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도 실력’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실제로 실력 좋은 이들이 유독 좋은 운때까지 만나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우리는 주변에서 꽤 흔하게 본다.
자주 제기되는 해석 중 하나는 이렇다. 안목과 실행력이 뛰어난(=실력이 좋은) 사람은 타인이 놓칠 법한 기회를 더 잘 발견하고 또 활용한다. 보통은 한두 번이나 겪을 법한 기회를 곁에서 자주 누리고 있으니, 대충 보면 운으로 비치기 좋다. 하지만 평소의 역량과 노력으로 일군 결과다.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은 이런 통찰을 조금 더 직접적으로 담고 있다.
글로벌 게임 산업이 움츠러드는 와중에도 올해 게임스컴은 자체 기록을 경신하며 세계 최대 게임쇼로 자리매김했다. 코로나 19 이후 E3의 몰락, 시장 한계를 느낀 동양권 게임사들의 서양 진출 본격화 등 이들에게 ‘호재’였을 팩터는 많다. 하지만 게임스컴이 그간 혁신을 게을리했다면 공중에 흩어졌을지도 모르는 기회다.
올해 게임스컴에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소니, 닌텐도 등 기존 ‘큰 손’들의 불참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이들의 부재는 새롭게 콘솔·패키지 게임에 손을 뻗친 한국과 중국 게임사들에 의해 알맞게 채워졌다.
먼저 중국 퍼블리셔들의 적극 참여가 눈에 띈다. 텐센트 소유의 펀콤은 <듄 어웨이크닝>, <패스 오브 엑자일 2>, 넷이즈는 <마블라이벌즈> 등 서구권 취향의 대형 타이틀을 들고나와 좋은 현장 반응을 얻었다.
한국 게임사들은 이번 게임스컴의 다크호스다. 잔잔했던 라이프시뮬레이션 장르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크래프톤의 <인조이>, 펄어비스의 오랜 야심작 <붉은 사막>, 기대 이상의 액션성으로 화제를 모은 <카잔> 등 작품은 모두 긴 대기열을 형성하며 전시 참가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소니, 닌텐도와 비교해 ‘기대감 마케팅’의 필요성이 더 절실한 Xbox의 참여 또한 게임스컴 측에서 두 손 들어 환영했을 호재다. 하드웨어 고정 팬층이 두꺼운 두 경쟁사들에 비해 Xbox는 구독 서비스 가입자 규모를 지속 확대해야 하는 시급한 미션을 안고 있다.
Xbox는 곧 출시할 베데스다 대작 <인디아나 존스>, 새로 합류한 블리자드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내부전쟁>, <디아블로 4: 증오의 그릇> 등으로 위세를 과시했다. 아직 공개 가능한 내용이 별로 없는 <둠: 더 다크 에이지>, <어바우드>까지 다소 무리하여 끌고 나와 대세감 형성에 동원하는 모습도 보여줬다.
마지막으로 게임패스 입점 파트너사들의 타이틀까지 종합적으로 핸들링하면서, 플랫폼 홀더로서의 달라진 자기 인식을 확고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여기에는 게임스컴 어워드 다수 부문을 휩쓴 <리틀 나이트메어 3>, 시리즈 팬들의 기대를 모으는 <스페이스 마린 2>, <스토커 2>, <포트나이트 페스티벌> 등이 포함됐다.
이 외에도 거물급 타이틀을 준비 중인 전통의 강호들, 혹은 새롭게 기대감을 부풀리고 있는 신예들도 참여해 행사의 내실을 채웠다. 2K의 <문명 7>, 유비소프트의 <스타워즈 아웃로>, 캡콤의 <몬스터 헌터 와일즈>, 워호스의 <킹덤 컴 딜리버런스 2> 등 기대작들은 비록 현장에서의 반응이 엇갈리기는 했으나 전부 모객에 큰 도움을 준 것만은 분명하다.
올해 게임스컴 방문객은 총 120개국 출신의 33만 5,000여 명으로 역대 최고 수치를 기록했다. 64개국 1,462개 기업이 전시에 참여했고, 해외(독일 외) 기업 비중은 71%에 달하는 등 글로벌 이벤트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그런데 게임스컴 디렉터 팀 안드레스에 따르면 일반 관객 중 독일 외 국가 출신자의 비율은 통상 10% 정도다. 실제로 현장에서 확인한 바 대부분의 현장 이벤트가 독일어로 진행되고 동양인 관람객의 비율이 현저히 낮은 사실이 쉽게 확인됐다. 적어도 B2C 측면에서는 다분히 ‘로컬’한 행사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 독일 게임시장의 규모는 유럽 내 1위지만, 영국을 잠시 유럽에 다시 포함시키면 2순위로 밀린다. 게다가 이번 게임스컴에 적극 참여한 중국, 일본, 한국 등 동아시아 3국의 자국 게임시장 규모는 모두 독일을 앞선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 관객 위주의 오프라인 행사에 전 세계 게임사들이 앞다투어 부스를 내는 상황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게임스컴이 가진 특유의 경쟁력을 감안하면 상당히 수긍 가는 면모가 많은 선택이다.
동양인 관람객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안드레스 게임스컴 디렉터는 행사가 지속해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게임스컴의 폭넓은 스펙트럼을 꼽았다. 게임계 변화 트렌드에 맞춰 게임 씬을 구성하는 모든 트렌드를 아우르기 위해 계속 변화를 꾀하고 외연을 확장했다는 것.
그 대표적인 증거가 바로 ‘오프닝 나이트 라이브’(ONL) 등 게임스컴이 보유하고 있는 강력한 온라인 플랫폼이다. 게임스컴은 ONL 외에도 게임스컴 인디, 게임스컴 스튜디오 등 여러 온라인 방송을 마련하고 있으며, 올해 이들 채널의 총조회수는 3억 1,000만 회에 달한 것으로 전한다.
이 중에서도 대형 게임들의 월드 프리미어(최초공개)가 다수 진행되는 ONL 행사는 같은 역할을 하는 더 게임 어워드(TGA)나 서머 게임 페스트(SGF)와 더불어 세계 게이머들의 연중 주요 방송 이벤트로 떠오른 상황이다. 올해 ONL의 시청 횟수는 4,000만 회에 이른다.
주목할 사실은 게임스컴이 ONL을 처음 런칭한 것이 지난 2019년이라는 점이다. 코로나 유행으로 오프라인 행사들이 온라인으로 부랴부랴 이행하기 이전 시점이다. 같은 해 3월 소니가 자체 온라인 행사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를 시작했던 것을 고려할 때, 실제로 업계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으로 볼 만하다.
코로나 19로 인해 온라인이라는 플랫폼에서도 강력한 입지를 다진 게임스컴은 글로벌 주목도 역시 크게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입증하는 사례 중 하나가 다름 아닌 2022년 게임스컴 어워드 3관왕에 오르며 주목을 받은 네오위즈의 <P의 거짓>이다. 당시 대다수 해외 게이머는 물론 일부 외신조차 네오위즈를 낯설어하는 반응을 보였던 점에 비춰볼 때, 게임스컴이 <P의 거짓>의 글로벌 인지도 향상에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음은 자명해 보인다.
전 세계 4,000만 명이 한국 게임사들의 신규 타이틀에 눈길을 줬다는 얘기가 된다.
이후 게임스컴에서의 노출을 기반으로 다양한 마케팅을 진행한 <P의 거짓>은 (해외에서는) 인지도가 낮은 게임사의 소울라이크 신작이라는 패널티에도 불구하고, 게임의 매력과 퀄리티를 효과적으로 세계 팬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다.
이런 추세는 올해 게임스컴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자국에서의 규제로 해외 활로를 찾고 있는 중국, 그리고 글로벌 히트에 목마른 한국 등 기업들이 게임스컴을 전략적으로 찾고 있다. 서양 진출, 더 나아가 글로벌 진출의 교두보로 게임스컴을 테스트하고 있는 현재 상황은 우연이나 운의 결과만은 아닌 듯하다.
게임스컴이 글로벌 게임 소비 침체, 게임사들의 연이은 구조조정, 생성형 AI의 보편화 등 앞으로 다가올 조류에도 효과적으로 적응할 것인지 지켜볼 만하다.
게임스컴이 글로벌 게임 소비 침체, 게임사들의 연이은 구조조정, 생성형 AI의 보편화 등 앞으로 다가올 조류에도 효과적으로 적응할 것인지 지켜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