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에 계신 분들도 기자와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을까?" 취재를 하다 보면 자주 드는 생각입니다. 매일매일 이슈가 쏟아지는 세상에서 잠시 차 한 잔, 술 한 잔 기울이며 생생한 목소리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멋진 게임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분들을 만나, 뜨거운 현안들로 담소를 나눠보는 코너 '인디 한 잔'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과 작품에 흥미를 느끼시나요? 여러 입구가 있겠지만, 가끔은 딱 한 마디의 말이 핵심을 관통하는 열쇠가 되어줄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저희는 상상과 이야기의 힘을 믿는 인디게임 개발사입니다" 이전부터 다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도, 스튜디오 두달이 자신들을 소개할 때 일관되게 사용해온 문장입니다. 아마 이들의 전작 <라핀>을 해보신 분이거나, 개발 중인 신작 <솔라테리아>의 데모를 들여다 보신 분이라면, 단번에 알아차리실 수 있을 겁니다. 스스로 어떤 부분에 강점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아는 팀이구나-라고 말이죠.
인터뷰를 하러 갈 때, 이미 많은 사전 조사를 하고 가기 때문에 자신들을 소개해달라는 요청이 구태의연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한 번 더 그 소개를 귀 기울여 들어보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이들의 자기 암시이자 목표이기도 할 테니, 그 말이 가진 힘을 직접 마주하는 건 또 의미가 다르다고 생각하거든요.
부쩍 추워진 가을 날, 스튜디오 두달 김민정, 이규원 대표와 2시간 넘는 대화를 나누며 확신했습니다. 처음에 가진 그 흥미와 기대는, 실제로 마주했을 때도 다르지 않았구나. <라핀>을 플레이하며 느낀 따뜻한 감동이, <솔라테리아>에서도 이어지겠구나.
사람들은 존재조차 몰랐던 지하의 토끼굴. 그곳엔 다섯 마리의 귀여운 토끼가 살고 있었습니다. 요리할 재료를 찾아 돌아오는 길에 가끔 마주치는 족제비나 몇몇 위험한 인간들을 제외하면, 그래도 평화로운 공간이었습니다.
어느 날, 지상에서 땅을 파며 시작된 공사. 주인공 '리베'는 인간의 문자를 읽을 수 있는 '호세'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봅니다. 엉뚱한 메카닉 '몽블랑', 매혹적인 '비앙카', 마음 따뜻한 요리사 '대장'까지 모두 하나의 결론에 동의합니다. 정든 토끼굴 '알파'를 떠나,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야만 한다는 것이었죠.
전설처럼 전해지던 '호르헤' 탐험대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리베' 일행은 어딘가에 있다는 '낙원'을 찾아 나섭니다.
<라핀>에서 가장 먼저 플레이어의 눈을 사로잡는 건, 물 흐르듯 매끄러운 동작과 따뜻한 색감의 아트입니다. 마치 한 편의 셀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감성에 취해 있다 보면, 어느새 다섯 토끼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에 빠져들게 됩니다.
'낙원'을 찾는 과정 속에서, '리베' 일행은 다양한 난관을 마주합니다. 위기는 때론 인간의 세계로부터, 때론 족제비나 자연 그 자체로부터, 일부는 이전에 길을 개척했던 토끼들의 행보로부터 유발됩니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리베'는 이 과정 속에서 무엇이 가장 소중했는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명확히 되새기게 된다는 것이죠.
큰 줄기에서 멀리 있지 않은, <라핀>의 사이드 스토리들은 게임과 캐릭터를 사랑스럽게 만들어주는 핵심 요소 중 하나였습니다. 예시를 살펴보면 이해가 빠릅니다.
인간의 손에서 길러지던 집토끼 '리베'는 우연히 옛 주인의 일기장을 찾아 '호세'에게 토끼어로 해독해달라는 부탁을 하게 됩니다. '리베'가 있어 큰 토끼(주인)가 행복하게 지냈다-던 '호세'의 해독이 뭔가 의심스럽다 느낀 '리베'는 메카닉 '몽블랑'에게 통역기를 만들어 읽어보자는 제안을 하게 되죠.
등장인물들이 모두 뚜렷하게 구분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고, 대사 또한 매우 섬세하기 때문에, 이들이 '사랑'이라는 한 마음으로 뭉치는 과정은 굉장히 애틋하게 전달됩니다. 부끄럽지만 기자 또한 사무실에서, 토끼들의 이야기에 눈물을 쏟기도 했죠.
재밌는 점은, 이렇게 차분하고 감성적인 스토리를 이어주는 교량이 '플랫포머' 플레이라는 것입니다. 타 게임에서 에어대시, 에어닷지, 삼각차기 등으로 불리는 기술을 총동원해야 깰 수 있는 다소 매콤한 난이도의 장애물이 등장하지만, 이내 이 모든 과정이 '리베'가 다른 토끼들을 사랑하고 아끼는 만큼의 희생과 노력이라는 점을 납득하게 됩니다.
잘 섞이지 않을 것 같은, 서로 다른 템포를 가진 스토리와 플랫포머 구간은, 플레이어의 경험에 대한 배려를 중심에 두고 하나의 색채로 녹아들게 됩니다. 사이드 스토리는 너무 매력적이라 쉽사리 지나치긴 어렵지만 보지 않고도 지나갈 수 있었고, 빠른 부활과 무제한인 목숨, 잘게 쪼개진 리스폰 포인트, 넘어서야 할 경로가 한 눈에 들어오는 맵 디자인이 죽음에 대한 스트레스를 상쇄해줬습니다.
동료애나 사랑이라는 단순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소중한 존재들이 모두에게 있는데, 우리는 그들에게 따뜻한 말을 얼마나 건내왔는지. 그들을 위해 기꺼이 가시밭길에 뛰어들 용기가 있었는지. 토끼들과 여정을 함께 하는 동안, 계속해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됩니다.
서로 다른 과거를 가진 토끼들이 토끼굴에서 함께 지내고, '낙원'을 찾는 여정에 같이 발을 내딛은 것처럼, 스튜디오 두달의 시작도 비슷했습니다. 서울대학교 학생들끼리 모여 만들기 시작한 프로젝트가 <라핀>이 되었고, 스튜디오 두달이라는 팀으로 나아오게 됐죠.
김민정 대표는 정보문화학과 재학 당시, 소설과 영화 등 스토리를 기반으로 한 여러 콘텐츠 제작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게임이라는 장르가 가진 색다른 매력을 느꼈고, 겨울방학 두 달 동안 조그만 모바일게임을 하나 만들어보자-는 결심이 점점 규모가 커져 <라핀>의 출시로 이어졌다고 하죠.
이규원 대표는 교내 게임 동아리에서부터 게임 개발에 이미 열중인 상태였습니다. 게임 제작이 포함된 수업에서 '에이스'로 통했던 이규원 대표의 프로그래밍 실력과 업무 진행 스타일을 좋게 봤던 김민정 대표는, 함께 게임을 하나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하게 됐죠. 이규원 대표 또한 게임 제작에 열정이 있는 사람을 찾던 중이었기에, 다섯 토끼들의 이야기에 손을 모았습니다.
두 공동대표를 포함해 총 6명이 함께 만든 <라핀>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잘 섞이지 않을 것 같은 다양한 취향이 하나의 게임 안에 잘 녹아든 독특한 작품입니다. 모든 멤버가 각기 다른 창작을 하던 인원이었고, 서로 표현하고 싶은 바가 많았던 대학생들의 열정을 가감 없이 담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트 디렉터의 손에서 전체 톤을 맞추는 봉합 과정을 거치며, 지금의 형태로 거듭났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왜 '토끼'들의 이야기여야만 했을까요? 산책하러 나선 길에, 서래마을 '몽마르뜨 공원'에서 귀여운 토끼들을 만나게 됐던 김민정 대표는, 한 현수막을 보게 됐다고 합니다. 그곳엔 [토끼를 버리지 마세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죠. 단순히 토끼가 많은 공원이라고 생각했던 그 공간이, 버려진 토끼들이 모인 곳이었다는 걸 알게 된 후로, 유기된 토끼들의 이야기를 게임에 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이규원 대표는 가장 어울리는 장르로 플랫포머를 추천했고, 그렇게 팀원들은 <라핀> 개발에 착수하게 됩니다. 서적과 블로그, 영상을 살펴보며 토끼들의 습성을 공부하고 게임에 반영하기도 했죠. 수박을 좋아하고 당근을 싫어하는 토끼도 많다거나, 토끼를 집에서 키우면 전선을 뜯어먹는 경우도 많고, 화가 나면 발을 구르는 스텀핑을 하는 등 다양한 특징을 게임에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토이 프로젝트처럼 가볍게 접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처음의 계획보다 더 많은 디테일을 <라핀>에 담게 됩니다. 애니메이션 프레임 수가 높았던 이유도, 의성어로만 구성된 보이스 연기가 여타 게임보다 훨씬 다양하고 섬세했던 것도, 이 한 작품에서 많은 걸 보여주고 싶었던 대학생들의 열정의 결과였죠.
'마라' 같은 앵무새 캐릭터는 말할 것도 없고, "웽웽, 먕먕"거리는 소리로 표현된 토끼들의 음성 대사는, 캐릭터의 성격과 씬의 상황과 감정에 맞춰, 정말 다채로운 바리에이션으로 전달됩니다. 실제로 감정적으로 중요하고, 임팩트가 있어야 하는 부분에서는 개별 대사의 보이스를 따로 녹음해 적용했을 정도라고 하죠. 심지어 스토리에서 매우 중요하게 등장하는 생일 축하 노래도 의성어로 불러, 감동과 웃음을 모두 잡았습니다.
스튜디오 두달은 <라핀> 때와는 완전히 다른, 메트로배니아 액션 게임 <솔라테리아>를 개발 중입니다. 가장 먼저 달라진 점은, 스튜디오의 명운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전보다 더 체계적인 시스템 안에서 명확한 마일스톤을 상정하고 개발하고 있는 이번 작품은, 스토리를 전달하는 측면에서도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멸망하는 정령들의 세계에서 태어난 작은 불의 정령 '톳'. 세계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알려진 '최초의 불'을 찾아 모험을 떠나게 됩니다.
2D 횡스크롤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라핀>과는 많은 점이 다릅니다. <솔라테리아>에선 패링, 회피, 차징 공격 등을 포함한 화려하고 빠른 액션이 게임플레이의 중심에 있습니다. 스태미너도 존재하고, 적이 그로기 상태에 빠졌을 때 가할 수 있는 특수 공격도 있죠.
체력, 힘, 스태미너를 키워주는 기본적인 성장 요소부터, 카드를 획득하는 것으로 새로운 능력(또는 상호작용)을 해금하고, 더 넓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것도 눈에 띕니다. 재료를 모아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무기를 재련하는 등 강조된 성장 요소는 탐험과 맞물려 점진적으로 확장되는 경험을 제공하게 됩니다.
이규원 대표는 "<라핀> 때는 플랫포머의 입문작 같은 느낌으로 만들었다면, <솔라테리아>는 반대로 메트로배니아 액션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재밌게 즐길 수 있는 게임으로, 어려운 난이도를 포함해 개발 중"이라 설명했습니다. "액션의 스타일리시함을 강조하려 하는데, 그래픽적인 연출뿐만 아니라, 짧고 빠른 공방 안에서, 손에만 익으면 패링도 빠르게 물흐르듯 사용할 수 있는 액션을 추구하고 있습니다"고 전했습니다.
전작인 <라핀>에선 다섯 토끼의 서사가 플랫포머 플레이 안에서도 굉장히 높은 비중으로 다뤄졌다면, 이번 <솔라테리아>에선 새로운 세계의 탐험과 다양한 정령들과의 만남 안에서 자연스럽게 세계관에 빠져드는 경험을 선사할 예정입니다.
김민정 대표는 "<라핀>을 통해서, 꼭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스토리텔링 방식이 아니더라도,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스토리텔링이 더 잘 어울릴 수 있다는 걸 배웠어요. 그래서 이번 <솔라테리아> 같은 경우,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하면서 좀 더 자연스럽게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게 했어요. 매력적인 NPC나 지역의 콘셉트를 통해 호기심을 자극하고, 이들을 찾아가는 서브 미션을 선택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이라 설명했습니다.
<솔라테리아>의 데모를 플레이하며 기자가 느낀 바도 동일했습니다. (아직 데모라서 본편에선 또 차이가 있겠지만) 대사가 등장하는 빈도가 <라핀>보다 줄어들었음에도, 등장인물들이 직접 말하지 않는 동안에도 이야기와 세계가 계속 이어진다는 감상이었죠.
잠시 더 넓은 주제의 이야기를 해봅시다. <하데스 2>가 얼리 액세스 출시된 지난 5월 당시, <하데스 2>뿐만 아니라 1편 또한 역주행을 하며 인기를 끌었던 것을 기억하시나요? 쿼터뷰 형식의 액션 로그라이크 중에선 여전히 <하데스>의 위상은 여전히 공고합니다. 덱빌딩 장르에선 <슬레이 더 스파이어>가, 뱀서류에선 원조 맛집으로 통하는 <뱀파이어 서바이버즈>가 그런 포지션에 있죠.
메트로배니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르명의 유래부터가 <메트로이드>와 <캐슬배니아>죠. 결국 한 장르 안에서 누군가의 기억을 사로잡는다는 건, 기존의 탑 티어 대표작과 경쟁해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규원 대표는 "유명한 전작이 있는 장르일수록, 명작과 비교를 당하는 입장이 되기도 하니까, 피카소와 제 그림을 비교한다면 잔인하잖아요"와 같은 농담 섞인 대답을 하기도 했습니다.
"메트로배니아 역시 유명한 게임들이 정말 많기 때문에 어려운 장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기존 게임들과는 다른 훅이 필요하고, 그게 민정 대표님이 담당해주시는 콘셉트나 스토리텔링이라고 생각해요. 동시에 장르의 기존 재미에서 너무 벗어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기대하는 재미는 충족해주면서, 차별점을 가져가는 게 전략입니다."
반대로 패키지 게임이기 때문에 '엔딩'이 있다는 점에서, 앞서의 명작들의 수명이 영원한 것은 아니기에, 낙수 효과를 기대해볼 수 있다는 희망적인 이야기도 오갔습니다. 히트작이 등장해서 그 장르의 주목도를 높이면, 다른 게임들도 함께 주목 받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상황을 말한 것이죠.
한 해에 출시되는 게임이 너무 많고, 특히 PC, 콘솔 시장에서는 정형화된 마케팅 공식도 없기 때문에, 게임의 상업적 성패를 아무도 예단할 수 없습니다. 다만, '재미'를 찾는 유저들과 출시 전후로 한 걸음씩 가까워질 수 있는 노력을 하다 보면, 성공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겠죠.
김민정 대표는 "패키지 PC 게임이 되게 낭만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숏폼이 유행하고, 빨리빨리를 추구하는 세상 속에서 일단 PC 앞에 앉아야 되잖아요(웃음)"라고 말했습니다.
김민정 대표는 게임을 만드는 지금도 소설을 꾸준히 쓰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창작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하죠.
"저희 비전이 상상과 이야기의 힘을 믿는 개발사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솔라테리아>에서는 또 다른 도전을 해보고 있지만, 그 이후에는 더 내러티브 중심인 게임을 만드는 회사로 나아가고 싶어요. 우리 회사만이 만들 수 있는 것, 특징적인 콘셉트와 세계관이 있는 게임을 만들고 싶고요. 캐릭터, 배경이 귀엽다는 평도 좋지만, 스토리가 기가 막힌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게임을 만들고 싶다는 목표가 있습니다."
이규원 대표는 "더 퀄리티 좋은 게임을 많이 만들고 싶다"고 합니다. 꿈꾸는 미래의 목표도 꽤나 구체적이었죠.
"중기적으로는 10만 장 팔리는 게임을 10개 만들고 싶고, 장기적으로는 200만 장 팔리는 게임을 만들고 싶어요. 지금은 게임 자체가 사랑을 받고 있다면, 앞으로는 이런 게임을 만드는 저희 스튜디오 두달이 사랑받을 수 있도록, 재밌는 게임을 더 많이 만들겠습니다. <라핀>을 재밌어 해주신, <솔라테리아>를 좋아해주실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