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와인 역사에서 딱 한 장면을 고르자면, 단언컨대 나는 1976년 5월 24일 '파리의 판결'을 꼽겠다. 몰트 위스키나 막걸리라면 쪼끔 알지만, 와인은 문외한이다. 그럼에도 내 주장은 확고하다. 이 사건 이후 수천 년 이어온 세계 와인의 지형도가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늦었지만 5월 24일을 공유하고 싶었다.
위스키는 스코틀랜드, 막걸리는 한국인 것처럼, 와인은 프랑스다. 그렇게 모두 믿고 있었다. 근처 이탈리아나 스페인 등도 꽤 준수한 와인을 생산했다. 하지만, 신대륙 미국은 좀... 그랬다. 싸구려 취급을 받았다.
'파리의 판결'(Judgement of Paris)이 있기 전까지는 그랬다.
1976년 5월 24일 오후 3시, 파리 인터컨티넨털 호텔 레스토랑에서 와인 시음회가 있었다.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서울 코엑스인터컨티넨털 호텔에서 막걸리 시음회 한다고 누가 관심을 갖겠나?
이 행사를 통해 자신의 와인 아카데미와 와인샵을 홍보하려 했던 영국인 와인 수입업자(스티븐 스푸리어)는 고민했다. 색다른 시음회를 기획했다. 프랑스 고급 와인과 캘리포니아의 신규 와인을 비교하는 블라인드 테이스팅. 심사위원은 9명의 프랑스인 외인 전문가와 영국인과 미국인 1명씩으로 구성됐다.
화이트에서는 부르고뉴의 샤르도네(4종류)와 캘리포니아의 샤르도네(6종류)가 나왔다. 레드에서는 프랑스 보르도산 와인(4종류)과, 캘리포니아의 까비네 쇼비뇽(6종류)이 나섰다.
예상되는 결과는 뻔했다. 'best of best' 프랑스 와인의 우월성이 다시 확인될 것이었다. 그랬게 '자뻑'으로라도 행사가 알려지기를 주최자는 원했다. 미디어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한국 막걸리가 중국 막걸리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그게 뉴슨가? 기자들은 안 왔다.
딱 한 명 예외가 있었다. 회사가 호텔 근처였다. 여러 와인을 공짜로 맛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 싫었다. 유력 잡지 <타임>의 조지 M 태버 기자였다.
심사위원들은 먼저 화이트 와인부터 시음했다. 눈을 가리지는 않았다. 와인을 같은 모양의 병에 옮겨 담는 방식의 블라인드 테이스트을 했다. 각자 20점 만점을 기준으로 점수를 줬다. 시음은 끝나고 개인 스코어 카드를 모아 합산한 뒤 최종 순위를 매겼다.
이제 레드 와인 시음을 시작할 타이밍이었다. 레스토랑 대여 시간의 촉박을 느낀 주최자는 화이트 와인 채점결과를 먼저 발표했다. 그의 말이 끝난 뒤 심사위원들의 표정은 화이트 와인처럼 하얗게 질려 버렸다. 1등을 한 와인은 캘리포니아의 '샤또 몬텔레나'(아래 사진)였다. 2등 프랑스 와인과의 격차가 컸다.
대화는 사라졌다. 심사위원들은 긴장했다. 또다른 불상사를 막기 위해 레드 와인 테이스팅에 집중했다. 신중하게 시음하고, 채점했다. 이번엔 다르겠지, 하는 분위기였다. 결과는 또 뜻밖이었다. 캘리포니아 레드 와인이 1등을 해버렸다.
발표가 끝나고 심사위원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채점한 점수표를 다시 달라고까지 했다.
6월 7일 이 사건이 'Modern Living: Judgement of Paris'이라는 제목으로 <타임>에 실렸다. 와인 세계가 뒤집어졌다.
'파리의 심판'은 먼저 미국을 강타했다. 프랑스 와인만 고집하던 미국인들이 캘리포니아 와인을 찾기 시작했다. 와인샵에서 캘리포니아 와인은 품절됐다.
프랑스는 애써 부정했다. 프랑스 언론은 파리의 심판을 까기 시작했다. 심사위원들의 자질을 평가하는 비평이 실렸다. 와인 업계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논의까지 나왔다. 시음회를 주최한 스티븐 스퍼리어의 프랑스 내 평판은 완전히 추락했다. 아카데미와 와인샵의 홍보를 위해 한 행사가 독이 됐다. 1년 동안 프랑스 와인 테이스팅 투어 참여가 금지됐다.
프랑스의 완고한 저항에도 미국 와인에 대한 평가는 이 날 이후 완전히 달라져버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캘리포니아 와인과 프랑스 와인의 비교 테이스팅 문화가 정착됐다. 파리의 심판을 주최했던 스티븐 스퍼리어(아래 사진)는 프랑스와 미국, 그리고 세계 각국의 와인 테이스팅 행사나 모임에서 항상 초청을 받는 유명인이 됐다.
매년 샌프란스코에서 GDC가 열린다. 행사 전후 당일치기, 또는 1박 2일 나파벨리 와인 투어를 가는 게임 업계 관계자들이 많다. 몇 번 함께 가자는 제안을 받았는데, 한 번도 못 가봤다. 다음에는 꼭 가보고 싶다.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파리의 심판'의 주인공인 '샤또 몬텔레나' 와인너리에서 한 잔 꼭 마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