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오랜 친구는 <스타크래프트> 유즈맵에 빠져있다. 노파심에 설명하자면 유즈맵(Use map settings)이란 유저가 전장을 만들고 그 모드(Mode)를 플레이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과거 <워크래프트>와 <스타크래프트> 등 RTS의 유즈맵이 큰 인기를 끌었다. 이런 유즈맵은 에디터를 통해서 변형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언어 단계에서 재개발되는 모드(MOD)와는 비슷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
<스타크래프트>는 이제는 '민속놀이'의 반열에 오른 게임 아닌가. 이 게임에 아직도 파고 먹을 요소가 남았는가 물어보니 별천지가 따로 없었다. 게임의 리마스터, 유즈맵을 저장할 수 있는 애드온 SCA 등에 힘입어 <스타크래프트> 커뮤니티는 새로운 유즈맵을 계속 제작 중이었다. 유즈맵 관련 커뮤니티는 지금도 게시물이 꽤 자주 올라오고, 활동하는 회원 수도 상당한 편이었다. 비교하자면, 웬만한 모바일게임의 네이버 라운지 이상이다.
<마인크래프트>와 <로블록스> 같은 샌드박스 게임이 많이 나왔는데 아직 <스타크래프트>에 남아있다면, 유즈맵을 플레이하는 계층의 세대를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둘러보니 최근 유행하는 유즈맵은 <운빨 아이돌 강화하기>였다. 얼핏 봤을 때 2010년 초반부터 유행하던 <마린키우기> 부류가 떠올랐지만, 그와는 거리가 상당했다.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운빨 아이돌 강화하기>
오히려 모바일 방치형게임와 유사점이 많았는데, 컨트롤 요소가 거의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연습생 유닛으로부터 시작해 팬들의 선물상자를 따서 사랑을 많이 얻게 되고, 레벨업을 통해 인기 아이돌이 되고, 각 소속사 오디션을 격파하는 모습이 하나의 게임에 담겨있었다. 이 과정 속에서 유저가 직접 조작을 통해 성취를 이루는 요소는 없었다. 랜덤으로 유닛이 나오고, 그 유닛을 컨트롤하는 유즈맵까지 봤어도 거의 모든 것을 랜덤에 맡기는 유즈맵은 처음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유즈맵을 (무료로)서비스하는 주체가 있고, 자체적인 커뮤니티에서 라이브게임처럼 소화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운빨 아이돌 강화하기>를 클리어하면 다음에 다른 유즈맵에서 이득을 볼 수 있는 방식의 운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드 모드를 클리어하면, 다음의 유즈맵에서 쓸 수 있는 미네랄을 추가로 넣어주는 방식이었다. '게임을 더 오래 했음'을 보여주는 칭호 시스템도 있었다.
이렇듯 <스타크래프트> 유즈맵이 라이브게임처럼 운영되는 모습을 보고 기자는 깜짝 놀랐다. 심지어 어떤 게시물에서는 특정 유즈맵의 업데이트 부족에 대한 개발자의 사과까지 올라왔다. 돈을 받고 판매하는 성격의 유즈맵도 아니었다. 유즈맵 플레이어는 정확한 확률 정보를 공개하라고 개발자에게 요구하기도 했다.
아무리 <스타크래프트>가 매력적이라도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플레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방치형 성장 감각을 줄 수 있는 게임이 널렸으니 대체재라고 부를 만한 게임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익숙함과 추억 때문이라면 밀리(Melee)가 아닌 유즈맵은 '추억' 자체와는 거리가 있는 데다, 커뮤니티까지 만들어 라이브게임처럼 즐길 일인가 싶었다.
'왜 유즈맵으로 키우기를 하느냐'라는 질문에 돌아온 친구의 대답은 이랬다. '더이상 실망하고 싶지 않으니까'.
친구가 말하는 유즈맵 씬에는 특별한 기대가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이 구매한 것이라고는 원작 게임 말고는 한 푼 어치도 없고, 시간을 써서 즐기면서 조금의 성취를 누린 뒤 다음 유즈맵으로 넘어가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결제 유도는 당연히 없었고 애착관계 또한 (타 게임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듯했다. 오히려 유즈맵에 매몰된 시간을 '다음 판의 미네랄' 따위로 돌려주고 있어 보상의 감각도 얼추 구현된 느낌이었다. 친구는 웬만한 모바일게임보다 <스타크래프트> 유즈맵을 하는 편이 오히려 가성비 맞는 게임 플레이라고 강조했다.
이렇게 게임 자체에 별 기대가 없는 이들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모습은, '민속놀이' 바깥에서도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다. 어느 새인가 모바일 시장에서 여러 방치형 모바일게임을 떠돌며 재미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방치형게임이 모바일 MMORPG의 아성을 위협하기 시작하자 대형 게임사들도 속속 관련 게임 개발에 뛰어든 지도 오래다. 이는 곧 게임 그 자체를 즐기는 것보다 게임을 하는 감각을 즐기는 수렴진화처럼 보였다. 경쟁이 심해진 모바일 방치형게임 판은 광고 복마전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게임을 즐기는 이들에게 애착이 형성된 사례는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지금 모바일 시장에서는 이렇게나 많은 키우기 게임들이 경쟁 중이다
최근 <디스코 엘리시움> 제작진이 만든 스타트업 '서머 이터널'의 도발적 내용의 선언문이 화제였다. 이들은 "자본가가 설계하고, 소외된 인간이 만드는 게임은 플레이어 여러분의 시간, 흥미, 그리고 자본을 가난하게 만들 것"이라면서 "현대 기업의 비디오게임은 노동자의 시간을 VC의 돈으로 전환하는 장치일 뿐"이라고 경고했다.
서머 이터널은 "스트리밍 서비스, 지루한 속편, 리메이크의 터무니없는 재활용은 문화의 공동묘지를 만들었다"며 오늘날 기업이 주도한 게임 문화가 '공동묘지'와 같다고 주장했다. 살아있는 게임으로 채워진 공동묘지라면 사정이 나은 편이다. 게임시장은 포화됐고, 매출 압박은 강해지면서 <콘코드>나 <배틀크러쉬>처럼 개발 기간이 서비스 기간보다 긴 게임이 묘지에 쌓이고 있다.
매일 쏟아지는 '일일 퀘스트'와 접속 보상 등속을 "착취"의 논리로 이해한다면, 섬뜩한 기분마저 든다. 게임사의 "확률 조작"이 널리 발표됐으니 게이머에게 "착취"적 행위를 지속할 동인은 무엇이 남게 되겠는가?
지난해 10월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게임 이용률은 74%에서 62.9%로 급감했다. 게임은 지금 게임방송은 물론 릴스, 쇼츠와 시간점유율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모쪼록 게이머들이 왜 게임을 떠났는지 제대로 된 후속 조사가 필요하다. 만약 게임 이용 급감의 주요한 이유가 앞서 살펴본 "착취"적인 게임 서비스 때문이라면, 이 업계는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상품의 의미에 대해서 재고해야만 할 것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조사한 2023년의 게임 이용률
게임에 대한 낮아진 기대 때문인지, 이제는 요즘 무슨 게임이 인기인지조차 짚어내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바나나>는 아직도 스팀의 '최다 플레이 게임' 2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 게임 같지 않은 클리커의 접속자 수는 지금도 수십만 명대다. <바나나>의 롱런을 근거로 세계에서 가장 큰 PC게임 플랫폼의 통계가 일정 부분 오염이 되어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장인가?
그나마 PC 게임판은 "사전예약 100만 돌파"로 점철된 모바일게임보다는 사정이 나은 편이지만 동시접속자가 그대로 노출되는 환경은, 게이머들이 "망겜"을 결정짓는 일종의 지표를 제공했다. <콘코드>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일정 수준 이상의 동시접속자를 모으지 못하는 게임들은 격렬한 조롱을 받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조롱은 게임에 대한 기대감이 없거나 적기 때문에 나오고 있다. 급기야 조롱은 "소통"을 위해 모습을 드러낸 게임 디렉터의 모습을 희화화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때 게이머들은 드러눕는 것보다 일어나기를 선택했다고 생각했다. 실로 지난해에만 게임 관련 소비자운동을 전개하는 시민단체가 2개나 생겨났다. 이들 활동을 앞으로도 지켜볼 만하지만, 다른 극단에는 자신이 즐기는 게임에 대해서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는 게이머들 또한 조용히 생겨나고 있는 듯하다. 게임을 착취적 행위로 인지하는 사람이 더 많아진다면 이런 운동의 미래를 장담할 수 있을까?
당장 <스타크래프트> 유즈맵을 하는 사람들에게 신작을 플레이하라고 등 떠밀 수는 없다. 게임업계의 겨울이 길어지고 있으므로 서비스 종료 등 '효율화'를 위한 선택 또한 결코 해선 안 될 일이라고 보긴 어렵다. 그러나 게이머들이 점점 더 게임에 기대를 걸지 않고 게임 플레이를 착취적 행위라고 여긴다면, 봄 대신 <프로스트펑크> 같은 빙하기가 업계를 덮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