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1월에 열린 한국게임컨퍼런스(KGC)에서는 게임을 소재로 한 미술 전시회인 ‘픽셀 온 캔버스(Pixel on Canvas)’가 열렸습니다. ‘미술로 보는 게임의 역사’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 이 전시회는 젊은 회화작가들이 모여 게임을 소재로 한 예술작품 30종을 선보였습니다.
디스이즈게임은 ‘게임과 예술의 만남’이라는 새로운 매체간의 접목에 의의를 두고 이번 전시 작품들을 연재물로 제작해 하나씩 소개하고자 합니다. 작품 설명은 ‘픽셀 온 캔버스’의 행사 기획을 맡은 게임평론가 이상우 씨(중앙대 문화예술경영학과 박사과정)가 맡았습니다. /디스이즈게임 편집국
“C.P-Slime”, Acrylic on canvas, 72.7×60.6c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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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임은 일본의 국민 RPG 게임이라고 불리는 <드래곤 퀘스트>에서 맨 처음 등장하는 몬스터다.
동그란 물방울처럼 생긴 몸에 두 눈과 입이 붙어 있는데, 딱 봐도 그다지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이 슬라임은 공격력이나 방어력이 형편없어 몇 번의 공격을 받으면 곧바로 화면에서 이슬처럼 사라져 버린다.
게임 초반 플레이어가 전투 방법을 익히는 연습상대로 딱이다. 그래서 슬라임은 RPG 세계에서 소위 잡몹(잡스럽고 약한 몬스터)의 대명사로 오랫동안 군림했다.
하지만 게임 세계를 벗어나면 슬라임의 생명력은 그 어떤 몬스터보다 강력해진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의 단골몬스터로 등장하면서, 수많은 관련 상품을 만들어내는 슬라임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몬스터인 것이다.
김용한 작가는 <드래곤 퀘스트>의 슬라임을 본인 특유의 회화적 기법을 사용해서 표현하였다. 화면을 가득 채운 소용돌이 입자는 작가의 다른 회화 작품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이 소용돌이는 전체 형태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다. 개발자가 캐릭터를 그릴 때 도트를 사용한다면 작가는 붓으로 그린 소용돌이를 사용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 나선형 이미지는 그 자체로 동적인 느낌을 전달한다. 화면을 바라볼 때 일렁이는 느낌은 이런 동적 이미지가 모여서 만들어내는 일종의 착시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 점은 작품의 바닥에 깔린 ‘움직임’이다. 고정된 이미지를 제시하는 회화 작품이지만 이 작품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형상과 이미지의 변화이며, 그 변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드래곤 퀘스트> 게임에는 ‘킹 슬라임’이라는 몬스터가 있다. 여러 마리의 슬라임이 하나로 뭉쳐져 만들어진 거대한 슬라임이다. 킹 슬라임, 하구레 슬라임 같은 존재를 통해서 짐작컨대 본디 슬라임이란 자신의 형체가 하나로 규정되어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언제든지 흩어질 수 있고, 필요에 따라 다시 뭉칠 수 있다. 이 작품 속에 표현된 이미지는 극히 추상적이다. 캔버스 가운데를 기준으로 모든 이미지가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역동적인 느낌을 준다.
하지만 여기에 방향성을 부여하는 것은 선입견이 아닐까? 어쩌면 이 이미지는 중앙을 향해 안쪽으로 빨려들어가는 모습일 수도 있다. 화가는 한 순간을 잡아서 화면에 제시할 뿐 여기에는 어떤 방향성도 들어있지 않다.
슬라임의 형상은 실루엣으로 겨우 형태를 알아볼 정도로만 표현되어 있다. 일종의 숨은 그림이다. 마치 슬라임이 공격을 받아 자신의 형체를 잃어버리는 장면 같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물질들이 가운데로 모여들면서 새로운 슬라임을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그림을 생성으로 보아야 하는가? 소멸로 보아야 하는가? 그것은 그림을 구성하는 소용돌이 입자처럼 모호하다. 이 작은 나선 모양은 어느 방향으로 회전하느냐에 따라 구심력이 되기도 하고 원심력이 되기도 한다. 소용돌이가 어느 쪽으로 회전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슬라임처럼 질척하고 끈질기게 살아남는 우리의 삶도 그러하다.
드래곤 퀘스트 (Dragon Quest)
발매시기: 1986년
플랫폼: 패미콤
제작: 에닉스
RPG는 원래 PC 플랫폼의 전유물이었다. <드래곤 퀘스트>는 가정용 게임기에서도 누구나 쉽게 RPG를 즐길 수 있도록 기획되었으며, 소위 ‘일본식 RPG’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구축한 게임이다.
개발자들은 <울티마>와 같은 미국식 RPG를 일본 대중들의 정서에 맞도록 바꾸고자 했다. 우선 복잡한 캐릭터의 능력치를 대폭 압축하고, 용사가 세계를 구한다는 단순명료한 스토리라인을 만들었다. 또한 <드래곤볼>로 유명한 토리야마 아키라가 캐릭터 원화 디자인을 담당하는 등 캐주얼한 이미지를 활용해 RPG를 대중적 장르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 본 작품은 2011년 중앙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에서 주관한 ‘Pixel on Canvas - 미술로 보는 게임의 역사’에 전시되었던 순수 창작물입니다.
[작가] 김용한 Kim, Yong-han [email protected]
충남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졸업 및 동 대학원 졸업
# 개인전
2010 Combined space (갤러리 이데, 대전)
2009 Gazing at (미술공간 현, 서울)
2011 사랑을 품다展 (금천예술공장 3층 PS333, 서울)
2010 한ㆍ중현대회화교류展 《드로잉- 풍경을 가져오다 展》 (미술공간 현, 서울)
2009 한·중 현대회화교류展 (오원화랑/중국 ARTMIA 갤러리, 대전)
[필자] 이상우 [email protected]
게임평론가. 중앙대학교 산업교육원 게임학과 교수.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고, 동 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게임문화연구회에서 활동 중이며, 2011년 ‘Pixel on Canvas - 미술로 보는 게임의 역사’ 전시회를 총괄 기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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