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순히 금을 넘긴다면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시드 마이어의 문명 V> (이하 <문명 V>) 속 ‘마하트마 간디’의 대사로 알려진 문장이다. 한때 지상파 방송 자막에 나올 만큼 국내에서 유명했던 ‘밈’이기도 하다.
사실 이 문장은 실제 대사가 아니다. 2010년 한 국내 유저가 <문명 V> 속 간디에게 협박당하는 스크린샷이 온라인에서 유행했는데, 여기 나온 문장이 각색돼 퍼진 것이다. 비폭력 무저항을 외쳤던 간디의 실제 행적이 무색하게 폭력성이 물씬 묻어난다는 점이 웃음 포인트였다.
<문명>의 간디가 이처럼 호전적 이미지로 통하는 현상은 본고장 미국에서는 훨씬 일찍 나타났다. 91년 발매된 <문명> 1편에서 간디는 종종 핵무기를 내세워 유저를 협박했다. 이 모습이 큰 충격과 웃음을 주었고 간디는 ‘핵 옹호자’가 되어버렸다.
간디의 호전적 행동이 더욱 우습고 이상하게 보였던 이유는 <문명>의 게임 특성 때문이다. <문명> 1편의 각국 지도자는 실제 인물의 성향을 얼마간 반영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팬들은 <문명> 간디가 지닌 호전성이 일종의 버그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 믿음을 최근 부정하고 나선 사람이 있다. 바로 시드 마이어 본인이다.
팬들 사이에 퍼져 있던 가설은 다음과 같다.
<문명> 1편에서 간디의 공격성 수치는 실제 인물의 이미지대로 0에 가까운 매우 낮은 값으로 설정됐다. 그런데 게임 후반부에 간디가 지도자 공격성을 더욱 낮추는 ‘민주주의’ 등 국가정책을 선택하면, 수치가 마이너스 값으로 떨어졌다.
이때 언더플로(underflow) 버그가 일어나 공격 수치가 도리어 최대값으로 올라갔고, 간디는 핵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제작진도 간디의 이런 ‘이상행동’을 알고는 있었지만 팬들이 그 의외성에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버그를 내버려 두었다.
2020년 9월 8일 출간된 저서 <시드 마이어의 회고록!>(Sid Meier’s Memoir!)에서 시드 마이어는 ‘언더플로 버그’ 가설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하지만 이 경우 간디의 강한 호전성이 잘 설명되지 않는다. 다른 종류의 버그였을까? 아니면 개발자들의 장난이었을까?
마이어에 따르면 ‘간디가 유독 공격적’이라는 생각 자체가 팬들의 인식 오류였을 가능성이 높다. 회고록에서 그는 1편의 간디가 보였던 행동들을 다른 시각에서 재조명했다.
핵공격부터 보자. 간디가 게임 종반부에 핵공격을 가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이는 그렇게 ‘특이한’ 행동이 아니다. 1편의 모든 지도자 AI는 전쟁이 계속되면 종국에는 핵공격을 감행한다. 다만 실제 간디의 평화로운 이미지 때문에 똑같은 행동이어도 유저에게 유별난 일처럼 다가왔으리라는 것이 마이어의 추측이다.
그렇다면 간디가 툭하면 핵을 앞세워 플레이어를 협박한 이유는 무엇일까? 1편의 적 지도자들은 종종 외교 화면에서 ‘나의 말은 핵무기로 뒷받침된다’는 협박성 발언을 한다. 간디는 이 횟수가 잦았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간디의 전쟁회피 성향 때문이다. 협박은 진짜 전쟁을 피하면서 요구사항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간디의 호전적 이미지를 만든 마지막 요소는 게임 내 인도 문명의 과학중시 성향이다. 인도는 다른 문명에 비해 과학개발을 서둘러 핵개발이 월등히 빨랐다. 그렇게 앞선 과학력과 핵무기를 가지고도 주변의 뒤떨어지는 문명에 각종 요구사항을 내세웠다 보니 간디가 ‘쓸데없이’ 탐욕스러운 캐릭터로 비춰졌을 수 있다고 마이어는 풀이했다.
<문명> 개발진은 팬들의 이런 오해를 시뻐하지 않은 듯하다. 오히려 <문명 V>에서 간디의 핵 애호가 이미지에 부합하는 요소를 실제로 도입했다. <문명 V>에서 인도의 핵 선호 수치는 가장 높은 12다. 2위인 아즈텍, 러시아, 줄루보다 4만큼 높다.
시드 마이어 본인도 회고록에서 간디 밈을 향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실제로 잘 일어나지 않는 일이기는 하지만, 간디가 핵을 쏜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원초적으로 웃긴다.”
<시드 마이어의 회고록!>은 시드 마이어의 지난 40여 년 경력을 돌아보는 자서전이다. 한때 ‘세계 3대 게임 개발자’로 불렸던 전설적 인물의 개발철학, 게임 업계 역사와 플레이어 심리를 바라보는 그만의 관점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