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시그래프 2023 현장에는 경력이 20~30년인 베테랑들부터, 이제 업계에 발을 들이려 하는 학생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인파가 몰렸던 엔비디아 설립자 겸 CEO 젠슨 황 키노트 현장을 예로 들면, 젠슨 황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도 매우 큰 기회였지만, 그 공간에 모인 사람들끼리 하나의 주제로 빠르게 가까워지고 서로의 경험과 인사이트를 나누는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시그래프 현장 곳곳에서 그런 교류가 있었고, 이 과정에서 학생들에게는 새로운 친구와 멘토가, 업계의 베테랑들에게는 신선한 자극이, 참여한 업체들에게는 비즈니스 대상이 생기기도 했다. 시그래프 2023에 참여한 대한민국 기업에게서도 현장에서 좋은 기회를 얻어 MOU를 맺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현장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던 스케치소프트 김용관 대표도 업계의 전문가들이 '페더'라는 제품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했다고 한다.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듯 펜 터치를 하면 손 쉽게 3D 데이터를 만들 수 있는 3D 드로잉 앱 페더는 현장에서 많은 아티스트들의 시선을 끌었다. 시그래프에 참여해 다양한 피드백을 얻은 덕분에 앞으로 페더를 더욱 발전시킬 방향성을 잡는 데 큰 도움을 얻었다고 한다.
여러 세션을 넘나들며 왕성한 활동을 보여준 앱 개발자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실시간으로 구동되는 소프트웨어만 선보일 수 있는 세션인 리얼 타임 라이브에서 과거에도 수상 경력이 있는 '요선 창'은 베테랑들이 인정하는 천재 개발자였고, AI와 AR을 활용해 기발한 어플리케이션들을 선보였다.
시그래프 2023 현장에서는 <아바타: 물의 길>,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엘리멘탈>,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 <아케인> 등 시각 효과와 CG로 눈을 사로잡았던 작품의 제작팀들을 모두 만날 수 있었다. 뛰어난 CG를 만든 비결과 제작 비하인드를 들을 수 있었고, 이런 기술은 영화 제작에만 국한되지 않는 내용들이었다.
특히 이번 시그래프 2023의 화두 중 하나는 OpenUSD였다. 픽사에서 만든 3D 그래픽 데이터 교환을 위한 프레임워크이자 3D 생성 소프트웨어 플랫폼으로, 픽사, 어도비, 애플, 엔비디아, 오토데스크 등이 3D 생태계 표준화를 위한 협업을 하고 있다. 말 그대로 지금까지 각기 다른 프로그램과 규격을 사용하던 워크플로우들을 표준화시켜 작업과 작업 사이의 교환성을 높이는 것이다.
시그래프에서 특히 주목하는 기술들에는 '실시간', 'AI'라는 키워드가 붙어 있었다. 유니티는 식생, 캐릭터 생성, 조명, 렌더링 등 다양한 AI 솔루션을 보여주고 있고, 엔비디아는 AI 슈퍼컴퓨터로 AI 시대의 잠재력을 열고 있다.
IBM은 양자 컴퓨터를 소개했는데, 기술적으로는 극저온에서 만들어지는 초전도체를 활용하고 있었다. 해당 세션에서는 최근 거론되는 저온이 아닌 환경에서도 초전도체의 성질을 보여주는 물질(LK-99라고 말하진 않았지만)들도 사용될 것인지에 대한 흥미로운 질문이 있었는데, 당장은 그런 계획이 없다는 답변이 나오기도 했다.
업계 최전선에서 활발한 투자를 하고 있는 기업들이 자신들이 개발하고 있는 제품 및 소프트웨어에 대해 많은 담론을 나누는 곳이 바로 시그래프 현장이다. 그 이유는 시그래프가 단순한 컨퍼런스를 넘어 컴퓨터 그래픽 학회에 근간을 두고 있기 때문이며, 이곳에 모이는 많은 전문가들이 다른 곳에선 얻기 어려운 양질의 피드백을 주기 때문이다.
컨벤션 센터 입구에 들어서면 석박사 학생들을 비롯한 각종 연구 논문들이 가장 먼저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컴퓨터 그래픽 분야에서 전 세계 최고 수준의 학회인 'ACM 시그래프'가 시그래프 컨퍼런스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그래픽 업계에서는 시그래프에 논문을 내고 그 내용으로 전문가들의 인정을 받는 것이 굉장히 큰 영광으로 여겨지고 있다. 기술적 한계를 뛰어넘는 아이디어들부터, 참신한 주제들까지 그 범위도 다양하다.
1974년 시작된 시그래프 컨퍼런스는 벌써 50년의 세월을 지나왔다. 그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많은 기록과 흔적들 또한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시그래프 2023 현장에는 정말 많은 VR 관련 부스들이 있었다. 게임쇼 중에서도 이 정도로 VR에 진심인 곳은 잘 없다.
예를 들어, 일렉트로 시어터와 VR 시어터는 컨퍼런스 입장과 별도로 표를 구매해야 볼 수 있는 구조인데, 심사를 거친 우수작들을 상영하는 공간이다. 비공식이긴 하지만 VR 시어터에서 행사 기간 동안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1,200명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컨퍼런스가 시작되기도 전에 예매로 구매할 수 있는 표는 모두 매진됐었다. 현장에서도 긴 줄을 선 후에야 입장할 수 있었던 곳이 바로 VR 시어터였다.
몰입형 파빌리온 및 신기술을 소개하는 공간들에서도 VR 기기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시그래프를 VR, 모션 캡처의 성지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한 번 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