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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나는 게임에서 ○○을 배웠다” (취재팀 편)

[스승의날 특집] 게임은 나의 스승 ②

정우철(음마교주) 2009-05-16 17:36:01

게임 개발자들이 게임으로 부터 다양한 진리를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TIG 취재팀 기자들은 어떨까요? 내심 게임전문 기자로 활동하면서 수양을 쌓은 내용을 기대했지만, 결과는 적절한 뻘에 가까웠습니다.

 

물론 삶의 희노애락부터 실생활에 필요한 지혜, 타이핑 스킬을 비롯해 학문까지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게임으로 배웠다는 것은 틀림 없습니다. TIG 기자들의 스승이된 게임들 무엇이고, 또 무엇을 배웠을까요? /디스이즈게임 취재팀, 정리=정우철 기자


 

나는 <DOAX> 원버튼의 진리를 배웠다. - 국서방

 

<데드 오어 얼라이브 익스트림 비치발리볼>(DOAX).

 

한글로 적자면 무려 17자나 된다. 영어로는 4글자. 여인네들이 수영복만 걸친 채 출렁출렁 거리면서 아양떨며 노는 이 게임이 내겐 많은 교훈을 준 게임이다. ‘수영복 입은 여인네’를 소재로 한 게임인데 주공략층이 남성이 아닌 여성이란 점에서 신선했다. 의도된 여성층의 공략인지 모르겠지만 비치발리볼을 포함한 대부분의 게임이 말그대로 ‘원버튼’ 조작이었다.

 

혹시 비치발리볼만 해도 리시브, 패스, 공격에 따라 강도와 위치 조절 등 다양한 조작이 필요할 텐데 무슨 원버튼으로 게임의 재미를 느낄 수 있냐고 따질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되묻고 싶다.

 

“해봤어? 해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말어~.

 

발매된 지 5년도 넘은 터라, <DOAX>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 본다. 남국의 섬 잭 아일랜드의 해변에서 비치발리볼 실력을 겨루는 이 게임은 모니터 너머의 파라다이스였다.

 

<DOAX>는 발판 건너뛰기, 블랙잭, 룰렛, 슬롯머신 등 다양한 게임을 통해 게임머니를 얻어 아이템을 치장하는 재미를 내세웠다. 하지만 유저의 입장에서는 ‘수영복’ ‘B 모핑’이라는 두 단어만 머릿속을 맴돌 뿐이다.

 

 

아, 처음 이 게임을 켰을 때가 생각난다. 인트로 영상마저 여인네의 살결이 넘실거리자 몰래 얼굴을 붉혔던 그 시절.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샜다.

 

아무튼, <DOAX>는 버튼 하나로 조작이 가능하다. 자기가 누르고 싶은 타이밍에 그냥 버튼 하나를 꾸욱 누르면 알아서 속공, 슬라이딩 리시브, 시간차 공격 등 다양한 모션을 구현한다. 그냥 버튼 하나만 누르면 된다. 남는 손 하나는 그저 거들 뿐. 다른 건 필요 없다.

 

버튼을 어떻게 누르든 당신이 상상한 그 이상을 맛볼 수 있는 게임이 <DOAX>. 누르는 맛이 제법 괜찮아 장시간 플레이도 가능하다.

 

요즘 캐주얼게임 개발사들이 가장 많이 고민하는 게 바로 직관적인 이해와 편리한 조작이다. 이런 부분에서 <DOAX>의 과장된 조작감이 주는 초보자들의 쾌감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었다. 플레이가 서툰 초보자도 조작의 맛을 빨리 알려 주는 게임이다.

 

그래서 정작 이 게임은 나보다 당시 여중생이었던 조카가 더 많이 즐겼던 게 생각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게임은 ‘청소년 이용불가’ 등급이었다.


 

나는 <WoW> 왕따가 뭔지 배웠다. - 음마교주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W). 사실 난 이 게임에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WoW>가 클로즈 베타를 시작할 당시와 오픈 베타를 시작할 당시, 주변에서 모두 <WoW>를 할 때 난 혼자 <DOAX>하면서 놀고 있었다. 혼자가 좋았다. 아니 혼자가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었던 게임을 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모두가 <WoW>를 할 때 난 그들과 다른 길을 걸었던 것만은 틀림 없었다. 어차피 온라인게임 그저 지나가는 한 때 였을 뿐이라는 게 당시 내 생각이었다. <WoW>를 하지 않아도 일상생활과 업무에 지장이 없을 테니까. <다크 에이지 오브 카멜롯>이 사무실을 습격했을 때도 그랬다.

 

하지만 <WoW>는 뭔가 달랐다. 나의 생활은 물론 업무생활에도 변화가 생긴 것이다. <WoW>를 하는 자, 귀여움을 받았다. 아이템을 바치거나 퀘스트에 도움을 준 사람, 혹은 뒷치기하고 도망간 상대방이 어디에 있는 지 제보한 자도 점심을 공짜로 얻어 먹었다.

 

혼자 튀면 살아남기 힘든 것은 생태계와 인간계가 비슷하다.

 

어느 날 점심시간 때부터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챘다. 나 혼자 쓸쓸히 밥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히 같은 자리에 사람들은 있는데 내 입은 음식이 들어갈 때만 열렸다. 모두 약속이나 한듯 자연스럽게 <WoW>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고, 나 혼자 어울리지 못 했다.

 

분노했다. 이것이 ‘직장 내 왕따’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왕따에서 벗어나야 했다. 어느덧 6개월째 혼자 쓸쓸히 출퇴근 하고 밥먹고 하는 시간을 버텼다. 결국 나도 오픈베타 6개월이 넘머서 <WoW>를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왕따였다.

 

혼자 1레벨일 때 남들은 만렙 찍고 레이드를 다녔으니까. 사무실 사람들이 도와줄 것으로 생각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두 가지로 압축됐다.

 

“만랩 찍고 이야기 하셈.” 또는 “도적 풀~

 

결국 <WoW>에서도 왕따를 당했다. 그래서 혼자 해도 동반자가 있는 ‘사냥꾼’으로 다시 키웠다. 에픽 아이템으로 도배를 하고, 만랩을 찍고, 드디어 “나도 점심시간에 이야기에 낄 수 있어!”라고 생각했었다. 어리석었다.

 

그땐 이미 사무실 사람들은 전부 <WoW>를 접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당시 팀장은 ‘고려무사’였다는…….

 


 

나는 <리니지> 인생을 배웠다. - 환세르

 

솔직히 망설였다. 이 질문에 또 다시 <리니지>를 언급해 스스로 ‘린빠’임을 자처해야 되는 걸까. 아니면 많은 사람들의 눈이 있는 만큼 그래도 조금 멋드러져 보이는 <문명> 이나 <심시티>를 거론해야 할까.

 

뭐 조금은 멋드러지게 “훗~ 저는 이 두 명작 게임을 통해 사회에 대한 통찰력과 한 도시의 설계 기획에 대해 깊이 있는 배려심을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ㅅ-)

 

결론은 부제처럼 나의 이미지가 설령 ‘린빠’로 구축되어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단계에 돌입하게 되더라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러니 필자가 용기 내어 고백(?)하는 만큼 조금은 거부감이 들지라도 그냥 웃으며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

 

<리니지>를 통해 인생을 배웠다고 할 때, 필자는 인생의 초점을 다양한 감정과 경험에 맞췄다. 정말 <리니지>를 통해 다양한 경험, 그리고 감정을 알게 되었다. 처음으로 접해 보는 사냥터, 그리고 몬스터 등을 사냥하면서 두근 거리는 마음. 오늘은 어떤 곳을 또 모험하게 될까 하는 기대감. 현실에서 모험이란 꿈꾸기 어렵다.

 

개인적으로 상상의 나래를 자주 펼치던 나에게 <리니지>는 새로운 모험의 무대였다. 항상 같은 대답만 하는 NPC들로 이루어진 세계가 아니라 정말 살아움직이는 세계였기에.

 

공성전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는 시스템에서는 큰 목표를 향해 조직원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나아가야할지를 배웠고, 비록 성을 얻는 일에 실패해 슬픔을 느꼈더라도 함께 노력해 무언가를 준비한다는 공동체 의식을 배울 수 있었다.

 

한 장의 스크린샷에 사랑과 희망, 권력과 야욕, 배신과 충성, 전략과 전술 등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물론 약육강식에 대한 개념, 나아가 게임이라는 곳에서도 특정 권력, 그리고 힘에 대한 논리가 적용된다는 사실에 충격도 받으면서 말이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배움은 바로 ‘정’이다. 단 한 번도 얼굴을 보지는 못 했지만, 비록 게임에서만 알게 된 사람이었지만, 학력·직업·지역 등에서 전혀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었지만, 함께 게임을 했다는 기억 하나만으로도 같은 추억을 공유했기에 지금까지도 인간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해 말, 집으로 소포가 도착했다. 처음 보는 지역이고 보낸 이도 낯선 이름이었다. 소포를 열어 보니 정장 두 벌이 곱게 포장되어 있었다.

 

집사람도 시킨 기억이 없고 본인도 전혀 모르는 일이기에 잘못 배달되었다 싶어 보낸이 연락처를 전화를 걸어 보니, 6년 전인가 약 4개월 정도 함께 <리니지>를 했었던, 나이가 많아 말 수가 적었던 한 혈원 형이었다. 정장 소매점을 차리게 되었는데 문득 우리 군주 생각이 나서 보냈다고 하는데, 그 때의 기분이란….

 

번외지만, 잠시 사냥을 포기하고 게임 내 아이템을 사고 파는 장사를 통해 미시적인지만 경제에 대한 개념을 익힐 수 있었으며(물론 업데이트를 잘못 예측해 특정 물품을 사재기 했다가 쫄딱 망하여 좌절감도 배웠다), 믿었던 친구에게 계정을 빌려 주었는데, 아주 깔끔하게 털린 계정을 바라보며 인생무상을… (배신감이란 감정을 처절하게 배울 수 있었다. -_-)

 


 

나는 <삼국지2> 숫자 키패드를 배웠다. - 이터비아

 

나의 PC 게임 인생에 있어 한동안 숫자 키패드는 필요없는 사치품이었다.

 

숫자는 두 손으로 키보드 위를 치면 충분했고, 방향키로 위아래를 입력할 때 2칸을 건너는 것보다 1칸을 건너는 게 더 빠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 게임을 만나면서 나의 숫자 키패드에 대한 인식은 순식간에 바뀌게 된다. 바로 코에이의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 <삼국지2>였.

 

1990년대를 살아간 남자라면 반드시 해봤을 게임이 바로 <삼국지> 시리즈일 것이다. 그 중에서 친구의 권유로 <삼국지2>라는 게임을 접하면서 내 오른손의 인생은 바뀌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삼국지2> 전용 컨트롤러 입니다.(물론 거짓말…)

 

게임을 원활하게 진행하려면 숫자 키패드는 필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쓰기 시작했고, Insert 키는 Yes, Enter 키는 No라는 개념이 머릿속에 깊이 박혔다.

 

특히 여포를 꼬시기 위해 충성도를 깎거나 전쟁 중 배반이나 반란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오직 키패드 연타만이 느낄 수 있었던 재미였다. 덕분에 지금도 숫자 키패드의 입력 속도와 정확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러나 <삼국지3>로 넘어오면서 마우스 조작이 도입되면서 오른손에게 2배의 고통을 주었고 결국 난 다시 키패드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하지만 가끔 숫자입력에 키패드를 사용할 때, 오타없이 깔끔하게 입력하는 내 오른손을 보면서 <삼국지2>의 흐뭇한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나는 <대항해시대> 세계 지리를 배웠다. - 깨쓰통

 

지금까지 살면서 부모님으로부터 ‘PC 게임’을 선물 받은 적이 딱 한 번 있다. 바로 <대항해시대2>와 <대항해시대3> 합본팩이었는데, 이 게임을 선물 받은 이유는 간단했다.

 

필자가 3일 밤낮을 “지리 공부에 도움이 되니 사 달라” 라고 박박 졸랐기 때문이었다. (사달라고 조른 시점에서 이미 ‘선물’은 아닌 거 아니냐고 반문하는 거기 당신. 무서운 꿈을 꾸셨군요. 훗~ )

 

사실 거짓말은 아니었던 것이, 실제로 코에이의 <대항해시대> 시리즈는 전 세계, 특히 게임의 주 무대가 되는 유럽의 지리와 도시 이름을 외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교육부에서 인증하고 발행한 ‘대항해시대 공식 공략집’ 사회과 부도.

 

게다가 <대항해시대>는 정말 ‘뻔질나게’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교역을 하고, 전투를 하며, 스토리를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하다 보면 아주 ‘자연스럽게’ 지리 공부를 하게 된다.

 

모든 맵을 빠짐 없이 돌아다녀서 ‘세계 지도’를 완성시키는 것이 목표로 제시 되기도 한다.

 

물론 그렇다고 이 게임이 100% 완벽하다는 뜻은 아니다. 특히 ‘특산품’ 정보는 잘못 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일본의 특산품이 ‘은’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많은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다. (-_-;)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만약 <대항해시대>를 접하지 않았다면 포르투갈의 수도가 ‘리스본’ 이라는 사실은 지금까지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팡야>10년 간 미뤄 둔 삼각함수를 배웠다. - 한낮

 

고등학생 시절, 내가 가장 싫어하는 과목은 수학이었다. 어쭙잖게 철이 든 내 머리로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어째서 수학을 배워야하는 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역사나 국어 등은 그래도 당연히 알아야 하는 기본상식 정도로 여길 수 있지만 탄젠트나 코사인을 배워서 어디에 쓴 단 말인가.

 

그러나 당시 수학 선생님은 내 생각에 결코 동의하지 않으셨다. 선생님은 소풍날 일기예보가 맞을 확률, 과일가게 아저씨가 줄 수 있는 ‘덤’의 기대값 등을 구하는 공식을 알려 주며 수학이야 말로 언제나 실생활에 쓰일 학문이라고 강조하셨다. 물론 우리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특히 문과였던 나는 시험에도 나오지 않는 삼각함수와는 완전히 담을 쌓고 지냈다.

 

그러던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0년이 지나서 난생 처음으로 삼각함수 책을 펼쳤다. 이유는 바로 <팡야> 때문. 언제, 어떤 바람에서도 정확한 샷을 날리기 위해 탄젠트와 코사인을 이용하는 유저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다 보니 나도 어쩔 수 없이 함수를 배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수험생을 위한 팡야 공식 가이드북 수학의 정석. 물론 삼각함수 부분만…

 

게다가 하필이면 친구를 통해 게임을 위해 삼각함수 책을 빌리러 갔다는 소문이 고등학교 당시의 수학 선생님 귀에 들어가버렸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뻔하지 않은가.

 

선생님은 스승의 날을 맞아 옛 제자를 친히 불러 지금의 제자들 앞에서 ‘너희는 나중에 이렇게 되기 싫으면 미리 공부해라’는 교훈으로 삼으셨고, 제자는 하필 수학 선생님이 여고로 가신 것을 원망하고 한 시간 내내 여고생의 비웃음과 눈초리를 견디며 참관수업 아닌 참관수업을 했다는 훈훈한 뒷이야기.

 

사족이지만 그후 선생님께서는 친히 삼각함수 숙제(…)도 내주셨다. 사족에 사족을 덧붙이면 안하고 반년이 넘도록 버티다가 동네에서 우연히 만나 그 자리에서 문제를 풀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