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변하는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파악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TIG 룩백' 코너에서는 업계 전체에 도움이 될 만한 경험과 인사이트를 가진 개발사들의 발자국을 톺아보며, 그들의 등 뒤에 남겨진 살아있는 이야기들을 전해드리려 합니다.
5시간째 회의실 칠판에 시나리오 구조를 그려 놓고 포스트잇으로 뒤덮으며 인공지능 로봇에게 지능이 생긴 미래의 살인 사건을 구상하는 <스모킹 건> 작가들. 눈을 돌려 사무실을 비추면, <즈큥도큥> 개발진의 자리로부터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 "너의 본색을 드러내라, 그리디 카타클리즘!!". 이제는 무덤덤해져 어떤 웃긴 주문이 나와도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씬으로 잔뜩 긴장한 채 들어오는 면접 후보자의 당황한 얼굴.
2024년 5월 어느 날의 렐루게임즈 사무실의 풍경이었다. 유난히 더웠던 올해 여름이 지나고, 사무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꺼질 일 없는 컴퓨터의 열기를 식혀주는 계절이 찾아왔다. 렐루게임즈의 방향타를 쥐고 있던 운명이 걸린 2024년 상반기가 정말 눈 깜짝할 새에 지났다.
작년까지만 해도 미금에 자리 잡은 무명의 작은 개발 스튜디오였던 우리가, 지금은 게이머들 사이에 이름을 알리고, 언론사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며, 지상파 뉴스를 통해 소개되고, 각종 기관으로부터 강연 요청까지 쇄도하는 쉴 틈 없는 조직이 되었다.
궁극적인 목표 달성까지는 아직 먼 여정이 남아있지만, 이제 막 큰 한 걸음을 내딛은 렐루게임즈의 성과와 발전 속도는 충분히 자랑스럽다. 지금까지 받은 관심에 힘입어, 고객의 기대에 부합할 수 있는 게임을 계속 출시할 수 있도록, 더욱 더 적극적인 투자와 개발을 이어가고 있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외부와 협업을 진행하다 보면, 렐루게임즈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자 하는 호기심이 느껴지곤 한다. 어떤 개발 방식을 채택하였길래 충격적인 콘셉트와 비주얼의 게임이 출시될 수 있었는지 궁금해 하시는 것은 물론이고,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회사가 어떤 추진력으로 전혀 다른 장르의 두 게임을 잇따라 출시할 수 있었는지 질문을 주시곤 한다.
위의 질문에 대한 공통적인 답변은, 렐루게임즈는 딥 러닝 기술을 이용해,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는 게임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소 단순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것이 렐루게임즈라는 회사의 본질에 대한 가장 명료한 대답이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렐루게임즈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고 연재 기회를 빌어 렐루게임즈에 대해 소개하는 자리를 가져보고자 한다. 렐루게임즈는 어떤 개발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이유로 오늘과 같은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는지, 우리는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공유하려고 한다.
지루한 역사 시간이 되지 않도록, 어디에서도 볼 수 없던 특이한 경험과 사건에 대해 솔직하게 말씀드리고자 하니, 독자 여러분께서도 끝까지 함께 해주시길 바란다. 렐루게임즈에 대해 전혀 들어본 적 없는 분들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자세하면서도 솔직하고 허심탄회하게 우리가 걸어온 길을 풀어본다.
이 이야기는 렐루게임즈의 이야기이면서도, 모든 소규모 게임 스튜디오에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다. 그럼 먼저 많은 화제가 된 작품 <마법소녀 카와이 러블리 즈큥도큥 바큥부큥 루루핑>과 <언커버 더 스모킹 건>의 탄생 배경을 소개한다. /기고=렐루게임즈 김민정 대표, 편집=디스이즈게임 김승준 기자
[TIG룩백 렐루게임즈 포스트모템 3부작]
① 화제의 작품 '즈큥도큥'과 '스모킹 건'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현재 기사)
② 당신이 몰랐을 렐루게임즈의 뿌리, '스페셜 프로젝트 2' (바로가기)
③ "발언권은 모두에게, 결정은 빠르게, 변화엔 유연하게" (바로가기)
<마법소녀 카와이 러블리 즈큥도큥 바큥부큥 루루핑>의 초기 스팀 페이지 디자인은 가히 폭력적인 수준의 B급 그 자체였다. 예리한 한국 게이머 커뮤니티의 레이더에 걸린, 해당 콘셉트에 대한 첫 번째 반응이 아직도 생생하다.
"게임 기획자가 사장님에게 받은 카톡: 왜 너는 이런 거 못 만드냐?"
해당 글에 대한 반응은 주로 '콘셉트에 대한 충격과 공포'를 표현하고 있었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업계에서 '개발자가 아무리 특이한 걸 만들어도 그것을 시장에 선보이겠다는 윗선의 결정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공감대였다.
점차 렐루게임즈의 정체가 확인되면서, 이 게임을 만들고 선보인 회사가 무명의 개인이나 인디가 아니라 '크래프톤 자회사'라는 것이 반전 포인트가 되었고, "아니 이런 걸 대기업이 컨펌한다고? 아, 크래프톤이라서 가능한 것 같기도"와 같은 반응이 이어졌다. [크래프톤은 Original Creative를 존중하고, 또한 자회사의 독립적인 개발과 운영을 보장한다]는 이 문장이 듣기 좋은 선언문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도 증명했다.
처음 해당 콘셉트가 사내에 소개되었을 때, 단번에 모두에게 환영을 받았던 건 아니다. 이 정신을 차리기 어려운 게임 콘셉트는 내부 회의에서도 우리의 말문이 막히게 만든 게 사실이다.
PD는 영리했다. 보통의 게임 피칭 과정은 문서나 약간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사고의 흐름을 주장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게임의 첫 피칭은 '라이브 스트리밍'의 형식이었다. 게임 공개 직후 여러분이 한 번쯤은 봤을 법한 스트리머들의 방송 형태로 공유된 게임 피칭 과정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였다. PD는 처음부터 이 비전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 논의가 반복되던 중 <즈큥도큥> 출시 결정을 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배경은 렐루게임즈에 속해 있는 젊은 층의 압도적인 지지였다. 당황한 사람들과 "저는 절대 안 할 것 같아요, 이게 좀..."이라는 주저 속에서도, 일부 Young Generation은 격한 공감대를 보여줬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게임의 흥행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우리가 재미있다면 먹힐 확률이 높다"는 경험이 떠올랐다. 회사의 일부지만 현재의 시장에 가까운 세대의 열광적인 반응은 분명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시장에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돌이켜 보면 모바일게임 시장이 열리던 초기에 시장의 지배자들은 터치/스와이프와 같이 모바일이기에 가능해졌던 새로운 입력 체계를 영리하게 활용한 게임들이었다.
<앵그리버드>에서 손가락으로 눌렀다 떼는 조작은 새로운 경험이었고, <퍼즐앤드래곤>과 <애니팡>으로 대표되는 3매치 퍼즐도 스와이프 UX의 기여가 8할이었다. 일본을 휩쓸었던 <포코팡> 역시 한붓그리기라는 '손가락을 대고 움직이는 모션'이 혁신이었고, <몬스터 스트라이크>와 <하얀고양이>로 이어진 슬링샷 방식까지.
같은 맥락에서 AI 기술을 도입함에 있어 우리가 오래 고민했던 기존의 키보드 마우스를 벗어난, 음성과 Vision 기술을 활용한 '입력 체계'의 혁신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여기에 렐루의 게임들이 거쳐야 하는 마지막 관문 '재미'에 대한 고민이 더해졌다. 단지 음성으로 명령을 내린다는 것만으로는 한끗이 부족하다. <Warkestra>의 실패가 이를 반증한다. <Warkestra>의 레슨을 유심히 지켜보았던 PD는 그 빈 공간에 '마법소녀'라는 '로망'을 심었다. 모두가 알고 있는 그 로망, "마법소녀가 되어 마법 주문을 직접 외쳐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경험은 분명 새로울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위에 B급 감성과 탄탄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흥미로운 시나리오, 그리고 생성형 AI의 활약이 <즈큥도큥>을 완성시킨 것이다. 참고로, <즈큥도큥>의 주문이 '아무 말 대잔치'라고 평하는 분들께, 시나리오 2회차, 3회차 플레이를 권해본다. 캐릭터의 입장과 스토리의 흐름이 모두 철저히 반영되어 설계된 탄탄한 주문들이다.
<즈큥도큥>은 단번에 렐루를 유명하게 만들었고, 유튜브 영상 게재 수 600여 개, 통합 조회수 250만 회라는 기록을 써내려가며, 2024년 여름 대한민국에 유쾌한 기억을 선물했다.
▲ <즈큥도큥> 이전엔 <워케스트라>라는 시도가 있었다. 이 때의 시도도 참신했지만, '로망'과 'B급 감성'을 더해 아재 마법소녀라는 전대미문의 결과물이 나오게 됐다.
렐루게임즈는 연이어 <즈큥도큥>과 대척점에 서있는 것처럼 보이는 콘셉트의 게임 <언커버 더 스모킹 건>을 출시했다.
<스모킹 건>을 진두지휘한 PD는 렐루의 초창기에 언어 모델이 게임에 적합한 기술이 아니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무언가를 빠르게 만들어보면 좋겠다는 열망으로 렐루 내부에서 전설적 망작으로 기록될 <악령퇴치 시뮬레이션 데몬>이라는 게임을 제작한다. 말 그대로 악령이 깃든 영혼과의 대화를 통해, 악령을 퇴치하고 정화하는 채팅 게임이었다. 언어 모델을 게임 기획에 도입하고자 처음 시도할 때의 전형적인 방식이었고, 내부에서 '재미가 없다'는 압도적인 부정 평가를 받으며 프로젝트를 정리하게 된다.
AI 기술은 최근 화두 중의 화두이고, 기술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여러 생성형 AI들부터 활용을 해보고자 시도해보셨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내가 하던 특정 업무를 대신해주거나, 내가 하는 것보다 나은 결과를 내줄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으로 AI 활용을 시작하게 된다.
실제 손을 올려 해보신 분들이라면 더욱 공감하겠지만, 결국 AI 툴들이 아직은 내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 불완전한 도구라는 결론이 나곤 한다. 마법을 부리는 기술이 아니고, 다루기는 더욱 어렵고, 예상했던 결과를 의도적으로 만들기는 더더욱 어렵다. 언어 모델에만 의존하는 방식의 <데몬>은 불완전 그 자체였던 것이다.
중요한 점은 이 지점에서, PD는 '역시 언어 모델은 게임에 맞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이 언어 모델의 답답한 한계를 역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인사이트를 얻었다.
그렇게 <스모킹 건>이 탄생했다. <스모킹 건>의 기획적 구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 절반은 증거를 나열해두고 플레이어가 그 증거들을 찾아서 각 의미를 연결해 결론을 이끌어내야 하는 일반적인 추리게임 방식의 설계를 유지하고, 나머지 절반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용의자를 대상으로 한 심문이라는 경험을 GPT로 구현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기획적 설계는 종합적으로 플레이어에게 '진짜 형사'가 되는 경험을 제공할 수 있었다. 플레이어에게 다소 부담이 되는 큰 역할이 부여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라이트하고 대중적인 게이머들에게는 다소 난이도가 있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추리게임의 코어 팬들에게는 전에 없던 몰입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GPT의 성능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여전히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엉뚱한 답변을 내놓기 일쑤였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인간형 캐릭터를 배제했고, 할루시네이션에 대한 경고를 게임 곳곳에 심어서 플레이어들이 납득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우리는 기획적 노력으로 언어 모델의 한계를 잡으려고 치열한 노력을 한 동시에, 한편으로는 하나의 믿음 또한 가지고 있었다. 언어 모델의 발전 속도는 어제와 오늘이 다른 정도로 빨랐고, 곧 '말이 되는 대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게임 오픈 직전 GPT-4o가 기적처럼 공개되었고, 오픈을 2주 앞둔 시점에 모델을 변경하는 것은 고민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어찌 보면 AI가 발전해가는 과정의 어느 지점에, 기획적 준비가 되어 있던 렐루의 Creative만이 해낼 수 있었던 게임이었다. 과도기이자 변혁기이기에 가능했던 절묘한 프로젝트다. 머지않은 시기엔 과감하게 인간형 캐릭터와도 본격적인 인터랙션이 가능한 게임들이 쏟아질 것이라 조심스레 예상해본다.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진정한 동반자로서의 AI NPC는 렐루의 손에서 탄생할 준비를 마쳤다.
<스모킹 건>은 렐루가 AI 기술을 게임에 도입한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는지 보여드린 작품이다. 추리 장르에 필요했던 강한 몰입의 경험을 끌어올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정말 감사하게도 Unity Award, 이달의 우수게임 등 많은 곳에서 게임의 작품성과 의미를 인정해주었고, 스팀에서 유저 긍정 평가 또한 97%를 기록할 수 있었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