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봄 엔씨소프트가 태어났다. 나는 엔씨의 생일이 3월 11일인 걸로 알았다. 전자공시에 그렇게 적혀있다. 3월 엔씨 측에 확인해 봤다. 4월 5일이라고 했다. 좌충오늘은 그래서 오늘 이 글을 올린다.
역사의 도도한 흐름 속이었다. 80년대 공부 잘하는 고등학생은 이과에 많이 갔다. 이과에서 제일 똑똑한 학생은 서울대 공대나 의대를 지원했다. 반도체를 공부하고 싶었던 김택진은 서울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1985년이었다.
80년 삼보는 한국 최초의 PC를 만들었다. 80년대 초반 서울대에는 Micro Computer Study Club이라는 소모임이 생겨났다. PC-DOS, 8086, 8088-ASSEMBLY어를 세미나 형식으로 공부했다. 금성에서 PC 실습장을 빌려 쓰고, 삼보로부터 PC를 빌려와 연구실에 설치해 실습을 했다.
1984년 겨울 이 소모임을 모태로 SCSC(Seoul national university Computer Study Club, 서울대 컴퓨터 연구회)라는 정식 동아리가 만들어졌다. 계산통계학과 대학원생과 4학년 학생들이 학부 2,3학년을 대상으로 조직했다. 이 동아리는 '쌕쌕'이라고 불렸다.
소프트웨어가 배우고 싶던 김택진은 학생회관 2층 쌕쌕을 찾아갔다. 교수보다 동아리 선배와 동기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컴퓨터에 미친 사람들이었다. 거기서 한 학번 선배 이찬진을 만났다. 이찬진은 대학생이 리포트를 편리하게 작성할 수 있는 워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싶었다. 김택진, 김형집, 우원식 등과 함께 '아래아 한글'을 만들었다. 김택진은 그래픽 쪽의 난관을 해결했다. 당시 DOS는 파일을 읽고 쓰는 수준만 지원했다. 한글 폰트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그래픽카드가 필요했다. 각기 다른 20종 가까운 그래픽카드에 한글이 '그려지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었다.
아래아 한글은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90년대 PC 유저 중 이 프로그램을 안 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찬진, 김형집, 우원식은 회사를 세웠다. 한국 소프트웨어 산업의 상징이 됐던 한글과 컴퓨터였다. 교수가 되고 싶던 김택진은 합류하지 않았다. 대학원으로 갔다. PC 초창기였다. 컴퓨터 초보자들은 키보드를 치는 게 어려웠다. 김택진은 한메소프트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나를 포함한 90년대 모든 PC 유저는 '한메타자교사'를 통해 한글타자를 익혔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베네치아>의 낱말을 받아쓰느라 손가락이 바빴다. 이 글을 적는 속도도 그렇게 길러졌다. 고맙다.
김택진은 대학원에서 상심스러운 일을 겪었다. 한국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현대전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미국 파견을 조건으로 병역특례를 하게 됐다. 1991년 한메소프트 지분을 나눠주고 현대전자 보스턴 R&D센터로 떠났다.
보스턴에 도착한 김택진은 머리카락도 안 깎고 폐인처럼 살았다. 전혀 새로운 것을 봤다. 인터넷이었다. 충격이었다. PC보다 더 강렬했다. 김택진은 인터넷의 기본이 되는 통신규약인 TCP/IP 공부에 몰두했다. 1년 6개월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온통 TCP/IP 생각 뿐이었다. 꼬박 1년간 TCP/IP 연구에 매달렸다. 92년 TCP/IP 기반의 그룹웨어, 93년 세계 최초의 인터넷 기반 PC통신 아미넷(신비로로 바뀜)을 개발했다. 당시 최첨단이었던 PC통신 업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대기업의 새파란 젊은 팀장은 단숨에 주목받는 개발자가 됐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리저널 디렉터(regional director)로 선정됐다. MS의 모든 제품을 무료로 제공받고, 제품에 대한 피드백을 주면 됐다. 한국에는 두 명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95년 출범한 신비로 사업이 현대전자와 현대정보통신 사이에 끼여 입지가 애매해졌다. 대기업은 IT 비즈니스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김택진은 대기업 생리를 못 견뎠다. 20여 명의 직원과 함께 'Next Company' 설립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직원 17명을 데리고 나왔다. 97년 4월 5일 NC는 그렇게 생겨나게 됐다.
NC는 먹고 살기 위해 SK텔레콤의 넷츠고를 제작해줬다. 대우, 금호 등 대기업의 인터넷 환경을 구축했다. 인터넷이 확산됐다. NC는 그 위에 얹을 콘텐츠에 주목했다. 송재경이 합류했다. 온라인게임을 만들었다. IMF 경제위기가 터졌다. 투자가 말랐다. 김택진은 집을 팔았다. 1998년 9월 <리니지>가 나왔다. 엔씨는 한국 게임 역사의 거인이 됐다.
- 1997년 4월 5일, 엔씨소프트 창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