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1라디오 <열린토론>은 같은 날 열린 MBC <100분 토론>만큼의 화제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라디오 방송이었던 데다 잘 알려진 프로그램도 아니었기 때문이겠죠.
내용적 측면에서도 특급 '어그로'가 난무했던 <100분 토론>과는 달리 <열린토론>에서는 "논문을 읽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수준의 비상식적 발언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열린토론>은 <100분 토론>보다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 갔죠.
하지만 우리는 <열린토론>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이날 토론엔 나름의 의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게임 과몰입 질병 코드 등록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열린토론>은 아쉬운 점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열린토론>을 통해 무엇을 볼 수 있었을까요? 어떤 점이 아쉬웠을까요?
이날 토론에는 보건복지부 산하 국립정신건강센터 정신건강사업과 조근호 과장과 문화체육관광부 게임콘텐츠산업과 박승범 과장이 출연했습니다. 각각 게임 과몰입 질병코드 등재 찬성과 반대 입장에서 토론을 벌였습니다. 두 과장의 토론을 통해 우리는 복지부와 문체부 두 정부 부처의 스피커가 직접 나와 의견을 밝혔기 때문에 나름의 의의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근호 과장의 경우 보건복지부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부서 산하 센터에서 행위중독과 물질중독에 대한 진료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건복지부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찬성 주장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게임은 나쁜 게 아니지만, 중독적 사용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이 있기 때문에, 질병코드로 등록하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한다" 였습니다.
박승범 과장은 "문화체육관광부는 게임 이용 장애 WHO 질병코드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확실히 밝혔죠. 박 과장은 ▲ 관련 연구가 아직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질병코드 등록은 섣부르다는 점 ▲게임 산업계에 막대한 피해가 갈 수 있다는 점을 반대의 근거로 들었습니다.
토론 후반부에 박승범 과장은 "게임 이용 장애가 진짜 질병인지 같이 협업을 좀 해보자" 이야기했습니다. 여기에 조근호 과장은 "WHO의 질병코드 등록은 찬성하지만, 건전한 게임 문화를 조성하는 데 협조할 용의가 있다"고 화답했습니다.
하지만 게이머 입장에서 상황은 그리 화기애애하지 않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WHO 게임장애'에 관한 범부처 공동연구의 제안을 준비 중입니다. 하지만 보건복지부는 WHO에서 최종적으로 게임장애를 질병화하면 이를 곧장 수용할 계획입니다. (바로가기)
즉 기본적으로 문체부와 복지부의 주장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습니다. 찬성은 "질병코드화를 해야 뭐가 문제인지 정확히 알 수 있다"였고 반대는 "뭐가 문제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니 질병코드를 하지 말자"죠.
반대측이 찬성측의 논리를 바로 논파하지 않은 데서부터 토론의 균형은 깨졌습니다. 이 부분은 일단 뒤에 얘기하고, 찬성측 주장의 허점부터 얘기해보죠. 조근호 과장이 현장에서 밝힌 논리 구조를 분석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일선 진료 현장에서 게임 중독 이용군이 보고되고 있다.
(2) 의료인으로서 이 원인을 분석하고 치료를 위한 솔루션을 줄 필요가 있다.
(3) 하지만 관련해서 유의미한 연구 결과가 아직 많지 않은 상태다.
(4) 그래서 게임 이용 장애 질병코드 등록은 필요하다.
얼핏 보면 꽤 정교한 논리구조입니다만, 여기엔 몇 가지 허점이 있습니다. 먼저 게임 중독 이용군이 왜 등장하는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당장 치료가 필요하니 (원인도 잘 모르면서) 질병코드로 등재한다는 것이죠.
'게임 이용 장애'가 주말에 넷플릭스를 몰아 보는 것과 비슷하게 미디어 소비 습관에 해당하는지, 우울증, ADHD와 같은 타 질병과 함께 오는 증상인지, 아니면 완전히 단독적 질병인지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조 과장의 논리 구조에 다른 원인은 특별히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게임 그 자체만으로 질병을 유발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게임이 질병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것을 반대측은 즉각적으로 밝히지 못했습니다. 이장주 소장은 "학업 스트레스 등으로 인해 게임에 빠질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라고 이야기하기는 합니다만, 발언에 대한 즉각적인 답변이 아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라이브 토론 특성상 '묻히고' 말았습니다. 수치와 기간 등을 예로 들어 학업 스트레스가 게임 과몰입의 원인이라는 정의준 교수의 연구결과를 인용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찬반 양측은 여태까지 발표된 자신에게 유리한 조사 결과를 늘어놨습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발표된 결과는 너무 그 차이가 큽니다. 예를 들어 지금 나온 조사 결과 중에 '게임 이용 장애' 유병률은 0.7%에서 15.6%까지 천차만별이죠. 여기에 대한 해석도 학자마다 다릅니다. 당연히 이번 <열린토론>에서도 천차만별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가 오갔죠.
두 가지 조사 결과가 충돌하는 가운데 조 과장은 2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논리를 방어합니다. ⓐ나는 (너희와는 달리) 일선 현장에서 일하는 전문 의료인이다, ⓑ주장이 다르면 질병코드로 등록을 해서 추가로 연구를 하면 된다.
토론 현장에서 ⓐ에 대해 반대측은 "의료인의 영역을 인정하지만, 과잉 진료의 우려가 상존한다"고 말하는 수준으로 넘어갔지만, 학술적 근거가 불명확함에도 질병코드 등재를 추진하는 현 상황은 의학적인 문제가 아닌 것이 의학적 문제가 되는 의료화(Medicalization)의 문제가 있습니다. 병이 아닌 것을 병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치료'라는 명분하에 정당화되죠.
하지만 질병코드 등재는 WHO나 의료인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여러 사회 구성원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박승범 과장은 그런 맥락의 이야기를 했지만 역시 '묻히고' 말았습니다.
ⓑ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WHO가 게임 이용 장애를 질병코드에 등재하지 않아도 충분히 관련 데이터는 수집할 수 있습니다. 정의준 교수는 5년 동안 2014년부터 2018년까지 5년 동안 게임을 즐기는 초,중,고교생 2,000명을 추적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게임 과몰입 진단을 받은 청소년들의 절반 정도가 가만 놔뒀더니 정상 진단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게임 이용 장애가 등재된 이후에 데이터 수집에도 문제가 생길 수 없습니다. 증상을 소비나 습관이 아닌 질병으로 전제하고 연구를 진행한다면 그렇지 않을 때와 차이가 클 것입니다. 데이터가 필요하기 때문에 질병으로 분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입니다.
또 찬성측은 게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합니다. 세상에는 보드게임부터 모바일게임, 콘솔게임, PC게임과 웹게임 무수히 많은 종류의 게임이 있습니다. 장르도 무궁무진하죠. 당연히 소비의 패턴과 몰입도도 다릅니다. 하루에 1번, 10분 씩만 나의 아기자기한 정원에 물을 주는 게임도 있는가 하면 <문명>처럼 한 판의 승리를 보기 위해서는 수십 시간이 필요한 게임도 있습니다.
근데 이들이 "어릴 적 해봤다"며 예시로 드는 게임은 수십년 전 <너구리>나 <테트리스>입니다. 지금 게임 소비층이, 일선에서 만났다는 '환자'들이 무슨 게임을 왜 하는지는 토론회 현장에서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게임의 정의도 불분명합니다. 보건복지부와 조근호 과장이 게임이라는 미디어에 대해 얼마나 많은 이해를 가지고 있는가도 의문입니다.
이들은 그저 "게임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 "게임으로 뇌의 특정 부분이 어떻게 되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라고는 말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게임으로 고통받는지는 고찰하지 않습니다.
1시간 가량 진행된 토론에서 반대측은 찬성측을 상대로 역부족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열린토론>의 화면중계본에선 찬성측 패널이 반대측 주장을 비웃는 듯한 모습이 잡히기도 했습니다. 토론의 승패를 가르는 건 썩 유의미하지 않지만, 기자가 보기에 설득력 있는 메시지의 전달 차원에서 반대측은 찬성측에 비해 열세였습니다.
게임 과몰입의 질병코드 등재에 대한 찬반양론(pros and cons) 상황에서 찬성은 "게임이 나쁜 건 아니다 → 그런데 문제가 있다 → 질병코드 등재하고 살펴보자"의 쉽고 간단한 메시지를 설계했습니다. 'WHO 게임 이용 장애 질병코드 등재 여부'가 핫 이슈가 된 지금 찬성 측은 <열린토론>에서도 <100분 토론>에서도 그리고 다른 채널에서도 조직적이고 일관적으로 이 논리로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찬성측의 이데올로기는 '게임을 하는 뇌가 망가진다'는 게임뇌이론에서, 게임은 도박·마약과 같다는 4대 중독 프레임에서, "게임 자체에는 문제가 없지만, 이걸로 몇몇 아이들이 아프니 고쳐야죠"라는 논리로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 논리는 많은 학부모에게 감정적인 공감대를 얻었습니다. "당장 우리 아이가 병에 걸릴 수 있다"거나 "어떤 아이는 게임에 져서 물건을 집어던졌더라"라는 식으로 말이죠.
이에 반해 반대측은 찬성 의견에 대한 논리적 반박도 하지 못했을 뿐더러 게임중독이 등재되면 안 되는 당위도 쉽게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산업이 망한다', '게임은 문화다'는 셧다운제 반대 정국인 2009년부터 해오던 말 아닌가요? 말을 해도 사람들이 알아듣지 않아 답답하다면 다르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게임이 중독으로 지정되면 13조 게임시장에 타격이 갈 것이다"라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예측입니다. 실제로 게임이 중독으로 지정되면 그에 따른 영향이 존재할 수 있죠. 하지만 이는 "게임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있으니 질병으로 지정하자"에 대한 논리적 대답이 될 수는 없으며 전망(prospect)이지 명백한 사실(fact)은 아닙니다.
대다수의 사회적 갈등이 '밥그릇 싸움'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공개 토론에서 "질병코드 등록 이전에 우리의 정책 방향을 제대로 펼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라던지 "게임이 질병코드로 등재되면 최소 5조 1천억 원의 손상이 생긴다"라는 주장에 일반 청취자들이 얼마나 공감을 할 수 있을까 따져봐야 합니다. 그것도 상대편에서는 "게임 이용 장애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현실에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상황에서요.
<열린토론>에서 찬성측 패널은 "게임은 알콜처럼", "게임은 알콜과 같이"라고 말하며 게임을 알콜과 등치시켰지만 반대 측은 이를 꼬집지 못했습니다. "게임은 알콜처럼"이라며 당연스럽게 넘어가는 찬성측에게 "게임은 문화다"라고 답변할 것이 아니라 "게임은 알콜과 달리 화학적 중독 물질이 아니다"라고 확실하게 답변했으면 어땠을까요?
<열린토론>과 <100분 토론>은 끝이 났고, 인터넷에는 수많은 말이 오가고 있습니다. 두 토론 모두 본 기자는 이름값이 높은 <100분 토론>보다 오히려 KBS <열린토론>이 나름의 의의를 갖추고 있었고 게임 과몰입의 질병코드 등재와 관련한 찬성 측의 논리를 더 잘 볼 수 있었습니다. <100분 토론>과 달리 4명의 토론자 모두 적어도 토론을 할 의지는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찬성측은 새로운 논리를 들고 왔고, 반대측은 이에 맞서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산업이 망한다'와 '게임은 문화다'는 오래된 레토릭이고 (적어도 대중 토론에서는) 폭넓은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ICD-11의 통과가 유력한 상황입니다. 게임 업계는 '게임 이용 장애' 질병코드 등재에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하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