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보건기구(WHO)가 25일 '게임 이용 장애(Gaming Disorder)'를 공식 질병으로 분류한 제11차 국제질병표준분류기준(ICD-11)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이후 국내 게임 업계가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게임제작자대표그룹은 오늘(28일), 경기도 판교 글로벌게임허브센터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그룹 차원 성명 발표를 진행했다. 오전 국회에서 열린 긴급토론회에 이어 오늘만 두 번째 WHO 관련 회견이다.
이날 기자회견은 스마트폰게임개발자그룹 전명진 회장을 비롯해 스마일게이트 노동조합 SG길드 차상준 지회장, 한국게임개발자협회 정석회 협회장, 넥슨 노동조합 스타팅포인트 배수찬 지회장, 한국인디게임협회 최훈 협회장, 김성회 크리에이터 등 6개 단체 관계자가 참석했다.
관계자들은 WHO의 게임 이용 장애 질병 분류에 대해 유감을 표하며, 향후 제작자를 대변하기 위한 활동과 대국민 인식, 참여 운동을 벌임과 동시에 합리적인 민관협의체 구성을 요구했다. 게임질병도입반대 공동대책위원회와도 연대해 함께 목소리를 내겠다고 밝혔다. 관계자들은 향후 계획에 대해 서로 합의한 3개 내용에 대해서도 공유했다.
- 게임제작자대표그룹은 제작자를 대변하기 위한 올바른 목소리를 내고 향후 대국민 인식개선사업 및 국민참여운동사업을 추진하겠다.
- 현재 보건복지부 주도가 아닌 객관적이며 합리적인 민관협의체 구성을 강력히 요구한다.
- 게임제작자대표그룹은 게임질병도입반대 공동대책위원회와 함께 연대해 앞으로도 하나의 목소리를 내며 끝까지 동행하겠다.
※ 기자회견 공동성명서 전문
우리 게임 제작자들은 게임을 치명적인 중독 물질로 규정한 WHO의 게임 질병코드 부여 결과를 강력하게 규탄하며 보건복지부의 국내 도입을 적극 반대한다.
국내 게임 산업이 태동한 후 지난 30여년간 우리 게임 제작자들은 ‘게임은 아이들의 놀이’라고 치부해왔던 척박한 환경에서도 새로운 문화 산업의 신 개척자라는 사명감과 문화 콘텐츠 수출 분야에서도 1등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게임을 개발 및 제작해왔으며, 그 결과 지금의 대한민국은 세계적인 게임 제작 기술 보유 국가의 반열에 올라서게 되었다.
우리는 몇 해 전 게임을 마약, 술, 도박과 함께 4대 중독으로 포함시키고 그 가치를 폄하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막아내며 굳건히 대표적인 문화 콘텐츠의 지위를 지켜왔으나, 게임을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치명적인 중독 물질로 치부하는 작금의 상황에서는 더 이상은 침묵할 수 없기에 아래와 같이 선언을 발표하여 게임의 가치를 지켜 내고자 한다.
하나. 게임은 대중과 함께 숨쉬는 콘텐츠이다.
게임은 전체 국민의 70%가 이용하고 있는 건전한 국민 대중 문화이자 국민 놀이 문화이다. 국민 다수가 즐기는 게임과 게임을 행할 자유를 명확하지 않은 기준으로 제한을 두어서는 안 된다.
하나. 게임은 창의적인 콘텐츠이다.
게임은 사용자가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만나는 문제에 대한 해결 과정을 통해 창의력이 배양되는 순기능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콘텐츠이다.
하나. 게임은 자기 주도적 학습이 가능한 콘텐츠이다.
사용자는 플레이 중 주도적 학습의 과정을 스스로 터득하고, 학습 과정을 통해 재미를 느끼게 되며, 새로운 학습 체계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적극적으로 배양할 수 있는 콘텐츠이다.
하나. 게임은 예술적 가치를 포함하는 콘텐츠이다.
게임은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가지고 사실적, 초사실적, 은유적, 낭만적 표현의 자유가 극대화된 예술적 가치를 포함한다. 소프트웨어 공학이라는 기술적 기반 위해 문학, 미술, 음악이 가진 예술적 가치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대표적인 융복합 콘텐츠이다.
우리 게임 제작자들은 게임 중독이라는 용어조차 사회적 합의가 없었음을 지적하며, 언론 및 방송에서 게임 중독 대신 ‘게임 과몰입’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권고한다.
지금의 아이들이 원하는 세상의 놀이터는 어른들이 뛰어 놀았던 운동장과 놀이기구가 있는 놀이터 만이 아니며, 무한의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게임이라는 가상의 세계가 이미 아이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발전하면, 살아가는 환경과 문화, 그리고 사람들의 인식도 함께 변화해야 한다.
다만 극히 일부의 사람들이 게임에 지나치게 과몰입되어 있다면, 그것은 게임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과몰입할 수 밖에 없었던 환경, 그래서 사회적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환경의 문제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있으면 안 되는 나쁜 게임이 아닌, 있어서는 안 되는 나쁜 환경을 해결하는데 노력을 다해야 한다.
다음은 6개 단체 관계자들이 기자회견을 통해 밝힌 성명문 주요 내용이다.
1. 한국게임개발자협회 정석희 회장
'게임=중독물질'이라는 단서가 잘못됐다. 최근 건국대학교 정의준 교수 연구결과를 보면, 게임 과몰입 증상을 보인 2,000명의 청소년을 5년간 추적 연구한 결과 98.5%의 아이가 별도 치료나 상담 없이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다.
즉, 정의준 교수의 연구 결과를 보면, 게임 과몰입의 원인은 게임이 아닌 학업이나 가정, 사회 환경이 학생에게 심각한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게임이 중독물질로 지정된 것에 대해서는 게임 업계도 반성해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면, 게임 업계가 뜻을 모아 공개석상에서 의견을 터놓은 사례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게임 이용 장애가 질병 코드가 부여되기 전에 조치할 수 있었음에도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한 점은 아쉽다.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보건복지부의 KCD 도입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겠다. 게임질병도입반대 공동대책위원회를 통해 유관단체, 기관과 협력해 업계 의견을 타진하면서 게임 업계 차원에서 활발히 목소리를 내겠다.
2. 한국인디게임협회 최훈 회장
게임 이용 장애의 질병 코드 부여는 단순히 게임만의 문제가 아닌 문화 콘텐츠 전체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 가스렌지나 토치를 방화 도구라고 하지 않듯, 게임은 모두가 즐기는 문화 콘텐츠인데 각종 사고의 원인으로 게임을 지목하면서 질병 코드를 부여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WHO의 질병 코드 부여는 산업의 입지를 좁게 할 것이다. 중독물질로 낙인 찍히면 업계도 안전한 콘텐츠만 생산할 것이며, 게임 유저의 선택도 적어질 것이다.
3. 넥슨 노동조합 스타팅포인트 배수찬 지회장
포괄임금제보다 게임 이용 장애의 질병 코드 부여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개발자가 직접 영향 받는 포괄임금제보다 산업 전체에 영향을 주는 질병 코드 부여가 훨씬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게임을 중독물질로 보는 것에 대한 명확한 실체를 찾기 어렵다. 정말 중독물질이라면 누구보다 게임을 사랑하고 개발하는 개발자야 말로 심각한 중독 환자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수능이나 사교육이 훨씬 심하다. 공부하다가 자살하는 학생도 많다. 하지만, 누구도 수능이나 사교육을 원인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런 며에서 게임은 여전히 사회적으로 소수만 즐기는 문화여서 공격의 대상이 됐다고 생각한다.
다만, 부모와 아이가 함께 게임을 할 수 있는 사례가 늘어나고 서로 이해하면 게임이 주류 문화로 편입돼 점점 부정적인 시선이 줄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4. 스마일게이트 노동조합 SG길드 차상준 지회장
명확한 인과관계 없이 게임을 중독물질로 규정한 것이 문제다. 부모의 과도한 간섭과 무신경함, 취미활동도 제대로 만들기 어려운 사회 환경에서 많은 이들이 게임으로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다.
최근 발생하는 사회 문제 원인에 대해 단순히 게임 탓만 하고 있다. 직무유기를 게임에 덮어씌운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게임 이용 장애의 질병 코드 부여는 성급하고 시기상조라고 생각한다. 게임과 중독의 인과관계가 제대로 입증되지 않았음에도 너무 성급하게 추진했다. 이번 질병 코드 부여가 과거 무분별하게 실행됐던 전두엽 절제술 같은 결과를 초래할까 두렵다.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5. 스마트폰게임개발자그룹 전명진 회장
게임도 나름의 소통 수단이며, 그 안에서 구성원과 다양한 얘기를 나누고 있다. 게임을 중독으로 보는 것은 게임 유저의 문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방법의 이해가 낮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인 것 같다.
게임을 중독으로 보는 부모 중에 "우리 아이가 게임 때문에 고통 받고 있다"며 게임을 백해무익하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이가 많다. 과거와는 다르게, 게임은 자신을 어필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었으며 사회성을 키우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영국 이코노믹스에서는 청소년 범죄율이 절반으로 줄어드는데 게임이 크게 기여를 했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소개하기도 했다.
우리 아이, 그리고 게임 유저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을 이해하고 문화를 공감하는 것이다. 기성세대가 아이들과 진정으로 공감하고 즐거운 얘기를 나눈 것이 언제인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상호존중은 반드시 필요하다. 존중은 이해에서 나오며, 그래야 상대방 생각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다. 새로운 문화를 조금 더 이해하는 환경이 되기를 바란다.
6. 김성회 크리에이터 (G식백과)
게임 이용 장애를 질병으로 분류하는 것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도 밝혔듯이 사회적, 의학적으로 합의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린 성급한 결론이다. 10년 전쯤 임요환 프로게이머가 아침마당에 나와 게임에 대한 각종 편협한 질문을 받은 것을 다들 알 것이다. 10년 이상이 지난 지금도 대중이 게임을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도 나아지지 못했다는 것은 참으로 절망스럽다.
WHO의 이러한 결정은 여러 이익단체가 신생 놀이문화인 게임을 몰매질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마치, 싸움을 못하는 코끼리를 눕혀 놓고 하이에나들이 달려드는 경우 같다. 얼마 전 한 한의원에서 게임중독을 한의학으로 치료하는 광고를 하는 것도 봤다.
언론도 강력 사건의 원인을 게임으로 단정짓는 부분이 때로는 야속할 때가 있다. 100분 토론에서도 예시로 나오기도 했는데, <리니지> 작업장을 한 가장이 자식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경우를 '게임 중독 아버지'로 얘기하더라. 이건 게임 중독이 아니다. 일로서 작업장을 한 것이다. 불법 업자일 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희곡과 시가 철학자에게 비난을 당했듯, 아주 오래 전부터 새로운 놀이 문화는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게임에게도 그럴 수는 있지만 이번 경우는 너무 심하다. 게임 산업이 죽는 상황까지 벌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물론 일부 게임이 확률성, 사행성이 강한 콘텐츠로 비난을 받는 것을 보면 게임이 핍박 받는 것에 어느 정도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게임업계도 분명 스스로 반성할 필요가 있다. 보편적인 취미활동으로 인정 받는 날까지 노력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