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씨는 분할 목적이 ‘사업의 전문성 향상 및 핵심 경쟁력 강화’에 있다고 밝혔다. 사업 부문별 특성에 맞춰 ‘신속하고 전문적 의사 결정이 가능한’ 지배 구조를 확립하고 각자 전문 영역에 역량을 집중해 경영 위험을 분산한다는 부연도 뒤따른다.
다만 모두가 이 설명을 오롯이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엔씨 노조는 이달 초 ‘일방적 분사 계획 철회’를 촉구하는 성명을 내고 “효율화, 투명화, 책임감을 높이는 방향이라 해놓고 기존 업무를 없앤 뒤 각자 업무를 찾아내라 했다는 점에서 해고를 목적으로 하는 분사가 아닌지 합리적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해고 목적’ 아니냐는 의심에는 근거가 없지 않다. 이번 분사 이슈 이전에 이미 ‘경영 효율화’ 기조로 대규모 권고사직 프로그램이 진행됐다는 사실이다. 지난달 9일 엔씨 박병무 공동대표는 온·오프라인 설명회를 통해 “회사가 효율적으로 가고,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속적 경영 효율화 작업이 필요하다”며 인원 감축의 취지를 직접 밝혔다.
그렇다면 실제 권고사직 프로세스는 원활히 진행되었을까. 디스이즈게임에서 접촉한 엔씨 관계자는 “대상자 500여 명 중 수용한 사람은 수십 명 규모”라고 밝혔다. 연차 오랜 직원이 많은 데다 이직 시장 또한 차가운 상황이라 대부분 수락을 꺼린 것 같다는 설명이다.
수락률이 워낙 낮았던 탓에 권고사직의 대상 및 조건도 계속 변경되었다. 처음엔 주로 비개발 직군을 대상으로 했던 제안이 점차 다른 직군으로 확대되었고, 위로금 규모 역시 3개월 치, 6개월 치 등으로 늘다가 종국엔 1년치까지 확대됐다. 모 매체에서 ‘업계 내 보기 드문 수준’이라며 높이 평가했던 위로금 책정의 전말이다.
한편 분사 계획 또한 노조의 강한 반대에 부딪힐 전망이다.
엔씨 노조는 28일 직원들에게 전하는 자체 소식지에서 “NANO(엔씨 사내 SNS)에 분사 공지가 뜨자마자 단 하루 만에 400개가 넘는 반대 댓글이 달렸다. 수많은 엔씨인(人)들이 지금 경영진이 하려는 분사는 잘못되었다고 한목소리를 내주셨다”며 “이제는 온라인을 넘어 세상 밖으로 나아간다. 회사는 답을 해야 할 것”이라고 적었다.
엔씨 사내 SNS에 올라온 분사 공지에 달린 반대 댓글 중 일부 (출처: 엔씨 노조)
엔씨 직원들이 권고사직과 분사를 거부하는 배경에는 기업 위기에 대한 ‘임원진 책임론’도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엔씨의 상명하복식 기업문화는 외부에도 일부 알려져 있다. 지난 2022년 타운홀 미팅(내부 간담회)에서 한 부사장이 “개발자의 아이디어가 돈이 안 돼서 컷(취소)하는 것이 아니다. 본인이 만들거나 제안한 게임이 ‘노잼’이어서 그런 결과가 나온 것 아닌지 생각해 보라”고 발언한 일화가 보도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본지 또한 노조 지회장 인터뷰를 통해 엔씨의 경직된 기업 문화를 파헤치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가 사실이라면 기업 내 중요 의사결정은 대부분 임원급 이상이 내린 것이 된다. 그럼에도 운영 실패의 책임은 주로 직원들에게 물으면서 불만이 나온다고 관계자는 전했다.
물론 엔씨 임원들이 고통 분담에 전혀 동참하지 않은 건 아니다. 실제로 김택진 대표의 2023년 급여가 전년 대비 41% 줄어든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게임업계를 통틀어 가장 많은 72억 원 수준이어서 불만을 잠재우기엔 역부족일 듯하다. 동일 기간 엔씨의 영업이익은 75.4% 줄었다.
하향식 의사결정의 문제는 <TL> 등 회사의 명운이 걸린 최근 프로젝트에서도 여전히 발생했다. <TL> 내부 테스트 이후 사내 ‘널 게시판’(익명 게시판)에 직원들의 피드백에 상당량 올라왔지만, 이중 실제로 프로젝트에 반영된 사항은 전혀 없었다는 것.
엔씨의 한 관계자는 “현재 <TL> 팀이 유저 의견을 반영해 열심히 게임을 고치고 계신 것으로 안다. 그런데 그 개선사항들은 모두 사내 테스트에서 이미 다 지적되었던 것들”이라고 전했다. 한편 해당 익명 게시판은 최근 사라졌다. 그러자 직원들의 의견 개진도 함께 중단됐다. 관계자는 “이것이 우리 기업의 문화를 잘 대변하는 예시 같다”고 이야기했다.
<TL> 운영진은 유저와 활발히 소통하며 게임을 수정하고 있다.
현재 엔씨는 <TL> 글로벌 서비스, <배틀크러쉬>, <호연> 등 신작들을 출시했거나 준비 중인 상태다. 하지만 이들이 과연 재도약의 발판이 되어줄 것인지를 두고는 다소 전망이 엇갈린다.
먼저 아마존 게임즈와 함께 글로벌 서비스를 준비 중인 <TL>은 선행했던 국내 서비스의 성과가 좋지 못해 우려를 안긴다. 대다수 경쟁 MMORPG를 상회하는 그래픽 퀄리티와 전반적 마감은 호평이지만, 단체 콘텐츠에 대한 부담감, 액션성 부족, 올드한 게임 디자인 등이 단점으로 꼽힌다.
27일 출시한 탑다운 대전게임 <배틀크러쉬>에 대한 초기 시장 반응도 좋지 못하다. <배틀크러쉬>는 좁아지는 전장에서 여러 플레이어가 동시에 싸우는 무료 온라인 타이틀로서 캐주얼 게임성으로 폭넓은 소비자층을 타게팅하고 있다. 다만 차별화된 매력 제시에 실패한 것인지 반응은 미적지근하다. 28일 오후 스팀에서의 평가는 전체 691개 리뷰 중 추천 41%에 그친 상태다. 물론 최근 평가 반전에 성공한 <디아블로 4> 등 스팀의 부정 반응을 운영을 통해 극복한 사례들이 있는 만큼 향후 지켜볼 필요는 있다.
마지막은 기존의 ‘프로젝트 BSS’에서 제목을 바꾼 <호연>이다. <블레이드 앤 소울> 세계관의 캐릭터 수집형 RPG <호연>이 넘어야 할 최대 난관은 강력한 경쟁작이다. <호연>은 하반기 출시 예정이어서 7월 출격하는 호요버스의 신작 <젠레스 존 제로>와의 정면 경쟁을 피할 수 없다.
한편 <젠레스 존 제로>는 서브컬처계 최대 히트작 <원신>의 호요버스가 만든 신작인 만큼 열렬한 시장 반응을 얻을 것으로 전망된다. 실제로 수차례 플레이 테스트에서 몇 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압도적 연출력 등에 힘입어 전반적으로 호평받은 바 있다. <호연>의 콘텐츠 디테일은 아직 많이 공개되지 않았지만, 그 성패는 트렌드에 예민한 모바일 서브컬처 장르를 운영하며 얼마나 기민하게 움직이느냐에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금 엔씨 사내에서는 <호연>이 MMORPG 일변도였던 회사의 포트폴리오를 다르게 만들어주는 한편, 유저의 여론을 회복시킬 것이라는 기대감과 박병무 공동대표 취임 이후로 진행 중인 구조조정에 대한 위기의식이 함께 감지되는 것으로 보인다.
본지가 접촉한 다른 관계자는 "<호연>까지 안 되면 추가적인 구조조정이나 야구단(엔씨 다이노스)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다"며 판교 내 분위기를 전했다. 그럼에도 지난 2월 엔씨는 실적발표에서 <아이온 2>의 2025년 출시, 약 1조 9,000원 규모의 M&A 및 부동산 투자 등을 타개책으로 제시한 바 있다.
(출처: <호연> 홈페이지 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