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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美 서평지의 '하데스' 평론…탈출할 수 없는 생의 의미에 관하여

미국 서평지 LA 리뷰 오브 북스 평론

에 유통된 기사입니다.
방승언(톤톤) 2022-12-20 18:08:52

※ 본 기사는 <하데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데스>는 2020년 출시한 슈퍼자이언트 게임즈의 액션 로그라이트 타이틀이다. 명계의 왕 ‘하데스’의 아들 자그레우스가 지상에 거주하는 어머니 페르세포네를 만나기 위해 철통같은 보안을 뚫고 지옥에서 탈출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장르 문법에 맞춰 주인공 자그레우스는 탈출 시도 중 무수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그때마다 하데스가 사는 지옥 최하층의 집으로 돌아와 전 과정을 반복한다. 이때마다 자그레우스는(그리고 플레이어는) 이전보다 조금씩 강해져 결국엔 마지막 출구를 막아선 아버지 하데스를 쓰러뜨린 뒤 지상의 빛을 보게 된다.

 

게임을 처음 플레이하는 유저라면 1회 탈출이 곧 게임 클리어일 것이라고 상상하기 쉽다. 그런데 첫 탈출에서 어렵사리 만난 페르세포네와 자그레우스는 그저 잠깐의 대화를 나눌 뿐이다. 자그레우스는 ‘지옥 출신’의 운명을 끊어내지 못한 채 스틱스강에 붙잡혀 다시 지옥으로 돌아온다.

 

이때 해금되는 도전과제의 이름마저 얄궂다. ‘탈출은 없는가?’ (Is There No Escape?) 게임의 ‘진엔딩’까지 플레이한 유저라면 이 질문에의 답이 결국 ‘그렇다’인 것도 잘 알고 있다. 자그레우스는 끝내 지상에서의 삶을 누리지 못하고 다시 자신에게 주어진 장소로 돌아오는 절차를 반복하게 된다.

 

그렇다면 자그레우스는 자신을 둘러싼 굴레에서 끝내 ‘탈출’하지 못한 인물인 걸까? <하데스>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강력함을 이야기하는 게임일까? 12월 17일 미국의 서평지 ‘LA 리뷰 오브 북스’가 내놓은 <하데스> 평론은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 아래는 링크의 기사를 요약, 재구성한 것입니다.

 


 

# 죄르지 루카치: 소설의 이론

 

평론의 저자 비비안 램(Vivian Lam)은 <하데스>의 이야기 구조 파악을 위해 먼저 헝가리 문예이론가 죄르지 루카치(György Lukács)의 이론을 소개하고 있다. 저서 <소설의 이론>에서 루카치는 고대 서사시와 근대적 소설의 차이, 그리고 고대인과 근대인의 세계관(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차이를 설명한다.

 

고대는 개인과 세상, 개인과 사회가 서로 충돌하지 않고 잘 통합되어 있던 시대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자신만의 삶을 개척해 나가기보다는 세상이 부여해준 역할과 운명에 따라 사는데 익숙했다는 의미다. 물론 고대인들도 각자 선택을 내리며 살았지만, 이 또한 정해진 삶의 경로를 밟아나가는 과정에서 이뤄졌다.

 

루카치는 이를 ‘총체성’(totality)이라고 지칭한다. 서양 문학의 시작으로 여겨지는 호메로스의 고대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속 신화적 인물들을 통해 이런 총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램은 "헥토르와 아킬레우스는 예정된 죽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전투를 향해 나아갔다. 탁월한 지략으로 불운을 모면했던 '오디세우스'마저도 항상 예언 안에서 움직이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근대에 접어들면서 사회와 개인 사이의 연결은 느슨해지고, 끊어지고 만다. 주어진 운명에 따라서만 사는 삶이 거부되기 시작한 것이다. 개인이 바라보는 ‘실제 세상’과 ‘이상적 세상’이 분리되었다. 개인의 삶과 세상은 이제 예전처럼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가 아닐뿐더러, 이따금 서로 충돌한다.

 

루카치는 이런 불일치의 상태를 ‘초월적 실향’(transcendental homelessness)이라고 지칭했다. 총체성을 잃은 근대의 개인도 여전히 자신과 잘 맞는 세상, 즉 '고향'과 같은 세상을 계속 원한다. 하지만 현실 세계의 호전성과 무관심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그 세계에 도달하기 힘든 '실향민'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러한 실향의 상태를 그리는 것이 서사시와 구분되는 근대적 의미의 '소설'이 가지는 특성이다.

 

죄르지 루카치 (출처: 위키피디아)

 

 

# <하데스>의 서사시적 세계와 소설적 주인공

 

저자는 <하데스>가 ‘서사시적’ 세계와 ‘소설적’ 주인공 사이의 끝없는 충돌을 그린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신화를 재구성해 만든 <하데스>의 지옥은 고대 서사시의 세계처럼 인물의 역할과 정체성이 하나로 합쳐진 총체적 세상이다. 하데스를 포함한 지옥 구성원들의 역할과 목적은 모두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 이들은 정해진 위치에서 정해진 기능을 수행하며 살아가며, 바로 그렇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자그레우스는 총체성에 어긋나는 존재다. 아버지로부터 명계의 후계자로 인정받지도 못했고, 신으로서 관장하는 영역도 없다. 자그레우스는 지옥에서 자기 존재의 당위성을 스스로 의심하고 증명해야만 하는 인물이다.

자그레우스는 자신을 가두는 총체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세계를 찾아 떠나는 해결법을 선택한다. 그는 자신의 가치와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 세계로 무한히 나간다. 하지만 이 과정을 함께하는 유저들에게 게임이 던지는 질문은 잔혹하다. 결국 아무리 노력해도 탈출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데스는 새로운 가능성을 추구하는 자그레우스의 시도를 가로막는 힘을 상징한다. 따라서 그를 격퇴함으로써 주인공은 자유를 얻을 수 있어야 할 듯하다. 하지만 하데스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없다. 자신 역시 지옥을 떠날 수 없는 처지일 뿐이다.

실제로 게임을 아무리 플레이하고 하데스를 계속 쓰러뜨려도, 유저는 자그레우스를 완전히 이승으로 이주시킬 수 없다. 이러한 자그레우스의 상황에 대해 저자는 "결국 게임 <하데스>가 제시하는 해결법은 둘 중 하나인 것처럼 보인다. 시스템에 계속 도전하거나, 그저 체념하거나. 하지만 둘은 똑같이 무용할 뿐이다"고 말한다.

 

명계의 왕이자 자그레우스의 아버지 하데스

 

# 자그레우스가 영원한 굴레에 맞서는 방식

 

그런데, 정말로 자그레우스의 끊임없는 도전은 무익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저자는 자그레우스가 <하데스>의 지옥에 불러오는 변화에 관해 이야기한다.

거침없는 입담과 함께 적을 무찌르는 자그레우스의 첫인상은 강력하고 고고한 신이다. 하지만 게임을 더 오래 플레이해보면, 그를 대표하는 특성은 강력함보다는 선한 품성 쪽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주변 인물들에게 따듯한 말을 건네고, 소탈한 자기 비하 유머를 보여준다. 반항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변에 친구가 가득한 것도, 그가 신들의 총애를 받아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이런 본성 덕이다.

그런데도 자그레우스는 출생적 한계와 아버지의 태도로 인해 계속하여 자신이 지옥에 어울리지 못한다는 느낌 속에 살아간다. 게임은 자그레우스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고통, 다른 자아를 강요당하는 고통, 그리고 지금 처한 세상의 '좋은 점'마저 전부 포기한 채, 새로운 세상을 찾아 나서야 하는 고통을 그린다.

고통을 감내하며 지상으로 몇 번 나가다 보면 결국 자그레우스는 친모인 페르세포네를 설득해 다시 집으로 초청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나오는 엔딩곡 <인 더 블러드>의 가사는 사실 음울하다. 가사를 요약하면 이렇다. “당신은 어울리지 않는 세상에 태어났다. 자신의 운명으로부터 아무리 벗어나고자 한들, 그것은 당신 혈관 속에 흐르고 있다. 즉, 당신은 탈출할 수 없다.”

 

<하데스>의 첫 번째 엔딩

 

하지만 체념을 말하는 가사에도 불구하고 멜로디는 힘차다. 저자는 "자그레우스가 처음 떠나온 지옥과 현재의 지옥은 서로 다른 장소다. 자그레우스의 죽음들은 짧게 지속했지만, 그가 실천한 말과 행동의 결과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변화의 핵심에는 다양한 인물 간의 관계가 있다. <하데스>의 대사량은 30만 단어에 달한다. 게임의 진정한 목표가 그저 전투와 탈출이 아닌, 여러 캐릭터와의 친교, 더 나아가 관계 회복의 내러티브에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만한 대목이다.

실제로 게임 시스템상 지옥 주민들, 그리고 올림포스 신들과 친밀도를 쌓는 것은 게임의 ‘클리어’에 꼭 필요한 행위는 아니다. 하지만 게임의 줄거리를 끝까지 진전시키고 싶다면 필수적이다. 이는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부부가 올림포스 신들과 다시 재회하는 ‘진엔딩’에만 해당하는 얘기는 아니다.​

자그레우스는 그리스 신화 상에서 ‘열린 결말’로 끝났던 여러 인물의 뒷이야기를 완결시킬 수 있다. 연인이었던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 부부였던 오르페우스와 에우레디케가 다시 만나고, 시시포스는 영원한 형벌에서 벗어난다. 자그레우스 자신도 타나토스, 혹은 메가이라와 다시 연인이 되어 관계의 상처를 회복할 수 있다.

 

'진엔딩'에서 하데스와 올림포스 신들은 관계를 회복한다.

 

<하데스>가 지옥의 영원한 굴레를 통해 표현하고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 일견 혼란스러울 수 있다. 끝끝내 온전한 삶을 쟁취할 수 없는 닫힌 환경 속에서 기쁨을 찾으라는 권유는 모순적으로 다가온다. 심지어 진엔딩 이후 자그레우스는 지옥의 ‘보안 책임자’가 되어 지옥을 점점 더 탈출하기 어려운 장소로 만든다. 자신의 ‘수감 상태’를 강화하는 셈이다.

 

저자는 "그러나 <하데스>는 생존의 노력 자체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일종의 부조리극이다.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을 듯했던 관계를 회복하고 새로운 관계를 일궈내는 이야기이자, 당신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불합리한 시스템을 무너뜨리기 위해 무한히 도전하는 이야기다. 궁극적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할지언정 아끼는 이들의 문제를 완화해줄 수는 있는, 점진적 변화에 관한 이야기다"라고 전한다.

 

저자에 따르면 초월적 실향 상태의 해결법은 자신에 어울리는 세상을 찾아 평생을 바치는 것에 있지 않으며, 그러한 세상을 스스로 만드는 것에 있다. 그리고 자그레우스가 그러했듯, 탈출할 수 없는 상태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것이 그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