>로 그의 팬이 됐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었죠. 게다가 송강호와 박해일. 변변한 여배우 하나 없고, 칙칙한 남자 배우들. 거기에 해결되지 않은 연쇄살인사건 이야기. ‘스펙터클’ 같은 것은 기대할 수도 없고…. 확실히 보통의 흥행작들과는 확실히 거리가 있었죠.
이 영화의 제작사인 싸이더스는 당시 <로드무비>와 <지구를 지켜라>와 같은 영화의 실패로 부채가 엄청나게 누적된 상태였습니다. <살인의 추억>마저 망하면 추억 속의 영화사가 될 처지에 있었죠. 강우석, 강제규로 대표되는 흥행영화 감독 라인과 달리 싸이더스(차승재 대표)는 작품성 있는 영화들을 만들던 곳이어서 평론가와 기자를 비롯한 영화인들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지구는 못 지켰지만 싸이더스는 지켜야 할 시점이었죠.
마케팅적으로 다른 것을 내세울 게 없었던 영화사는 ‘잘 만들어짐’을 내세웠죠. 평론가들도 ‘웰메이드’라는 멋진 수식어를 안겨줬고, 기자들도 이 용어를 받아쓰게 되었죠. 그렇다고 말도 안되는 짓을 그렇게 단체로 합창할 수는 없는 법이죠. 깐깐한 평론가들이 이런 수식어를 흔쾌히 줄 수 있었던 것은 영화 아카데미를 졸업해 이론과 실제를 겸비했던 봉준호 감독의 능력 덕분에 가능했을 겁니다.
임권택, 이장호, 곽지균 등 이전 세대 감독들과 달리 2000년대 초 등장한 박찬욱, 봉준호, 이재용 등은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전 세대에는 감독이 되기 위해서는 현장에서 바닥부터 구르며 철저히 도제식 과정을 밟아야 했죠. 스크립터(영화의 전 과정을 기록하는 역할)를 거쳐 조감독 생활을 5~10년 정도 해야 소위 ‘입봉’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도제 과정 덕분에 전문적인 이론에는 약했겠지만, 열악한 제작환경에서 연출 뿐만 아니라 영화 제작 전부분의 실무에 ‘빠삭’할 수 있었을 테죠.
반면 봉준호, 이재용 같은 감독은 영화아카데미 출신입니다. 박찬욱은 영화 평론으로도 유명했던 사람이고요. 대학 시절 얄라셩(서울대), 프로메테우스(연세대) 같은 동아리 활동을 통해 영화 이론과 초보적인 카메라 조작법을 공부했던 이 세대는 영화진흥위원회 산하 영화 아카데미에서 ‘제대로’ 영화의 이론과 실기를 배우게 됐죠. 거기에 영화 투자붐까지 겹쳐 졸업 후 이전 세대보다 쉽게 감독을 할 수 있었구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보다는 누벨 바그와 미국 B급 영화의 정서를 좋아했던 이들 - 대표적으로 박찬욱과 봉준호, 장준환(지구를 지켜라) 등 - 은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새로운 감수성의 영화를 세련된 영화 문법에 따라 만들었고, 헛돈만 날린 한국형 블록버스터에 좌절하고, 조폭코미디 퍼레이드에 질렸던 동세대의 평론가들은 열광할 수 있었을 겁니다.
아마 <살인의 추억> 개봉 즈음의 씨네21이나 필름2.0을 가지고 있다면 다시 펴보시면 재미있을 것 같네요. 저도 당시 Film2.0을 다시 꺼내봤습니다. 개봉 2주 전 표지엔 ‘봉준호 감독은 어떻게 걸작을 만들었나’라는 타이틀이 가장 큰 글씨로 박혀 있더군요. 그 뒤로 3주 동안 ‘자타가 공인한 2003년 최고의 작품’ <살인의 추억>에 관한 두툼한 기획기사를 뒤를 잇고 있구요.(이 부분은 비꼬는 말투가 아닙니다. 저도 동의했던 문구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웰메이드’를 단다고 흥행하는 법은 아닙니다. 하지만 풀리지 않은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찜찜한 영화는 모두의 예상을 훨씬 넘는 엄청난 히트(관객 510만 명)를 기록하죠. 흥행 코드가 애매하던 <살인의 추억>이 성공하면서 이후 영화들은 너도나도 ‘웰메이드’라는 용어를 붙이게 됐구요. 덕분에 실제 제작 현장에서도 질 높은 영화들이 어깨 펴고 만들어질 수 있게 됐겠죠. 그리고 흘러흘러 디스이즈게임 내에서까지 ‘웰메이드’ 논쟁이 붙게 된 거구요.
글이 길어졌네요. 어쨌든 한국 영화에서 ‘웰메이드’는 작품성과 상업성을 겸비한 영화 정도로 정리하면 되겠네요. 여기서 상업성은 장르의 관습이나 스타 시스템을 제대로 활용함을 의미할 테고, 작품성은 감독의 개성적인 스타일과 문제의식 정도를 뜻할 것 같구요.
그렇지만 원래 ‘웰메이드’는 미국에서 건너온 단어 아니었던가요?
‘웰메이드 영화’는 말 그대로 ‘잘 만든 영화’입니다. 좋은 스토리, 좋은 연출, 좋은 연기, 좋은 화면/사운드 등이 결합된 영화라는 의미겠죠. 미국 친구는 그냥 좋은 영화라고 하더군요. 일반인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단어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영화 쪽 지인에게 여쭤보니, 현재의 영화제작 시스템의 초석이 다져진 할리우드 초창기 스튜디오 시스템 때부터 관용적으로 쓰였다고 하더군요.
여기서 ‘스튜디오’는 촬영 공간의 의미가 아닙니다. 파라마운트나 폭스, RKO 같은 메이저 영화사를 뜻하죠. 따라서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은 1920~30년에서 1945년대까지 할리우드의 8개 메이저 영화사에 의해 주도된 제작-유통-상영의 수직 통합체계를 의미합니다. 당시 영화사들은 안정적인 수익을 위해 제작은 물론 배급이나 극장체인까지 독과점적으로 장악하고 있었습니다.(요즘 우리나라에서 CJ엔터테인먼트가 영화를 만들어서 CGV에서 상영하는 것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죠.)
흔히 할리우드를 ‘꿈의 공장’(Dream Factory)이라고 하는데, 당시 제작환경은 ‘공장’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립니다. 영화사는 배우, 감독을 장기계약 형태로 고용해서 컨베이어에서 물건을 조립하듯 시나리오를 영화로 찍어냈습니다. 여기서 생산된, 특히 관객에게 호응을 얻은 영화들은 일정한 공통 요소를 가지고 있었겠죠. 그렇게 해서 ‘장르’ 영화의 관습과 공식이 생겨나게 된 거구요. 각 스튜디오들은 특정한 장르를 전문적으로 개발했고, 스튜디오 소속 배우는 같은 장르에 계속 출연하며 그 장르의 스타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흥행 안전성이 지상과제였던 까닭에 감독의 독창성이 끼어들 여지가 별로 없었습니다. 표준 제작 공정에 따라 월급쟁이 감독은 영화사에서 준 대본을 보고 ‘장르’의 공식에 맞춰 해당 장르(소속사)의 ‘스타’를 써서 영화를 찍어 내면 됐던 거죠.(속편이 발달했던 것도 그런 탓이죠.) 이 시스템에서는 비슷한 예산과 제작시간, 스타 배우라는 조건 아래 ‘누가 더 매끈하게 영화 상품을 만들어 내느냐’가 감독의 자질을 평가하는 기준이었습니다. 존 포드 감독은 이런 시스템 내에서 존 웨인 같은 스타를 써서 <역마차> 같은 양질의 서부극을 만들어냈었죠. 이런 영화에 ‘웰메이드’라는 수식어가 붙었구요.
이런 스튜디오 시스템과 유사한 개발 방식이 게임 쪽에도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EA가 가장 대표적인 것 같네요. <FIFA>나 <MVP베이스볼> 등 EA스포츠 라인업은 어느 정도 흥행이 보장된 타이틀입니다. 누가 만들었냐는 중요하지 않죠. 1년(≒예산)마다 시리즈의 특성(≒장르)에 맞춰 조금씩 개선돼 출시되면 됩니다. 다른 EA 계열사들도 흥행 타이틀을 반복해서 생산하는 건 비슷하죠. 그 동네 사정에 밝은 지인에 따르면 어떤 타이틀이라도 개발에 1년 8개월 이상 안 준다고 하더군요. 이쯤되면 처음 나왔을 때 혁신적인 게임으로 평가받았던 맥시스의 <심즈> 시리즈가 왜 그렇게 속편이 많이 나왔는지 이해가 되시겠죠.
48년 反트러스트법의 시행, 50년대 TV의 등장 등으로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은 위기에 처했습니다. 게다가 50년대 등장한 작가주의나 60년대 뉴어메리칸 시네마 운동 등은 기존 메이저 스튜디오의 제작 관행에 쐐기를 박았죠.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이지 라이더> <졸업> 등 B급 영화가 각광받던 이런 정서 속에서 ‘웰메이드’는 젊은 영화인들 사이에 약간 삐꼬는 뉘앙스를 주는 표현이 됐습니다. 기술적으로야 잘 만들었지만, 작가의 창의성이나 문제의식 없이 기존 장르의 관습에 따라 스튜디오와 타협한 작품이라는 뜻 정도로요.
이처럼 영화에서의 ‘웰메이드’는 딱 정해진 뜻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시대 혹은 시대정신에 따라다른 의미로 쓰였죠. 할리우드 영화인들 사이에서도 보는 시각에 따라 ‘전교수석’과 ‘범생이’처럼 뉘앙스가 달라졌지만 한국에서는 아예 의미 자체가 ‘탤런트 기질이 있는 전교수석’(상업성+작품성) 정도로 바뀌었으니까요.
일단 온라인게임에서 ‘웰메이드’ 개념은 영화에서 한국형 웰메이드를 따라가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 한국에서는 장르적 특성만 따라 만든 게임을 ‘웰메이드’라고 하면 동의할 게이머와 개발자는 없을 것 같으니까요. 그런데 온라인게임, 특히 MMORPG에서 ‘상업성’과 ‘작품성’을 논할 때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이 글은 ‘로한의 흥행은 가문의 위기?’라는 칼럼에 붙은 댓글을 읽으면서 시작했습니다. 댓글 중에서 ‘웰메이드’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시기에 제가 아는 영화 쪽 이야기로부터 풀어보려고 한 거였죠. 그런데 막상 게임, 특히 MMORPG에서 ‘웰메이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저도 제대로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아직 이 부분에 대한 납득할만한 구체적인 논의를 거의 못 봤기 때문이죠.(제가 게으른 탓이 크겠죠. ^^;;) 이 부분은 지금부터라도 TIG 같은 일반 게이머가 쉽게 오갈 수 있는 곳에서 활발하게 이야기됐으면 합니다.
초창기 할리우드에서 ‘웰메이드’의 개념을 만들어졌듯, 온라인게임 강국 한국에서 MMORPG에서의 ‘웰메이드’ 개념을 주도적으로 다듬어 가는 게 좋겠죠. 또 가능하면 게임 밖에 계신 높은 분들보다는 MMORPG의 성격에 맞게 개발자와 게이머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영화로부터 시작한 저의 이 칼럼은 그런 논의를 위해 밟고 넘어갈 뻔한 쓰레기 중 하나쯤으로 여겨주시면 좋겠습니다. 다시 영화 이야기에서 단초를 구해보죠.
흔히 영화와 게임의 유사성이 많이 이야기됩니다. 위에서도 할리우드 시스템과 EA의 개발 과정의 유사점에 대해 이야기했으니, 저도 비슷함을 비교하며 이야기한 셈이죠. 다만 제 생각에는 영화의 웰메이드 개념을 게임, 특히 MMORPG에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산업적으로 보면 영화제작 환경이 어느 정도 게임과 유사한 면이 있지만 미학적 접근 혹은 향유의 측면에서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죠.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붕괴 이후, ‘웰메이드’를 대신한 후계자 중 으뜸은 ‘블록버스터’입니다. TV의 등장으로 궁지에 몰렸던 영화사들은 이런저런 시도를 했죠. 대표적인 것이 브라운관이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화면을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시네마스코프나 비스타비전 같은 가로폭이 넓은 스크린이 등장한 게 이 때였구요. 하지만 관객들의 반응은 별로였습니다. 관객들이 호응했던 것은 스크린의 폭을 넓히는 것보다, 스크린 속의 공간을 확장하는 것이었죠.
70년대 <죠스>(스티븐 스필버그)를 시작으로 <스타워즈>(조지 루카스)나 <대부>(프란시크 코폴라) 같은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만들진 배경이죠.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세 감독 모두 60년대 캘리포니아주에 처음 개설된 영화학과 출신이라는 점입니다. 시대적 분위기와 학문적 배경이 만나 블록버스터를 만든 셈이죠. 한국에서 ‘웰메이드’가 영화 투자붐과 함께 영화 아카데미 출신 감독들의 활약이 컸던 점과 재미있는 연결고리가 생기죠.
게임계에서 PC통신과 인터넷의 발달은, 영화계에서 TV의 출현과 치환시켜 생각하는 것 또한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할리우드에서 블록버스터가 이에 대응했듯 국내 게임계에선 MMORPG가 그랬죠. 블록버스터를 영화학과 출신이 만들었듯, MMORPG의 초창기 개발자들은 대개 네트워크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운 프로그래머들이었구요. 블록버스터가 ‘규모’로 TV와 대응했듯 MMORPG 또한 패키지게임에 비할 바 없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죠. 그런데 이 ‘규모’에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MMORPG는 큰 구도를 잡은 화면 속을 섬세한 미장센으로만 채우지 않고, 오히려 많이 비워 놓았으니까요. 그리고 그 빈 곳들은 ‘관계’들로 채워졌죠.
영화는 소설이나 연극과 마찬가지로 완결된 구조를 갖습니다. 비록 얽키고 꼬였더라도 페이지에 따라 쭈욱 진행되구요. 게임 중에서도 <투 하트> 같은 사운드 노벨이나 일본식 RPG는 이런 이야기 구조와 유사하죠. 자유도가 제한되고 시나리오가 강조되는 이런 형식에는 기존 영화에서 쓰였던 좋은 화면, 사운드, 스토리, 연출 등이 결합된 ‘웰메이드’의 기준을 얼추 차용해서 쓸 수 있을 듯합니다.
MORPG에서도 기존 영화 문법의 연장선상에서 ‘웰메이드’를 언급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WOW>의 예를 들어보죠. 이 게임의 큰 매력은 RPG의 핵심인 퀘스트를 정말 제대로 만들어놨다는 겁니다. 일부에서는 ‘퀘스트 노가다’라고 폄하하지만, 난이도에 따라 대충 여기 가라, 저기 가라 해놓은 게 아니었죠. 유저가 게임 캐릭터의 정서를 받아들이게 한 뒤 자연스럽게 <워크래프트>의 세계관이 녹아든 유려한 퀘스트를 쫓아가게 만들었으니까요. 인터페이스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서사적 구조에 따른 큰 틀의 흐름은 분명 소설과 영화로부터 이어받은 자산임에 틀림 없습니다.
이런 서사적인 구도 하에서 그래픽, 사운드, 퀘스트, 인터페이스의 숙련도와 혁신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WOW>는 물론 ‘웰메이드’한 MMORPG겠죠. (여기서는 일단 빌링이나 운영 등과 관련된 이슈는 배제하겠습니다. MMORPG에서 이 부분이 오히려 더 중요한 요소일 수도 있지만, ‘웰오퍼레이티드’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웰메이드’를 이야기하는 게 영화와 다른, 게임의 ‘웰메이드’를 설명하는데 더 효과적인 것 같아서요.)
하지만 <WOW>에 대해, 제가 좋아하는 부산지법의 윤웅기 판사는 “<WOW>는 ‘World of Warcraft’라기보다는 ‘Work of Warcraft’에 가깝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즉 <WOW>가 게이머들이 함께 살아가는 ‘세계’보다는 <워크래프트>에 기반한 ‘작품’에 가깝다는 것이죠. 유저들의 자유로운 거래 활동 대신 아이템의 귀속성을 강조한 면 등을 감안하면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아주 거대한 패키지게임이라고 볼 수 있다는 거죠. (블리자드가 이런 방식을 택한 것은 아이템 현금 거래를 막기 위한 조치일 수도 있겠지만 귀속성이 해체될 경우 발생할 밸런스 조절에 대한 노하우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죠.)
그런 면에서 <로한>의 [살생부 시스템]이나 [결속 시스템], [레벨 시스템] 등에 대한 좀더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유저에 따라 다르겠지만 MMORPG 중 ‘RPG’만큼이나 ‘MMO’의 요소가 게임을 평가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이 기준이 결국 MMORPG의 ‘웰메이드’를 이야기할 때 ‘꼭’ 필요한 것일테구요.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MMORPG에서는 유저의 생산적 활동을 유도하는 '시스템형 컨텐츠'가 소모적 성격의 '소비형 컨텐츠'보다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건 소설이나 영화는 물론 다른 장르의 게임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MMORPG 고유의 요소니까요. 그렇다고 소비형 컨텐츠가 엉성한 MMORPG를 옹호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건 ‘게임의 기본'도 못 갖춘 거니까요. 아직 많은 MMORPG가 기본도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구요.
제 얕은 생각은 여기까집니다. 여러분은 어떤 MMORPG에 ‘웰메이드’라는 수식어를 붙이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