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6월 27일 (28일이란 이야기도 있다) 놀런 부슈널과 테드 다비니가 Atari를 설립했다.
1972년은 비디오게임 산업이 탄생한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Atari가 탄생하기 전에 놀런 부슈널은 1962년에 탄생하여 끊임없이 해커들에 의해 발전해온 <Spacewar!>를
즐겨왔고, 비디오게임의 산업이 될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Syzygy에서 <Spacewar!>의 카피캣인 <Computer Space>를 만들었다가
실패하였지만, 1972년은 결국 비디오게임 산업에 엄청난 영향을 주는 게임이 탄생했다.
<Spacewar!>의 카피캣인 <Computer Space>는 아쉽게도 박람회에서 그렇게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Syzygy는 비디오게임 사업을 계속 해야 할지 의문을 가졌고, <Computer Space>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비디오게임이란 사업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놀런 부슈널은
테드 다비니와 함께 Atari를 창업했다.
평소에 일본문화에 심취해있던 놀런 부슈널은 바둑의 아다리에서 회사 이름을 가져왔다. 그리고 엔지니어로 알 알콘을 고용한 놀런 부슈널은 연습 삼아 간단한 게임 개발을 그에게 맡겼다. 적당한 퍼블리셔에게 공급할 계획으로 만든 그 간단한 게임은 생각외로 재밌었고, 게임의 가능성을 눈치챈 놀런 부슈널은 그 게임을 퍼블리셔에 공급하는 대신 직접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1972년 8월 첫 번째 <Pong>이 술집에서 시험가동되었다. 술집에서 고장 났다는 연락을 받고 갔는데, 동전이 꽉 차서 정상동작을
하지 않았다는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Pong>이 등장하고 미국 전역에는 술집과 볼링장 등에 <Pong>이 한대씩은 놓여있었는데, 이 기기의 절반 이상은 Atari의 <Pong>이 아닌 복제기기였다. 놀런 부슈널은 복제기기 생산자들을 재칼이라 부르면서 싫어했지만, 법으로 그들을 찍어누르는 대신 그들보다 더 나은 게임을 만드는 선택을 했다.
그런 노력으로 Atari 는 탁구 게임뿐만 아니라 레이싱게임부터, 미로찾기 게임 등 성공은 못 했지만 이후 등장하는 장르를 대표하는 작품들의 밑바탕을 깔았고, <Break Out> 같은 명작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또한 Atari는 아케이드 게임의 부정적인 시각을 극복하기 위해 가정용 시장으로의 진입 또한
빠르게 시도했다.
1972년에 나온 <Pong>은 1975년 <Home Pong> 이란 이름으로 가정용으로 발매되었다. TV에 연결해서 <Pong>을 즐길 수 있는 <Home Pong>은 이후 닌텐도가 라이센스해 닌텐도가 화투 회사에서 비디오게임기를 제작하는 회사로 본격적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다.
1977년 아타리는 가정용 게임기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Home Pong>의 약빨이 떨어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시장 점유율을 다시 찾아오기 위해서는 경쟁 기기들보다 더 강력한 기기가 필요했다. 1977년에
나온 Atari 2600 VCS는 훌륭한 제품이었다. 기존
경쟁자들을 밀어붙이며 엄청난 시장 점유율을 차지했다. 나중에 나올 닌텐도의 패미컴에도 영향을 끼쳤다.
수많은 명작게임이 쏟아져나왔다. 하지만 Atari는 Atari 2600 VCS를 개발하기 위한 자금이 필요했고 그 자금을 워너브라더스에서 충당했다. Atari는 워너 커뮤니케이션의 것이 되었고 1978년 창업자인
놀런 부슈널은 워너 커뮤니케이션과의 의견 충돌로 Atari에서 쫓겨났다.
경영자 출신의 사장이 내려오면서 Atari의 조직문화는 크게 바뀌었다. 워너에서 내려온 경영자들은 개발자들의 문화를 이해하지를 못했다. 개발자들은
대우에 불만을 품고 새로운 회사를 차려 Atari 용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Activision Bllizard 가 되는 Activision 이
첫 테이프를 끊었다. 게다가 게임 개발이란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MBA출신의 경영자들만 가득 찬 게임회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을 저질렀다.
Atari의 성능으로는 구현하기 힘든 퀄리티의 <Pac-man> 을 비싼 돈으로 라이센스 해 와서는 Atari 2600 VCS의 보급대수인 1,000만대보다도 200만 개를 더한 1,200만개의 팩을 생산했다. 게다가 그렇게 나온 <Pac-man>은 <Pac-man>의 원본보다도 심하게 품질이 떨어졌다. 엉망이었다.
그다음은 <E.T>였다. <E.T>는 영화 상영시기를
맞추기 위해 5개월 만에 게임을 만들어야 했다. 개발자들은
아무도 맡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하워드 스캇 워쇼가 그것을 맡아 5주 만에 게임을 만들어냈다. 5주 만에 만든 게임치고는 괜찮은 게임이었지만 <E.T>의 인기에
비하면 좋은 게임은 아니었다. Atari는 그런 게임을 영화만 믿고
500만 장을 찍었다. <Pac-man>은 그나마 좀 팔렸지만 E.T는 팔리지도 않았다.
Atari는 예상한 만큼의 매출을 올리지 못했다. Atari 2600에 질려가는 사람들을
위한 다음 세대 게임기였던 Atari 5200은 차세대 게임기라고 하기엔 좀 부족했다. 뛰어들었던 홈 컴퓨터 사업에서도 그리 재미를 보지 못했다. 워너는 Atari 주식의 폭락으로 큰 손해를 입었다.
결국 이듬해인 1984년 워너 커뮤니케이션은 Atari를 매각했고 Atari는 세 개로 쪼개져 흩어졌다. 아케이드 산업은 Namco가 인수했다. 혁신에 혁신을 거듭하며 비디오게임 시장을 만들어낸 기업은 결국 창업자가 쫓겨나고 개발과 멀어지는 회사 운영으로 초라하게 끝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