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의 '게임 탓'은 언제까지 이어지는 걸까요.
KBS2 TV <스모킹건> 6월 6일 방영분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해당 방송은 '만삭의 아내를 살해한 남편의 범행 동기'를 정신과 전문의가 풀이하는 과정에서 범인이 '전략 게임'에 빠져있던 상황을 이유로 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질타를 받았습니다. 한국게임이용자협회 회장 이철우 변호사는 KBS 시청자청원 게시판에 관련 청원을 올렸고, 26,855명의 청원 동의가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최근 KBS가 이에 대한 해명을 내놓았는데, 면피성 답변만 제시되어 논란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습니다. 청원 답변을 통해 "게임 산업과 이용자들을 무시하고 명예를 훼손할 의도가 없다", "여러 원인 중 하나로 추론과 해석", "게임을 결정적 살해 동기로 묘사하지 않았다", "리셋이라는 단어는 게임 외 여러 분야에서도 관용구처럼 사용되는 흔한 표현", "출연한 정신과 전문의 또한 게임 애호가"라고 했습니다.
극악무도한 살인의 동기로 '전략 게임'을 즐긴 정황을 제시하는 게 과연 올바른 추론일까요? "여러 원인 중 하나로 추론과 해석"을 했다는 말은, 결국 제작진이 '게임'을 원인으로 봤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결정적 살해 동기로 묘사하지 않았다"는 말은 설득력이 있을까요?
▲ 19분 32초부터 관련 내용이 나옵니다.
<스모킹건> 6월 6일 방송분에서 "자신의 아이를 품은(임신한) 아내를 어떻게 자기 손으로 살해할 수 있는지, 그 마음이 이해가 안 되거든요. 대체 남편은 왜 그랬을까요?"라는 출연진의 질문 이후에, 이광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매일 1~2시간 정도 게임을 했다고 해요. 대학 시절에는 8~10시간 정도 게임을 했습니다. 수업을 들어가지 않아서 의과 대학 예과 1년 유급을 당하기도 했거든요. 남편이 빠져있던 게임은 컴퓨터에서 혼자 하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었습니다. 남편에게는 인생도 마치 미션이나 퀘스트를 깨듯 전략적으로 끌고 가려는 성향이 여러 상황에서 엿보입니다. 그런데 게임처럼 현실을 살 수는 없잖아요. 계획도 잘 안 풀릴 수밖에 없고요."
"남편 백씨는 전문의 시험을 치르고 난 뒤에 군의관이나 공중 보건의로 군복무를 할 예정이었는데요. 소아과 전문의 시험에 합격을 하면 군의관으로 서울에 있는 국군서울지구병원에 근무할 수 있겠다고 한 거예요. 그런데 예상 외로 전문의 시험 문제가 너무 어렵게 나오면서 1차 시험을 못 본 거예요. 합격 못하면 그 전략 자체가 다 틀어져 버리잖아요. 남편에게는 큰 스트레스였고 좌절감으로 느껴졌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내와 다투기도 한 거죠."
"게임 세계에서는 기존의 세계를 부수고 다시 만들 수 있잖아요. 바로 '리셋'을 할 수 있는 겁니다. 남편은 이 '리셋'을 현실 세계에서도 해버리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이렇듯 범인의 살해 동기를 묻는 질문 이후 이어진 설명은 '게임'을 겨냥하고 있었습니다. 그 분량도 결코 짧지 않았죠. 아래에서 소개하는 사법부의 판단과도 결이 달랐습니다.
해당 사건의 대법원 판결(대법원 2021.6.28.선고 2021도231 판결)은 "남편이 게임을 장시간 즐겨하였다는 등의 사정은 부부 싸움의 동기는 될 수 있지만 살인의 동기로는 매우 미약하다", "보잘 것 없는 동기로 살인까지 이르렀을 것이라고 쉽게 추단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파기환송심(서울고등법원 2012.12.7. 선고 2012노1944판결)에서는 "유독 어려웠던 전공의 시험에서 불합격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대표되는 학업 스트레스와 아내와의 갈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해 부부 싸움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의 '격분'이 살인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됐습니다.
KBS는 청원 답변에서 "게임 산업과 게임 이용자들을 무시하고, 그 명예를 훼손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제작진은 게임을 범행의 결정적 동기로 단정하지 않았고, 여러 원인 중 하나로 추론과 해석을 했다", "그동안 <스모킹건>에서 다룬 사건들에 비춰볼 때 살인은 하나의 동기로 이뤄지지 않는다. 제작진은 모든 프로그램에서 범행의 여러 동기들을 과학적 분석을 통해 입체적으로 다뤄왔고 이번에도 '게임'을 결정적 살해 동기로 묘사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이철우 변호사와 한국게임이용자협회는 청원에서 "문제 장면을 무분별하게 방송한 제작진과 전문의를 강력하게 규탄한다", "게임 산업 발전과 게임 이용 문화 향유를 저해하는, 이런 구시대적이며, 특정 집단의 이익에 맞춰진 왜곡된 시선을 바로 잡아주시고, 이러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노력해 주시기를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KBS의 청원 답변에는 재발 방지에 대한 약속 및 언급은 없었습니다.
청원에서는 "우발적인 범행의 과정을, 현실을 게임처럼 리셋할 수 있다는 게임 과몰입 또는 현실과 게임의 혼동 증상으로 인한 것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있고, 불명확한 내용을 사실인 것처럼 방송해 시청자를 혼동케 하고 있어, 방송심의 규정의 공정성과 객관성 기준을 위한한 것이 명백하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KBS는 청원 답변에서 "프로그램에선 '게임 과몰입'이나 '현실과 게임의 혼동 증상' 같은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리셋'이라는 단어도 여러 분야에서 관용구처럼 사용되는 흔한 표현이며, 이미 <스모킹건>의 다른 편에서도 사용한 바 있다"고 했습니다.
제시된 예시는 "2023년 8월 23일 방영분 '케이크와 청산가리를 든 남자' 편에서 실패한 인생을 새 출발하려 아내와 아들 3명을 독살하고 불까지 지른 후 사망 보험금을 타내려 했던 범죄자의 의도를 인생을 '리셋'하기 위한 것이라 묘사했다"는 것입니다. 이어 "리셋이 게임을 염두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말씀드린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단어 사용에는 맥락이라는 게 있습니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이광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해당 방송에서 "게임 세계에서는 기존의 세계를 부수고 다시 만들 수 있잖아요. 바로 '리셋'을 할 수 있는 겁니다. 남편은 이 '리셋'을 현실 세계에서도 해버리고 싶었던 것 같아요"라고 게임과 리셋을 함께 언급했습니다.
KBS 청원 답변의 말미에는 이광민 정신과 전문의가 게임 애호가라는 설명이 등장합니다.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신청인(이철우 변호사)께서 '게임 이용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하신 정신과 전문의 이광민 선생님 역시 때론 밤을 새우며 게임을 즐기시는 열렬한 게임 애호가라는 점입니다. 그분 역시 "자신처럼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 게임과 게임을 좋아하는 이들의 명예를 훼손할 리 있겠습니까?"라고 이야기하십니다. 다시 한번 프로그램에 깊은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본질을 호도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광민 정신과 전문의가 게임 애호가라는 점은, 방송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전달된 게임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대한 해명과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청원 답변 안에 "게임 이용자를 무시하거나, 명예를 훼손할 의도가 없었다"는 말보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다는 언급이 있기를 바랐던 건 기자 뿐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