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게임들은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아무래도 제한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소 과장되고 현실의 법칙을 무시한 게임들이 많았고, 그것은 게임으로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하드웨어의 성능이 발전하고 표현의 범위가 풍부해지면서 개발자들의 리얼리티에 대한 욕심이 늘어났다. 기술적인 성장이 빠르게 진행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개발자들의 도전 중 하나가 리얼리티의 표현일 것이다. (※ 여기서는 비주얼적인 표현이 아니라 놀이적인 표현을 다루기로 한다)
◆ 리얼리티를 살린 도전적인 게임들
일부 개발자들은 그 동안의 게임들에서 과장해서 표현하던 법칙들을 부정하면서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은데…”라는 발상법을 바탕으로 리얼리티를 살린 게임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런 발상은 도전적인 게임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사무라이 스피릿츠>나 <소울 엣지> 등의 게임을 보면 날카로운 검으로 아무리 맞아도 체력 게이지가 0이 되지 않는 이상은 죽지 않는다. 현실에서는 한번만 제대로 찔려도 목숨을 잃을 확률이 높은데 게임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런 과장된 게임을 부정하면서 리얼리티를 추구하고자 하는 발상이 생겨난다면 <부시도 블레이드>(스퀘어)같은 게임이 탄생할 수 있다. 부시도 블레이드는 앞서 얘기한 “원래는 검에 급소를 찔리면 한번에 죽는다”라는 리얼리티를 기본으로 만들어낸 게임이다.
리얼리티를 기본으로 게임플레이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많이 때리는 것 보다는 한 번이라도 급소를 정확하게 공격하는 것이 중요한 심오한 게임 플레이(실제로 빠져들면 굉장히 심오하고 재밌다)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역시 대중에게 받아들여지기엔 다소 힘든 놀이였다. 게이머들은 비현실적이어도 체력 게이지가 존재하길 원했다.
<그란투리스모>도 그 동안에 레이싱 게임에서 과장되게 묘사됐던 드리프트와 물리법칙을 부정하고, 대신 사실적인 드라이빙 경험을 제공해주려는 발상에서 시작된 프로젝트다.
개발사인 폴리포니 디지털은 각고의 노력 끝에 실존하는 수 많은 자동차들의 라이선스를 획득했고, 게임 안에서 사실적인 물리법칙을 적용했다. 그 결과 기존 과정된 레이싱 게임과는 확실히 차별화된 레이싱 게임의 롤 모델이 탄생했다. <그란투리스모>의 경우 리얼리티 구현이 플레이와 잘 어울리는 조합을 가진 경우였기 때문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사실적인 감각의 레이싱 게임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던 <그란투리스모>.
◆ 1인칭 축구와 1인칭 야구, 결과는?
리얼리티가 아이디어 단계라면 게임 플레이는 검증 단계가 될 것이다. 리얼리티가 해당 게임에서 필요한지, 해당게임의 성격과 어울리는지, 쾌적하고 즐거운 놀이로 풀어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 대답을 줄 수 있는 것은 결국 플레이다. 똑같은 발상이라도 게임의 특징에 따라서 리얼리티의 활용은 상당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 후반 남코에서 “축구 게임을 1인칭 관점에서 즐길 수 있다면…”이라는 발상으로 탄생한 게임이 있다. <리베로 그란데>라는 게임인데 기존의 축구게임이 11명을 모두 조작하는 형태를 가졌다면, 이 게임은 11명 중 1명만을 게이머가 조작 할 수 있으며 나머지 10명은 인공지능에 의해서 플레이 된다.
발상은 독특했지만 인공지능의 현실적인 한계와 자신이 조작을 할 수 있는 시간이 합리적이지 못해서 게임으로서의 쾌적함은 다소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 게임은 포지션까지 결정할 수 있는 기능을 추가한 2편도 등장했지만,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사라지게 된다. 발상은 신선했지만 플레이가 리얼리티의 구현과 좋은 호흡을 맞춰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1인칭 시점으로 플레이가 가능한 <리베로 그란데>.
재미 있는 것은 수 년이 지나고 나서 리베로 그란데의 컨셉과 비슷한 게임방식이 등장했는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최고의 야구게임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 <MLB THE SHOW>의 게임모드 중 하나인 ‘ROAD TO THE SHOW’인데, 이 모드 역시 포지션 하나를 결정하고 해당 선수로만 플레이 하는 1인칭 시점의 플레이를 제공한다.
만약 투수를 선택하게 되면 투수 플레이만 즐기게 되며, 자신이 선발을 할지 불펜을 할지에 대한 부분은 코칭 스탭에 의해서 결정된다. 외야수를 할 경우에는 자기 타석과 수비에서 자신의 포지션만 제대로 수행하면 된다.
똑같이 1인칭 시점을 표방했는데 왜 <리베로 그란데>는 실패하고 <MLB THE SHOW>는 성공했을까?
◆ 리얼리티는 게임의 룰과 관계가 있다
‘ROAD TO THE SHOW’라는 게임 방식이 하나의 모드로서 제공되었다는 점도 있겠지만 야구의 규칙과 축구의 규칙이 갖는 차이에서 나온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야구는 룰의 특성상 자신의 포지션에 대한 플레이만으로도 게임을 쾌적하게 즐길 수 있다.
특히 투수의 경우 상대타자를 상대하기만 하면 굳이 우리팀 타자들이 치는 것을 볼 필요가 없다. 한 이닝이 지나가서 우리 편 점수가 2점이 올라가 있으면 '지난 이닝에 우리 팀 타자들이 2점을 득점했구나'하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즉, 야구는 1인칭 시점에서 플레이하는 게이머에게 배당되는 시간이 길게 가져갈 수 있고, 한 게임내에서도 내가 관여하지 않는 부분은 건너뛰어도 문제가 없다.
하지만 축구게임에서 건너뛰기가 존재한다면 게임의 흐름도 읽을 수 없고, 게임 전반에 걸친 정합성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패널티킥만 차고, 프리킥, 코너킥을 차는 것만으로 게임의 재미를 찾기엔 어려움이 존재한다. 이렇듯 게임 룰이 갖는 특징이 리얼리티가 게임플레이와 융화될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기도 한다.
야구는 기본적으로 개인 VS 개인 대결의 연속이기 때문에
1인칭 모드를 소화해내기 좋은 게임 플레이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안타를 치고 주자로 나가 있을 때는 주루 플레이에만 집중하면 된다.
◆ 게임 플레이와 리얼리티의 절묘한 조화
최근 발매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GTA 4>의 경우 게임 플레이와 리얼리티의 역학관계에서 가장 적절한 기준선을 찾아낸 경우라고 생각된다. <GTA 4>는 적당히 리얼리티를 추구하면서 리얼리티로 인해서 게임 플레이가 불편해지는 상황은 만들지 않는다.
톨게이트 비용을 내지 않는다거나, 경찰의 시야 안에서 사람을 죽인다거나, 경찰차를 들이받는 등의 행위를 하면 리얼리티가 발동해서 경찰이 어김없이 플레이어를 체포하기 위해 달려든다. 하지만 신호위반으로 경찰차가 달라붙는 경우는 없다. 현실세계에서는 분명 위법행위지만 <GTA 4>의 세계에서는 암묵적으로 이 위법행위는 인정해준다.
게임 플레이의 쾌적함을 위해서다. 현실에서처럼 일일이 다 신호를 지킬 필요는 없다고 얘기해주는 것이다. 또한 경찰의 시야 안에서 다른 차는 들이받아도 상관 없지만 경찰차는 스치기만 해도 위법행위가 된다. 이렇게 현실과는 조금 다른 기준의 위법 룰을 적용하고 있다. 하지만 게이머들이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의 적절한 선을 맞춰가고 있다.
영리한 게임에서는 쾌적한 게임 플레이와 리얼리티를 동시에 살려내기 위해서 설정의 힘을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
앞서 얘기한 <GTA 4>의 경우에도 쾌적한 플레이를 위해서 ‘택시’라는 요소를 두었는데, 택시를 처음 타면 게이머는 리얼리티를 감상하기 위해 목적지로 가는 도중 주변 풍경 들을 이리저리 관찰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도 한두 번이다.
택시를 타면 목적지까지 가는 중간과정은 건너뛸(skip)할 수 있는 기능을 만들어 두었고, 이런 식으로 리얼리티를 즐기는 것에 대한 선택권을 유저에게 넘겨주고 있다. 그렇다보니 중간에 건너뛰는 기능을 넣어서 “왜 리얼하지 않게 택시를 타는 중간과정을 삭제하는거야?"라고 얘기할 게이머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저 이 게임 설정에 잘 맞는 택시를 타고(텔레포트를 한 것도 아니고…) 목적지에 도착했을 뿐이니 리얼리티 성립을 전혀 방해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설정의 힘으로 스킵된 중간을 상상할 수 있으면 딱히 리얼리티는 방해받을 우려가 없다.
<GTA 4>에서의 택시는 게임의 템포를 매끄럽게 해주는 자연스러운 소재다.
<헤일로> 개발진의 경우에는 주인공 마스터치프가 적의 공격을 계속해서 맞아도 데미지가 누적되지 않고 조금만 쉬면 다시 100% 상태로 회복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설정상 일정시간을 공격받지 않으면 스스로 회복되는 방어막이라는 첨단장치를 만들어 치프에게 부여했다.
그 덕분에 게이머들은 “왜 체력이 계속 회복되는거야?”라는 리얼리티 부재에 대한 의문을 갖지 않아도 됐다. 리얼리티는 현실상에서 실존하는 것으로만 만들어지지 않고 게임 플레이의 목적에 따라서 설정의 가공으로도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헤일로>에서는 점검관이 게임 초반 부분에서 방어막에 대한 시나리오 상의
설명을 해주면서 자연스럽게 체력회복에 대한 부분을 받아들이게 해준다.
최근에는 리얼리티에 너무 집중해서 게임 플레이가 흐려져 버리는 게임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지나친 리얼리티가 어드벤처 게임에서 게이머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고, 스포츠 게임에서 게임의 흐름을 뚝뚝 끊어버리고(리얼함을 강조해서 심판이 반칙선언을 줄기차게 해댄다면 게임템포가 나빠질 것이다),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너무 복잡해서 입문조차 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면?
리얼리티의 추구가 엉뚱한 쪽으로 주객이 전도되어 발생한 현상이 아닐까. 특수한 목적으로 채산성을 무시하고 마니아들을 위해서 만드는 게임이라면 모르겠지만, 시장에서 대중들에게 어필하고 수익을 내기 위해서 개발하는 게임이라면 이 점을 더욱 간과해서는 안될 것으로 보인다.
어차피 게임은 현실이 될 수 없다. 현실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그에 알맞은 즐거운 놀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목적이지, 현실적으로 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닌 이상,
리얼리티는 게임 플레이 안에서 규제 당해야 하고, 게임 플레이는 리얼리티 안에서 적당히 반응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
좋은 게임들에서는 리얼리티의 구현보다 좋은 게임플레이의 구현이 늘 우선시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고 앞으로는 리얼리티의 구현이 좀 더 ‘즐거운 놀이’를 만들 수 있는 방향으로 발전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