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AAA급 게임은 수백억 원 이상의 개발비와 수 년의 개발 기간이 투입된다. 그렇기에 게임의 개발이 일정 수준에 완료되면 이에 맞춰 기대감을 끌어올리는 마케팅을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형 게임쇼 에서 게임의 스토리를 담은 CG 트레일러를 공개하고, 실제 게임을 담은 트레일러나 정보는 출시일이 가까워지면 차차 공개하는 식이다. 그만큼 들어가는 마케팅 비용도 많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가는 게임도 있다. '공식적인' 정보를 공개한 후 바로 다음날, 심지어는 공개한 그 날 바로 게임을 출시하는 것이다.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하이파이 러시>가 있다. 1월 26일 진행된 '엑스박스 개발자 다이렉트'에서 '공식적인 첫 공개'가 이루어지자마자 게임이 출시됐다. 사전 마케팅이 전혀 없었던 덕분인지 적지 않은 개발 기간과 게임 분량에도 불구하고 낮은 가격이 책정되기도 했다. 게이머들 역시 깜짝 공개에도 불구하고 <하이파이 러시>의 높은 완성도에 엄지를 치켜들며 연일 호평을 남기고 있다.
이에 흥미 삼아 공개한 당일, 혹은 바로 그 다음날에 출시한 게임을 몇 가지 모아 봤다. /디스이즈게임 김승주 기자
공개와 동시에 출시된 <하이파이 러시> (출처: MS)
# 홍보용 게임이 이렇게 잘 될 줄이야... <폴아웃 쉘터>
소개할 첫 게임은 2015 E3에서 공개되자마자 출시된 <폴아웃 쉘터>다.
당시 베데스다는 E3 컨퍼런스 참여가 처음이었다. 그만큼 역대급의 라인업을 선보였는데, <둠 리부트>, <디스아너드 2>, <폴아웃 4>의 첫 게임플레이 동영상이 공개되는 등 국내외 게이머들의 많은 관심을 끌 만한 발표를 했다.
거주민을 모아 자신만의 볼트(방공호)를 운영하는 <폴아웃 쉘터>는 이런 분위기에 맞춘, 사실상 <폴아웃 4>의 홍보용 게임이다. <데드 바이 데이라이트>를 개발한 '비헤이비어 인터랙티브'와 베데스다가 공동 개발했으며, 행사에서 공개된 직후 iOS 플랫폼으로 무료 출시됐다.
(출처: 베데스다)
놀랍게도 반응은 엄청났는데, <폴아웃 쉘터>는 출시 다음날 북미 앱스토어 기준으로 킹의 <캔디 크러시 사가>를 제치고 최고 매출 순위 3위까지 오르는 성적을 보였다. 론칭 2주 만에는 510만 달러(당시 한화 약 58억 5,072만 원)의 매출을 올렸다. 홍보 목적으로 출시된 무료 게임이기에 별도의 사전 마케팅이 없었는데도 달성한 수치였다.
<둠 이터널>의 DLC <고대의 신들 파트 2> 역시 호쾌한 출시일 공개로 많은 관심을 모았다.
3월 15일 베데스다 공식 유튜브에 티저 동영상을 공개하고, 17일 공개한 신규 트레일러를 통해 바로 내일 출시된다고 밝히는 속도전을 선보인 것. 이에 팬들은 '무대뽀' 성격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 '둠가이'가 나오는 게임 다운 출시일 공개라며 호평을 남겼다. 실제 출시된 DLC에 대한 평가는 이용자마자 갈리는 모양새였으나 전체적으로는 호평을 받았다.
덕분에 이런 출시일 공개 방식은 같은 년도에 '제니맥스 미디어'를 인수하며 <둠 이터널>의 개발사 '아이디 소프트웨어'와 유통사 '베데스다'를 품게 된 MS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21년 11월 16일, MS는 Xbox 2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가장 큰 기대작인 <헤일로 인피니트>의 멀티플레이를 무료로, 당일날 출시한다고 알렸다. 팬들의 반응도 좋았다. 출시 약 3시간 만에 <헤일로 인피니트>의 멀티플레이는 PC 플랫폼인 스팀에서만 16만 명의 동시 접속자를 달성했다.
구도도 비슷했다. 좌측이 <둠 이터널>, 우측이 <헤일로 인피니트> (출처: MS)
하지만, <헤일로 인피니트>의 결과는 <둠 이터널>과 반대였다. 출시 초기 반응은 좋았으나, 미흡한 사후 지원과 미진한 콘텐츠 업데이트로 평가가 나락까지 치달은 것. 콘솔 동시 접속자 수는 알 수 없으나 현재 <헤일로 인피니트>의 스팀 동접자 수는 1만 명조차 넘기지 못한다.
Xbox 진영의 대표 타이틀로써는 너무나 초라한 결과다. 결국 부진한 결과로 인해 개발사 343 인더스트리는 2023년의 시작과 함께 대규모 구조조정을 당했다. 인터넷 유행어로 비유하면 "업데이트가 느리잖아요"라는 물음에 "하지만 (출시는) 빨랐죠"라고 답해버린 셈이다.
더욱 서글픈 이야기는 세세하게 따지면 <헤일로 인피니트>는 "하지만 빨랐죠"의 영역에도 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헤일로 인피니트>의 기획은 2015년 경부터 시작됐지만, 신규 게임 엔진의 개발이 겹치는 덕분에 출시 일정이 계속해서 밀린 것으로 알려졌다. 2020년에는 공개한 게임플레이 트레일러가 부정적인 반응을 얻자 긴급히 출시일을 연기하고 게임을 고치기 위해 추가 개발 인원을 투입했다.
깜짝 공개로 반전을 노리려 했지만, 결국 깜짝 공개에만 그쳤던 셈이다.
라이브 서비스를 강조했음에도 평가가 날로 하락한 <헤일로 인피니트> (출처: MS)
#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에이펙스 레전드>
이 분야에서 가장 좋은 사례라 한다면 <에이펙스 레전드>를 꼽을 수 있다.
<에이펙스 레전드>는 출시 1주 만에 동접 200만, 누적 유저 2,500만 명을 기록하며 'FPS 배틀로얄' 장르의 대표가 된 게임이다. 그러나 출시 전 이루어진 사전 마케팅은 거의 없었다. <에이펙스 레전드> 19년 2월 5일에 발표됨과 동시에 출시됐다.
왜 이런 마케팅 방식이 사용됐을까? 해외 매체 '게이머인더스트리'와의 인터뷰와 EA가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한 개발 과정에 따르면 <에이펙스 레전드>는 2017년 경 디자이너 두 명이 <타이탄폴 2>의 리소스를 재활용해 시작한 작은 프로젝트였다. 프로젝트가 사내에서 호평을 받으면서 점점 개발진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내 대부분의 개발 인력이 투입된 게임이 됐다.
프로토타입 시절의 <에이펙스 레전드> (출처: EA)
이 때 배틀로얄 장르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피드백에 따라 <에이펙스 레전드>에는 <타이탄폴>의 핵심 시스템 두 가지가 삭제됐다. 거대 메카인 '타이탄'을 조종한다는 것과 자유로운 벽타기 시스템이다.
다만, 당시에는 세간에 개발사 '리스폰 엔터테인먼트'가 <타이탄폴 3>를 개발하고 있다는 루머가 유포된 상태였다. <에이펙스 레전드>는 <타이탄폴>의 리소스를 활용해 만들어졌지만 시리즈의 핵심인 벽타기와 타이탄이 삭제된 상태였기에 <타이탄폴> IP 게임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개발진은 일반적인 6개월 기간의 게임 마케팅 방식을 사용할 경우 <타이탄폴> 시리즈 팬들에게 "만들라는 후속작은 안 만들고 유행에 편승해 배틀로얄이나 만지작거리고 있냐"라는 부정적인 반응을 받을 수도 있다고 봤다.
이에 비욘세가 셀프 타이틀 앨범을 깜짝 출시해 호평을 받은 것에 대해 영감을 받아 게임을 당일날 공개하고 출시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대신, SNS나 스트리밍 사이트 등지에서 화제가 될 수 있도록 사전 계획을 세웠다. 출시 며칠 전 LA에서 비공개 이벤트를 진행해 스트리머, 크리에이터, 게임 기자들이 미리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도록 하고, 이들이 게임에 대한 약간의 정보를 밝힐 수 있는 일자를 사전에 조율했다.
출시 당일날에는 라이브 방송을 통해 약 3시간 동안 게임의 배경만 보여줄 뿐 자세한 정보를 언급하지 않아 SNS에서 소식을 들고 몰려온 게이머들의 관심을 증폭시키다가, 방송 마지막에야 트레일러와 함께 자세한 내용을 설명하면서 "당일 출시됨"을 공지했다. 이런 깜짝 공개에 사람들은 앞다투어 게임을 플레이하기 시작했다.
<에이펙스 레전드>를 사전 체험하는 인플루언서들 (출처: EA)
덕분에 <에이펙스 레전드>는 출시 몇 시간이 되지 않아 스트리밍 사이트 등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타고 날아올랐다.
출시 8시간 만에 100만 플레이어를 달성하고, 1달 만에 5천만 명 이상의 게임 플레이어를 기록했다. 지금도 <에이펙스 레전드>는 EA와 리스폰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게임으로써 라이브 서비스되고 있다. 게임이 이처럼 흥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본적인 완성도가 좋았다는 점도 있겠지만, '공개 직후 출시'의 마케팅 을 잘 활용했다는 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