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롤드컵의 테마곡 '릴 나스 엑스'의 STAR WALKIN은 롤드컵 핵심 슬로건인 ‘One & Only'(유일무이) 라는 키워드를 강조하기 위해 탄생했다. 뮤직비디오에서는 LCK를 대표하는 선수로 비록 ‘쵸비’ 정지훈이 등장했지만, LCK는 이제 ‘쵸비’의 젠지가 아닌 ‘데프트’ 김혁규의 DRX, 그리고 ‘페이커’ 이상혁의 T1이 각각 대표하게 됐다.
10월 30일부터 31일, 새벽부터 잠잘 생각은 포기한 채 한껏 끓어오른 e스포츠 팬들의 열기를 대변하듯 DRX와 T1은 뜨거운 경기력으로 팬들의 성원에 보답했다. 5년 만에 찾아온 롤드컵 결승에서의 LCK 내전. 그리고 결승의 왕좌를 대표하는 두 선수 페이커와 데프트. 두 마포고 출신 선수의 짜릿했던 여정을 STAR WALKIN의 노랫말에 맞추어 다시 따라가보고자 한다. /장태영(Beliar) 필자, 편집= 디스이즈게임 김승주 기자
#1. T1 - They told me I would never see the “rise”
- "절대 떠오르지 못할 거라 말했지"
- 라이즈(Ryze)로 다시 우뚝 선 불사대마왕
2세트 밴픽 1페이즈, 페이커는 과감하게 라이즈를 기용했다. 서머 시즌 통틀어 65전에 달하는 그의 경기 동안 고작 2차례밖에 등장하지 않은 픽이다.
페이커의 라이즈는 ‘클템’ 이현우 해설의 말처럼 페이커의 오른손과 같았다. 통산 67전 43승 24패, 64.2%의 승률로 자신의 시그니처 픽임에도 시즌 내내 거리를 두었던 라이즈는 모습 하나만으로 존재감을 보였다. 특히 징동의 미드 픽이었던 사일러스는 롤드컵 내내 아칼리와 라인전 구도를 형성했을 뿐, 라이즈와의 맞대결 구도는 예상하기 어려운 구도였다.
실제로 라이즈는 중요 순간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경력과 경험이 쌓이면서 클러치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높아진 페이커의 플레이 스타일이 고스란히 드러난 모습이었다.
23분, 이미 1분 전까지 바텀 라인에서 무려 4명이 합류하며 크게 턴을 소모한 징동은 진열을 정비하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거쳐야 했다. 이 때, 본진과 바텀 라인에서 ‘제우스’ 최우제의 요네와 ‘페이커’의 라이즈가 동시에 탑의 미니언에 텔레포트를 쓰고, 이와 동시에 궁극기로 바론 앞까지 이동해버리는 허를 찌른 전략을 구사한다.
바론 둥지 내의 와드 시야나 근처에 상주하던 전력이 전혀 없던 징동은 바론 버스트를 전혀 간파하지 못했고, 뒤늦게 바위게 부쉬에 깔아둔 와드로 ‘구마유시’ 이민형의 합류를 파악해 뒤늦은 대응을 시도한 게 징동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31분은 그야말로 페이커의 원맨쇼가 징동의 모든 선수를 뒤흔들어 놓은 순간이었다. 바론 버프로 귀환 타이밍이 빨라진 T1은 한점 돌파로 좁은 협곡을 뚫고 나오던 징동의 거친 플레이에 진영을 잡지 못하며 다소 우왕좌왕한 모습을 보였다.
징동은 ‘구마유시’ 이민형과 ‘케리아’ 류민석을 동시에 잡으며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 찼다. 미드 라인 억제기가 사라진 걸 인지하지 못하던 징동은 ‘카나비’ 서진혁이 ‘오너’ 문현준의 스킬샷에 맞은 나머지 진영으로 돌아간 순간에서야 ‘페이커’의 과감한 텔레포트 활용을 파악해 혼잡한 상황에서의 기습 백도어를 알아차리게 된다.
‘카나비’의 빠른 미니언 제거로 쌍둥이 포탑 앞의 급한 불은 껐지만, 오더의 혼선 탓인지 급하게 징동의 선수들은 대로가 아닌 협곡으로 퇴로를 이어나갔다. 결국 궁극기를 활용해 협곡으로 돌아온 페이커를 비롯한 T1 선수들에게 연이어 꼬리를 잡히면서 맥없이 승기를 내주고 말았다.
급하게 찍히는 카나비의 백핑
진영이 완전히 흐트러지면서 징동은 T1의 진격을 손쉽게 허용했고, 게임은 크게 기울었다 (출처: 라이엇 게임즈)
3세트 역시 ‘페이커’의 선택은 라이즈였다. 게임 시간 17분까지 분당 1킬이 쏟아지며 팽팽한 난전이 이어지고, 골드 차이도 1000골드 남짓으로 살얼음판 같은 균형을 유지하고 있을 때 T1의 킬 비중 50%를 차지한 것은 바로 ‘페이커’의 라이즈였다.
초반 바텀 교전 상황에서 급작스레 ‘구마유시’의 루시안이 짤리고, ‘케리아’의 나미까지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궁극기를 활용한 페이커의 이른 합류는 신의 한수가 되었다. 룰루까지 정리하며 6분 만에 2킬을 몰아 먹은 페이커의 라이즈는 빠른 성장을 이룸과 동시에 루시안-나미의 휘청일 뻔한 라인전 구도에 평형을 맞추는 적절한 로밍을 보여줬다.
소위 ‘대각선의 법칙’으로 상체 구도에서 큰 점수를 얻었던 징동은 바텀에서의 소식을 접하며 흔들리고 말았다. 카나비는 ‘오너’ 문현준의 녹턴을 정리한 데에서 가능성을 엿본 나머지 무리한 탑 타워 다이브까지 시도하며 ‘제우스’ 최우제의 갱플랭크가 회복할 여지까지 주고 말았다. 이곳 저곳에서 난전이 거듭하는 동안, 팀이 손해 보지 않도록 상대를 흔드는 플레이메이킹은 라이즈의 정석 그 자체였다.
25분, 탑 라인 근처 삼거리 부쉬에서 벌어진 ‘369’와의 딜 교환에 이은 솔로킬은 ‘불사대마왕’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만큼의 명장면이었다. 레넥톤의 근접딜을 요리조리 피하며 Q와 E를 계속 꽂아넣던 페이커는 만년서리와 뒷점멸의 연계에 이은 스킬샷 마무리로 극소량의 체력만 남긴 채 레넥톤을 잡아낸다. 이내 징동의 바텀듀오가 페이커를 추격하려고 하자 탑 라인 벽에 바짝 붙어 부쉬로 숨은 뒤 궁극기로 탈출하는 장면은 백미 중의 백미였다.
그야말로 ‘Hide on Bush’라는 페이커의 솔로 랭크 아이디가 절로 떠오르는 장면이었다.
(출처: 라이엇 게임즈)
결국 4세트, 징동은 페이커의 라이즈를 직접 저격해버리기에 이른다. 유리한 바텀 구도 확보를 위해 케이틀린을 잡아야 했던 징동은 ‘호프’의 케이틀린 통산 승률 0%에 희망을 걸 수 없었다. OP나 다름없던 케이틀린을 결국 반 강제로 잘라야 하는 상황에서 밴 페이즈 2번째 슬롯에 라이즈를 울며 겨자 먹기로 택해야 했다. 이미 루시안-나미 조합의 파괴력을 연이어 당했던 징동에게 라이즈 밴은 ‘강요’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3번째 밴카드로 루시안을 택하자 T1은 보란듯이 ‘바루스’ 카드를 꺼내며 화답했다. 이어진 T1의 화력쇼, 아니 차력쇼는 사실상 전의를 상실한 징동에게 보여주는 가장 가혹한 작별인사가 되었다.
5년 만에 페이커를 세계 무대의 정상에 다시금 올라설(Rise) 수 있게 해준 것은 그의 든든한 오른팔이자 시그니처 픽 ‘라이즈(Ryze)’ 였다. 5년 간의 절치부심, 숱한 좌절의 문턱, 그리고 스프링의 역사와 역설적인 행보를 보인 서머를 모두 견디며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거란’ 세간의 우려를 보란듯이 페이커는 떨쳐냈다.
(출처: 라이엇 게임즈)
#2. DRX - Don’t ever say it’s over if I’m breathin
(출처: 라이엇 게임즈)
- "내가 숨쉬는 한 끝이라 하지 마"
- 멈추지 않는 마지막. 데프트의 춤사위
중계진 예측 11:1, 해외 도박사 배당률 4.50 : 1.16. ‘데프트’ 김혁규의 마지막 춤사위는 애틀란타에서 멎어버릴 듯했다. 그러나 신들린 칼춤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결국 샌프란시스코 행 비행기 수화물 칸에 비장의 무기를 옮겨 싣는 데 성공했다.
2세트, 데프트의 바텀 라인 구도는 케이틀린을 가져오며 웃어주던 밴픽 구도와 다르게 극도로 불리하게 흘러갔다. ‘표식’ 홍창현의 갱킹까지 이어지며, 빠르게 밴픽의 유리한 구도를 거대한 스노우볼로 굴리려던 DRX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리헨즈’ 손시우의 카르마가 살아나가고, 이어 ‘룰러’ 박재혁의 Q-E 콤보와 함께 유성이 동시에 터져 ‘베릴’ 조건희의 럭스가 부쉬에서 절명하며 완전히 꼬여버렸다.
경기 중반 바루스와의 CS 차이가 30개 이상 벌어지며 라인전이 사실상 패배에 가까워진 케이틀린이 빛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젠지의 어설픈 구도 형성이 연달아 이어지면서였다. 바론 버스트를 이어가는 와중에도 체력 관리가 부실해 바론을 치지 못했고, 드래곤 버스트를 시도하던 와중에도 ‘킹겐’ 황성훈의 술통 폭발로 ‘도란’ 최현준의 오른이 끊겨버리며 모든 오브젝트 싸움에서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
어부지리로 4용까지 완성할 기회를 얻은 DRX는 전열 정비보다 오히려 젠지의 잔여병력을 추격하는 길을 택했고, 이내 룰러의 바루스까지 낚는 데 성공한다. ‘제카’ 김건우의 아리가 매혹을 적중시켰고, 킬이 데프트의 케이틀린에게 들어가며 젠지의 분위기는 확실한 균열 양상을 보였다. 턴게임의 정석에서 과도한 턴 소모가 얼마나 큰 스노우볼인지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급격하게 킬 스코어를 얻으며 바루스와의 성장 간극을 역으로 벌려버린 데프트의 케이틀린은 정면이 뚫린 젠지의 레드 진영을 홀로 선봉장으로 나서 정리를 시작한다. 이윽고 합류한 팀원들과 넥서스를 파괴하며 게임을 마무리지었다. 미라클 런이 고작 한 차례의 패배로 끝나지 않음을 선언한 순간이었다.
이미 ‘룰러’의 바루스는 전열 이탈 상태였다. 4용을 막아야 한다는 사실이 귀환을 할 수 없도록 강제한 셈이다.
바루스가 끊긴 뒤 분위기는 DRX로 넘어가고 말았다. (출처: 라이엇 게임즈)
4세트 9분. 중원에서 대규모 한타 핑퐁이 오가며 DRX는 팀원 5명 중 ‘킹겐’의 그라가스를 제외하고 사실상 모두 전열 이탈에 가까운 상태였다. 오히려 자신의 진영으로 도망감과 동시에 젠지로부터 추격을 받는 입장이 되었다. 글로벌 골드는 근소하게 앞서 있고 바람용을 획득해 유리한 고지에 놓인 상황에서, 자칫 DRX 전체가 몰살 당할 경우 꼼짝 없이 'Silver scrapes'를 들어야 하는 위기에 처한 셈이다.
이때 ‘데프트’의 바루스는 피넛을 향해 Q를 날려 오히려 적극적인 포킹을 시도한다. 결과는 명중과 함께 킹겐의 킬로 마무리. 순식간에 벽을 등진 채 5:3 구도가 잠시간 형성되었다. 비록 2명이 정리되면서 젠지에게 킬을 내주었지만, 무난하게 성장을 할 경우 팀의 정글인 킨드레드보다 기대 성장값이 높을 수 밖에 없는 ‘비에고’를 잘라낸 건 확실한 소득이었다. 이후 2분 뒤, 드래곤 둥지 앞에서 ‘리헨즈’의 노틸러스를 요리한 건 드래곤 스택의 평행선을 맞추려던 젠지의 의도를 완벽히 차단하는 결과를 낳는다.
(출처: 라이엇 게임즈)
4용 고지를 앞둔 34분은 데프트의 한타 집중력이 여실히 발현된 장면이었다. 젠지는 강타에 이은 스틸을 노리기 위해 물러서는 구도에서도 끊임없이 바다 드래곤에 화력을 집중했고, DRX는 ‘표식’을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 중심으로 유리한 포위구도를 선점하기 위한 무빙이 주를 이었다.
이때, ‘표식’의 강타 바다 드래곤에 꽂히며 4용을 완성한 DRX는 포위된 구도에 젠지 진영을 모두 밀어넣기 위해 드래곤이 포진했던 위치 뒤편에 예측 술통을 던진다. 드래곤을 빼앗긴 후 물러나며 진영을 정비할 젠지의 움직임을 예측한 절묘한 스킬샷이었다.
마무리는 자연히 전투에서 물러나 프리딜을 쏟아부을 여유로운 진영에 포진한 데프트의 몫이었다. 눈 앞의 노틸러스와 비에고를 모두 끊어내며, 순간 폭딜에 취약한 원딜과 미드라이너만을 전장에 남겨두었고, 빈사 상태였던 ‘도란’의 레넥톤마저 수호천사가 빠지며 빠르게 정리되기에 이른다.
드래곤이 포획된 이상, 젠지의 진영은 술통이 위치한 지역 혹은 둥지 옆 부쉬 뿐이었다. 이미 둘 이상이 포진한 부쉬 근처와 달리 벽 맞은 편 강가는 유일한 선택지이자, 젠지의 사지였다. (출처: 라이엇 게임즈)
이후 넥서스 앞까지 속절없이 밀린 젠지는 3분 뒤 데프트에게 연이은 3킬을 헌납했다. 여전히 숨 쉬고 있다면 (끝날 때까지) 끝났다고 말하지 말아 달라는 릴 나스 엑스의 노랫말처럼, 데프트의 마지막 춤사위는 더 먼 훗날을 기약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한편의 완벽한 소년 드라마, 드라마 서사의 마침표가 아닌, 느낌표를 찍기 위해 데프트는 다음 춤사위를 준비한다. 안개가 걷힌 금문교 위를 수놓는 칼춤이 되어, 샌프란시스코의 협곡을 푸른 빛의 안개로 뒤덮을 준비를 마쳤다.
(출처: 라이엇 게임즈)
#3. Prove’em wrong every time till it’s normal
- "그들이 틀렸단 걸 계속해서 증명해"
- 당연한 게 될 때까지 증명해온 그들을 위한 하나의 왕좌.
12명의 선수, 10명의 주전, 그리고 오직 5명에게만 허락된 왕좌. 누군가에게는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는 여정이었고, 누군가에게는 매 순간이 기적을 거니는 여정이었다. 이 모든 것들은 숫자 몇 자리의 셈놀음으로 정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건 이들이 그려낸 롤드컵 기간동안의 드라마틱한 스토리와 숱한 역경과 영광의 반복이 얽히고설킨 그들의 커리어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자해지의 순간, 금문교를 금빛으로 수놓으며 횡단할 최후의 ‘스타’는 누가 될까? ‘페이커’? ‘데프트’? 모두 그간의 발자취를 천천히 쫓으며 기대감을 북돋는 한 주가 되길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