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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KBS 다큐멘터리 '더 게이머', 허전하지만 즐거운 추억 여행

재미는 있지만 어딘가 빈 곳이 보이는 모자이크 '더 게이머'

에 유통된 기사입니다.
김재석(우티) 2019-12-23 15:04:48

22일 저녁, KBS 1TV에서 다큐멘터리 <더 게이머>가 방영됐다. <더 게이머>는 <스타크래프트>와 함께한 한국 e스포츠의 태동과 PC방, 프로게이머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방영 전부터 건전 비디오 광고를 패러디한 예고편으로 주목받았으며, 과거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의 영광을 함께 했던 유명 인사들을 인터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기대감을 높였다.

 

 

 

# 공영방송 KBS의 <더 게이머>, 사회문화적 맥락으로 e스포츠 탄생 설명하다

 

공중파에서 '3연벙'부터 광안리 결승전까지 보다니 격세지감을 느꼈다. 2003년 <아침마당>에서 '게임 중독'을 주제로 임요환 선수를 불러놓고 조직 폭력배와 커넥션이나 "PK를 하면 살의를 느끼는지" 물었던 KBS 아닌가.

 

다큐멘터리는 프로게이머들이 영광의 무대에 오르면서 얼마나 모진 풍파를 겪었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들이 겪었던 고난의 기저에는 e스포츠, 프로게이머에 대한 보수적인 시선이 있었고, 이를 단단히 하는 데에는 공영방송의 몫이 컸다. 그런 점에서 <더 게이머>는 공영방송 KBS의 반성문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더 게이머>는 e스포츠 판이 깔리기까지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짚었다는 점에서 박수를 보낸다.

 

 

IMF 이후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 평생직장의 신화가 깨지고,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PC방을 차리고, 거기엔 손님이 모인다. PC방은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을 서비스하고, 젊은이들은 PC방에서 시간을 보내며 <스타크래프트>를 즐긴다. <스타크래프트>에서는 배틀넷에서 자기 기량을 뽐냈다. PC방 대항전과 단위 대회가 열리고, 이기석과 임요환이 탄생한다. 판이 커지면서 '프로'가 생기고, 열악한 환경에서 훈련하던 프로게이머들은 대기업의 스폰서까지 받게 된다.

 

설득력 있는 분석이다. 공영방송에서 이 주제로 이렇게 이야기된 적은 드물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이 있었다면, PC방 인프라스트럭쳐가 완성되기 위한 필수조건이었던 초고속 인터넷의 보급이 살짝 언급만 되고 지나간다는 것이다.

 

<스타크래프트>라는 매력적인 소프트웨어와 무료 배틀넷이라는 강력한 온라인 플레이 툴도 중요하지만,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김대중 정부가 적극적으로 ADSL을 밀지 않았더라면 PC방 생태계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다큐멘터리에 전길남 선생까지 나온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 깊은 이야기를 끌어내지 못한 아쉬움이 든다.

 

<더 게이머>에 출연한 전길남 명예교수

 

 

# 재미는 있는데 여백이 보이는 모자이크

<88/18>, <모던 코리아> 등 요즘 KBS 다큐멘터리는 공사의 자산을 유감없이 쓰면서 호평받고 있다. 아카이브실에서 잠자고 있던 옛날 영상자료를 꺼내어 정수를 추려내는 방식이다. 기존 'KBS 스페셜'에서 보여주던 것보다 빠른 호흡으로 과거 영상과 당시의 증인들을 교차로 등장시키면서 인터뷰이의 입을 빌어 시대를 설명하는, KBS이기 때문에 가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더 게이머>도 그렇다. 뉴스 화면, <개그콘서트>는 물론 문제의 <아침마당> 장면까지 그대로 등장한다. 온게임넷(OGN)에서 빌려온 것으로 추측되는 <스타> 리그 장면들도 나오는데, 화면 사이에 엄재경, 전용준 등 해설진, 임요환, 홍진호 등 프로게이머에 주훈 전 감독까지 등장한다. 중간중간 삽입된 애니메이션도 소소한 재미를 더한다. 그래서 <더 게이머>에는 작은 조각들을 모아 하나의 큰 모양을 이루는 모자이크 같은 재미가 있다.

 

그러나 모든 곳이 타일로 차있어야 할 모자이크에는 동양화에서 볼 법한 여백이 적잖이 등장한다.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에 질 나쁜 승부 조작이 부정적 모멘텀으로 작용했지만, 이 사건 하나만으로 <스타> 프로리그가 무너진 것은 아니다. 어떤 부분이 비어있었는지 간략하게 살펴보자.

 

승부 조작에 가담한 모 선수

<스타크래프트>는 오래된 게임이었고, 게임단을 후원하던 대기업들은 시간이 갈수록 소극적이 되어갔다. 인기 중계 채널은 문을 닫았는데, 블리자드는 <스타크래프트 2>로 방향을 돌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스타 2>는 <스타>가 아니었고, <리그 오브 레전드> 대회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임요환 선수가 아쉬움을 드러냈던 공군 ACE의 해산에도 복잡한 과정이 얽혀있다.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의 황혼에는 지금까지의 언급이 표면적일 정도로 복잡한 맥락이 들어있지만, 다큐멘터리에는 이런 부분들 드러나지 않는다. 짧은 다큐멘터리에서 어느 정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겠지만, 오직 승부 조작 하나로 <스타> 판이 흔들렸다 보기엔 어렵다.

 

 

# 너무 밝았던 <더 게이머>의 결말

국산 다큐멘터리를 볼 때면 문제 제기와 진행 과정은 탁월한데 결말 지점에서 얼렁뚱땅 마쳐버린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시리즈로 만들지 않고 50분 안팎으로 끊는 다큐멘터리를 볼 때마다 그랬는데 <더 게이머>도 그랬다.

 

승부조작 사건과 <스타> 리그의 몰락을 다룬 뒤, "승부 조작에도 불구하고 게임은 그 영역이 넓어진다"라며 직장인 게임 대회, <롤> e스포츠의 성공, 그리고 아시안게임 시범종목이 된 e스포츠 이야기를 했다. 결말은 지나치게 장밋빛이었고, 분량도 짧았다.

 


제작 일정을 감안하더라도, <더 게이머>는 '명암'의 '암'을 다루는 데 부족했다. 요즘도 2군 선수들이 '그때 그 시절' 수준의 대우를 받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게임은 기업의 프로덕트기 때문에, e스포츠에는 태생적 문제가 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기업이 싫으면 땡이다. 무엇보다 그리핀 사건으로 팬들의 불신과 우려가 커진 시점이다.

 

e스포츠의 올림픽 공식 종목 선정이 다수의 염원일 수 있지만,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의 뜻은 완강하다. 토마스 위원장은 "e스포츠 산업 자체가 이제 막 형성되고 있는 단계이며 선수와 규정을 아우를 통일 기구가 없다"며 e스포츠의 올림픽 종목 도입에 신중론을 펴고 있다. 아시안게임 공식 종목 선정도 100% 장담할 수 없다.

 

HGC가 어떻게 문 닫았나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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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분 분량으로 담지 못한 것 많지만...

이 일로 KBS가 게이머들에게 진 빚을 어느 정도 갚았다고 생각한다. <아침마당>에서 임요환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조폭 연루설을 해명하던 과거에서 <안녕하세요>에서 페이커가 아이돌과 배우 사이에서 수줍게 농담하는 오늘날로. 이것이 공영방송이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방식이 아닐까?

 

기자부터 열심히 꼬투리를 잡았지만, 어디서나 한계란 분명히 존재하는 법이다. 하나하나 따지기 시작하면 "다른 종목 이야기는 어디 갔냐?"부터 "문호준, 게구리는 도대체 왜 안 나오냐?"​까지 나올 말이 많을 것이다. 20년 넘는 역사를 50분에 정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더 게이머>는 즐거운 추억 여행이었다. 공영방송의 파급력은 대단하니 많은 이들이 추억 여행에 동참했을 것이다. ​TV에 나온 다큐멘터리는 단편이지만 제작진이 따로 유튜브 채널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후 유튜브를 통해 더 긴 인터뷰 영상을 만날 수도 있다.

 

영광의 역사를 이어나가고 있는 e스포츠 판의 올드비들은 이 다큐멘터리를 어떻게 봤을까? 마찬가지로 즐거운 추억 여행을 떠났겠지만, 거기서 그치면 안 될 것이다. ​그리핀 사건에 대한 재조사를 촉구하는 국민청원에는 21만 명에 가까운 이들이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