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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4월 9일 - 사법사상 암흑의 날

임상훈(시몬) 2014-04-09 10:05:12
1975년 4월 9일 새벽, 8명의 사람이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세계가 경악했다. '사법살인'의 대표적인 사례가 됐다. 스위스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 법학자 회의는 이 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판사들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1995년 4월 MBC가 판사 315명에게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우리나라 사법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으로 뽑혔다.

까마득한 옛날 일이다. 그래도, 기억해야 할 부끄러운 우리 역사다. 상식으로라도 알고 있었으면 좋겠다.

당시 시국은 심란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3선에 성공했다. 야당 후보였던 김대중은 '영구집권의 총통시대가 온다'고 경고했다. 그 예상이 맞았다. 1972년 10월 박정희 정권은 유신을 선포했다. 

유신헌법안의 핵심은 '삼권분립의 파괴'와 '대통령의 긴급조치권'이다.

대통령은 대법원장을 포함한 모든 법관을 임명했다. 사법부를 발 아래 놓은 것이다. 대통령은 국회의원 3분의 1을 지명하고, 국회해산권도 가졌다. 국회의 대통령 탄핵권과 국정감사권은 없어졌다. 선거구도 소선거구에서 중선거구제로 바뀌었다. 여야가 반반씩 가져가게 하는 그림이었다. 대통령이 3분의 1을 지명하니, 결과적으로 3분의 2 정도가 여당 몫이 됐다.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인 삼권분립은 무너졌다. 사법부와 입법부 모두 대통령 아래 놓였다.

대통령은 또한 '긴급조치를 취할 비상 권한'을 가졌다. 의회를 거치지 않고, 헌법적 효력을 가진 특별조치를 발동할 수 있게 됐다. 무소불위의 종신대통령이 될 수 있는 헌법적 장치를 마련했다.

반발이 심할 수 밖에 없었다. 정권은 이를 무지막지하게 눌렀다. 1973년 여름, 김대중은 일본에서 납치당했다. 미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수장될 운명이었다. 1975년 여름, 재야 지도자 장준하는 산에서 의문사했다.

대학생도 저항했다. 73년 김대중 납치사건 이후, 2학기 개학과 더불어 대학생들의 시위가 확대됐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은 종교인, 지식인, 야당인사들과 함께 시국선언문을 내고, 비밀 개헌서명 운동을 벌였다.

정권은 민청학련이 싫었다. 1974년 4월 잡아들였다. 용공사건으로 엮었다. 5월 민청학련이 배후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고 있다고 발표했다. 배후세력은 인민혁명당(인혁당)이었다. 10년 전 검사들이 증거가 없어서 기소할 수 없다며 옷을 벗었던 사건(1차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들이었다. 이들이 갑자기 국가전복 세력의 지도부가 돼버렸다.

 

7월 비상보통군법회의은 인혁당 주요 인물 8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9월 비상고등군법회의 역시 사형을 선고했다. 이듬해 4월 8일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하고 형량을 확정했다. 8명은 이 법정에 나오지도 않았다. 사형을 선고한 대법원장의 목소리는 모기 소리보다 작았다고 한다.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됐다. 판결이 나오기 전부터 사형집행관들은 대기 중이었고, 집에 가지 않았다. 사전에 기획된 대로 판결과 집행이 모두 이루어졌다. 


 

변호인도 접견하지 못했다. 가족의 면회도 금지됐다. 그들은 그렇게 외롭고 억울하게 죽음을 맞았다. 증거는 없었다. 고문에 의한 증언 밖에 없었다. 고문 흔적으로 뒤덮인 시신이 공개되면 안 됐다. 유신 정권은 시신조차 유족들에게 내주지 않고 화장터로 직행시켰다. 문정현 신부는 화장터로 달리는 차를 막고 실랑이를 벌이다, 자동차 사고를 당했다. 평생 다리를 절게 됐다. 항의하던 시노트 신부(아래)는 추방당했다.


 

중앙정보부장 출신 김형욱은 회고록 <혁명과 우상>에서 "박정희와 이후락의 지령을 받은 신직수 그리고 그의 심복 이용택이 10년 전에 문제 되었다가 증거가 없어서 석방한 사람들을 다시 정부 전복 음모 혐의로 잡아넣었다"고 썼다.


2002년 9월 12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 사건이 중앙정보부의 조작이라고 발표했다. 2007년 1월 23일, 서울 중앙지법에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 8인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재심에서 무죄 판결이 나오자 '자신에 대한 정치 공세'라고 했다. 지난 대선에서는 '두가지 판결이 존재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인혁당 사건 피고 8명에게 최종 사형을 선고한 민복기 대법관은 2000년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을 수상했다. 나는 부끄럽다.

- 1975년 4월 9일, 2차 인혁당 사건 사형 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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