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 프로젝트 레드, MS, EA, 에픽게임즈, 유비소프트, 테이크 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에 반대하기 위해 러시아 내 제품 판매 중단을 선언하고 나선 글로벌 대형 게임사들의 목록이다. 3월 4일 가장 먼저 결정을 발표한 CD 프로젝트 레드를 필두로 오늘 3월 8일까지 관련 성명이 이어지는 중이다.
러시아는 민간 거주지 폭격, 원전 공격 및 점령, 피난민 사살 등 비인도적 행위를 연속적으로 자행하면서 전 세계적 규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때문에 러시아에 대한 게임사들의 제재 움직임 또한 소비자들의 전적인 지지를 받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일각에서는 몇몇 뚜렷한 이유를 들어 기업들의 행보에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업계의 러시아 제재를 둘러싼 갑론을박을 알아봤다.
미덕 과시란 본래 개인이 ‘좋은 사람’으로 인식되기 위해, 실제 행동에는 나서지 않은 채 허울뿐인 도덕적 언행만을 일삼는 행위를 비판하는 용어다. 기업이 실질적 사회 환원은 등한시하면서 브랜드 관리와 마케팅에서만 도덕 가치를 내세울 경우에도 이 용어가 종종 사용된다.
게임사들의 러시아 제재 결정을 알리는 소식에 일부 유저들은 이 또한 ‘미덕 과시’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나섰다. 폭락하고 있는 루블화 가치와 세계 시장 전반의 반러 분위기로 인해 내린 불가항력적이고 상업적인 결정을 우크라이나에 대한 인도적 지지로 포장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또한 이번 제재 동참 기업 중 상당수가 중국 내 소수민족 인권 탄압이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심지어는 러시아의 2014년 우크라이나 돈바스 침공 등 기존의 여러 인권 문제에는 침묵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반면 우크라이나 전쟁은 다른 사건들과 비교해 더 강하게 부각됐다는 이유로 이전과 다르게 대중의 환심을 사기 위한 ‘이슈 챙기기’에 나섰다는 것이다.
그러나 권역 내 판매 중단은 장기적 고객-기업 관계 단절 리스크를 내포한다는 점, 그리고 실질적인 우크라이나 지원을 병행하는 기업들도 있다는 점에서 ‘말만 앞세우는’ 미덕 과시 행위와 구분되어야 한다는 반대 의견도 나온다.
일례로 MS는 난민 구호 지원과 우크라이나 정부 사이버 보안 강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액티비전 블리자드는 직원과 회사가 함께 민간인 구호 기금을 조성, 전달했고, 2차 지원을 위해 추가 기금을 마련 중이다.
또한 현 상황은 기업은 물론 각국 정부까지 분명한 입장 표명을 요구받고 있는 이례적으로 엄중한 사안이라는 사실도 고려 대상이다. 유엔 총회에서는 러시아, 북한 등 5개국을 제외한 141개 국가의 압도적 지지로 러시아 즉각 철군 결의안이 채택된 바 있다.
마지막으로 러시아 제재에 나선 게임사 대부분이 미국 기업이라는 점도 주목할 부분. 미정부가 러시아 성토를 진두지휘하는 현 상황에서 이들이 해당 기조에 반대하기는커녕,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기조차 쉽지 않았으리란 분석이다. 게임 업계가 아니더라도, 디즈니, 파라마운트, 유니버설, 인텔, 넷플릭스 등 미국 기반 대형 엔터테인먼트, IT 기업들이 각자 나름의 제재안을 들고나온 상태이기도 하다.
게임사들의 러시아 제재와 관련한 또 다른 쟁점은 전쟁에 큰 책임이 없는 러시아 민간인들에 돌아가는 부수적 피해다. 국내 게임사의 러시아 제재 현황을 살피는 기사에 한 독자는 “이러한 제재에 반대한다. 죄 없는 민간인들에 피해가 돌아간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게임사들이 내세우는 제재 동참 사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게임 판매 중단이 러시아 내 전쟁 반대 여론을 강화하리라는 기대를 기저에 두는 경우가 많다.
적극적 소셜 네트워크 활동으로 전 세계 IT 기업들의 대러 제재를 끌어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미하일로 페도로프 우크라이나 부총리는 게임사들의 제재 참여를 촉구하는 글에서 “대러 제재가 러시아 시민들이 부당한 군사 공격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도록 하는 동기를 유발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한 바 있다.
CD 프로젝트 레드 역시 ‘여론전 동참’ 취지를 밝혔다. 러시아 내 판매 활동 중단을 공지하는 성명에서 이들은 “우리는 국가 문제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정치 조직이 아니며, 그러한 조직이 될 의향도 없으나, 상업적 조직 역시 연합한다면 보통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에 영향을 줄 힘을 지닌다고 믿는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것이 러시아 내 반전론자들의 사기를 꺾는 역효과를 낳을 가능성도 없지 않아 보인다. 현재 전쟁에 반대하는 러시아 시민들은 이미 정부로부터 강력히 탄압받고 있기 때문이다. 평화적인 가두행진에 동참한 아동들이 유치장에 갇힌 영상이 공개되는가 하면, 7일 기준 러시아 50여 개 도시에서 4,000명 이상의 반전 시위자들이 정부에 의해 과잉진압 끝에 체포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러시아가 강력한 언론 통제로 자국민들의 전쟁 관련 정보 습득을 제어하는 상황에서, 외부 세계에 의한 민생 압박은 러시아 시민들의 경각심을 일깨울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최근 러시아 도즈디TV 등은 방송에서 ‘침공’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강제 폐쇄당했다. 더 나아가 러 정부는 전쟁 관련 ‘가짜뉴스’ 통제를 명분으로 앞세운 언론법을 신설, ‘가짜뉴스 유포자’에 최대 15년 징역 선고를 가능하게 했다. 이에 관련 소셜 미디어 활동이 제약됨과 동시에 BBC, CNN, ABC 등 서방 매체들의 러시아 내 뉴스 보도까지 중단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