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신>과 <우마무스메>가 세계적 인기입니다. 우리는 이미 서브컬처 시대에 살고 있어요. 덕후와 덕질을 주제로 보다 많은 이야기가 소통되고, 덕후가 능력자로 인정받는 사회가 되길 희망합니다. 지금 저희는 '덕후의 역사'를 쫓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스카알렛 오하라&디스이즈게임
백성을 다스리는데 임금과 조정 중신들이 가장 마음에 두어야 할 한글자가 무엇이오?
(중략)
백성을 다스리는데 가장 마음에 두어야 할 한글자는 바로 청렴할 염(廉)자요. 재물에 청렴하고 여색에 청렴하고 직위에 청렴하면 어찌 백성이 따르지 않을 수가 있오. 청렴으로 위엄을 세우고 강직하면 하지 못할 일이 없고 되지 않을 일이 없을 것이오.
드라마 이산에서 정조 이산이 중신들과 경연 중에 내놓은 대사예요. 하지만 정조대왕의 이 대화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을 수 없어요. 사실 이 대사 내용은 실제 역사상에 존재한 내용이기는 하지만, 정조대왕이 한 말이 아니거든요. 정조 시대의 대표적인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이 전라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시절 바로 옆 동네 영암군의 군수로 지내던 이종영에게 적어준 글의 내용이예요.
이산, 즉 정조대왕이 승하한 것이 1800년이고, 이 글이 쓰여진 것은 1806년, 23대 국왕인 순조 때니까 화자와 시기가 모두 다르죠. 하지만, 이 대사를 굳이 '정조대왕'의 대사로 설정한 것은 작가의 의도가 있을 거예요.
위 대사는 2008년 4월 8일에 방영된 이산 59회차에 등장했어요. 대한민국 17대 대통령인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지 약 40일 후예요. 나라의 새로운 리더가 등장했고, 당시 방영되던 이산은 조선시대 최고 리더 중 세손가락 안에 들던 정조대왕의 이야기죠. 작가는 몰락한 실학자가 지방관리에게 전달한 글을 조선시대 최고 리더 중 한사람인 정조대왕의 입을 빌려 '권위를 담아' 전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위 대사는 작가가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예요. 이 메시지는 화자로 설정된 정조대왕의 권위를 입고 강하게 상대를 설득하게 되죠. 작가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에세이나 기사에서 이 이야기를 전달할 때보다 훨씬 듣는 이들에게 설득력이 강했을 거예요.
같은 말이라도 역사적 위인같이 "권위를 가진 자"의 한마디는 매우 큰 힘을 가져요. 옆집 아저씨가 하면 그러거나 말거나 할 한마디도 뉴턴이나 처칠, 제퍼슨이 한 말이라면 동의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 권위있는 자의 말에 "그렇지 않아"라고 말하는 데는 굉장한 용기가 필요해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무언가 말하고 싶을 때 메세지에 권위를 얹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요. 드라마 이산에서는 역사적으로 이미 권위를 가지고 있던 정조대왕을 통해서 말하면 되기 때문에 별다른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냥 대사로 쓰고 극중 정조대왕이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죠.
신문기사에서도 화자에 많은 신경을 써요. 주로 전문가라든가 핵심관계자 이런 단어를 선호해요. 정보의 출처를 정확히 말하지 않더라도 이 사람이 전문가니까 너희는 믿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뉘앙스예요. 가십잡지이나 기사에 흔히 볼 수 있는 출처도 있죠.
"옥스포드 대학 연구팀에 따르면..."
아무래도 세계적인 대학의 연구팀이 하는 말이니 믿어야 할 것 같잖아요? 가짜 명언이 잘 먹히는 이유도 같은 이유일 거예요. 대충 써 놓고 프랭클린이 말했다고 하면, 프랭클린이 한 말을 다 알리 없는 사람이 쉽게 혹하게 할 수 있죠.
그러나 창작물에서는 아직 캐릭터가 잡히지 않은 화자가 권위를 가지기 힘들기 때문에, 노력이 필요해요.
그 역할을 해주는 것이 서사죠.
라이언킹에서 무파사가 이야기해요.
"모든 생명은 섬세한 균형 속에 공존하고 있어서 지도자는 그 균형을 이해하고 모든 생명들을 존중해야 한다."
왠지 생태학자나 환경론자가 말해주는 듯한 이 대사 역시 작가가 정치가와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을 거예요. 작품 속에서 무파사가 위대한 왕이라는 것을 서사를 통해 구축해 내고 나니 이 메세지가 비로소 사람들에게 와 닿을 수 있는 것이죠. 같은 대사라도 스카나 에드의 대사였다면 그냥 헛소리였을 테고 말이죠.
그런데, 이런 권위가 잘 안 먹히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은 화자보다 메시지 자체에 집중해요. 화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건 간에 메시지가 자신의 판단에 옳으면 옳은 이야기고, 아니면 아닌거죠. 우린 이미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죠.
덕후들이예요.
여러 사람들이 모여 대화를 해요. 특정 사안에 대해 다들 권위자로 인정하는 A의 주장에 동감해요. 이는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한사람, B가 반론을 제기해요.
"아니, A의 말이 맞다고 확신할 수 있어?"
다른 사람들은 불편해하며 반문해요.
"B, 당신이 저 A보다 이 분야에 대해 더 잘 알아?"
A의 주장이 논리적으로 옳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반론자 B는 A에 비해 권위가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거죠. 하지만 덕후인 B는 오히려 이들이 이해가 가지 않아요. A의 주장에 의심할 구석이 많이 발견되고 있거든요.
이렇게 판단의 중심가치가 다르다보니 다른 사람들과 덕후간의 소통에 문제가 생겨요. 일을 함께 할 때도 유사한 문제가 쉽게 생겨요.
"그건 옛날에 내가 다 해봐서 아는데 말야 이건..."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덕후에게는 오히려 비웃음을 살 수도 있어요. 모든 일은 상황과 시기,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에 따라 해야할 일도, 판단도 달라질 텐데 그저 한번 해봤다는 이유로 그 일에 대해 안다고 하는 건 일을 대하는 태도 자체부터 신뢰를 받기 힘들게 되거든요.
덕후들이 모든 권위를 무시하지는 않아요. 덕후들도 인정하는 권위가 있어요. 그 사람의 능력을 자신이 직접 확인한 경우에는 그 사람의 권위를 확실히 인정해 줘요. 특히 미술 분야, 기술 분야는 이런 경향이 강해요. 자신이 그 분야에 어느정도 지식이 있다면 그 사람의 능력을 비교적 빠르게 측정할 수 있는 분야라는 공통점이 있어요.
그냥 누군가 "저 사람이 그림을 그렇게 잘 그린대" 만으로는 부족하죠.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인정하는 권위에 대해서도, 덕후들은 직접 자신의 눈과 두뇌로 검증하고 싶어 해요. 그리고, 검증을 마친 후에는 수긍하죠.
"그 사람은 진짜죠.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렇게 인정하게 된 사람이 인정하는 또다른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긍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게 되지요. 권위가 전파되는 것이예요. 덕후는 비록 이 전파의 단계가 좀 더 짧게 유효한 모습이지만, 아무래도 다른 집단보다 덕후들의 집단 크기 자체가 작아 여전히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죠.
1990년대 후반, 모뎀 환경에서도 MMORPG(당시엔 그래픽 머드라 불렸던)의 쾌적한 게임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데이터가 손실될 확률을 낮추어야 했고 그러니 패킷 크기를 최대한 작게 만들어야 했죠. 송재경이라는 프로그래머는 1~2바이트짜리 패킷 안에 서버-클라이언트 간 정보를 비트단위로 쪼개 우겨 넣어 온라인게임 프로토콜을 만들었어요.
이 프로토콜은 당시 다른 MMORPG 개발자들에게도 일종의 표준처럼 여겨지며 응용되었어요. 그 외에도 여러 기술적 이슈를 해결한 송재경 현 XL게임즈 대표는 MMORPG 기술자들 사이에서 권위자라 인정받아요.
릴 온라인부터 게임제작에 필요한 엔진을 만들기 시작하여 이후 여러 프로젝트를 거치며 끈임없이 개량하여 이제는 최상급의 비주얼과 액션감을 보여줄 수 있게 된 엔진을 보유한 김대일 현 펄어비스 의장 역시 게임엔진 종사자들에게서 권위자라 인정받아요.
창세기전으로부터 명성을 얻으며 캐릭터의 입체감, 질감 표현에서 탁월한 능력으로 대표적인 게임 일러스트레이터가 된 김형태 현 시프트업 대표도 있어요. 그는 2D 그래픽 기술 관련된 연구에도 관심을 넓혀 <데스티니 차일드>에는 라이브2D 기술을, <니케>에는 스파인 기술을 적용하여 2D 캐릭터의 동작 표현을 최적화해 가며 2D 캐릭터 분야에서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죠.
스티브 워즈니악은 해킹과 컴퓨팅 기술분야에서, <DOOM>의 개발자 존 카맥은 3D게임그래픽 기술 분야에서 전 세계적인 추앙을 받는 최고의 권위자로 인정받아요. 이들은 모두 해당 분야 산업의 초기부터 활약하고 그들과 함께 한 많은 동료들로부터 인정받았어요. 그리고 그 동료들이 여러 다른 회사나 커뮤니티에서 인정받으면서 긍정적인 선입견을 전파했을 거예요. 권위를 얻게 되는 것이예요.
좀 더 근본적으로는, 덕후의 성향은 권위의 본질인 권력을 파악하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어요. 덕후와 덕후가 아닌 사람들에게 권력은 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