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게임시장에 크고 작은 충격을 준 게임은 많다. <엘든 링>이 프롬소프트웨어의 역대 흥행 기록을 갈아치웠다. <로스트 아크>가 서양권에서 ‘대박’을 냈다. <데이브 더 다이버>가 넥슨의 숨은 힘을 드러냈다. 전설적 개척 시뮬레이션 <드워프 포트리스>가 20년 만에 스팀에 입점하더니 6일 만에 30만 장 판매를 넘겼다.
<뱀파이어 서바이버즈>도 이들 게임에 견줄 만하다. 2021년 말 출시해 2022년에 적어도 250만 장 판매(4월 기준)됐고, 동시접속자 7만 명을 넘겼고, 각종 주요 언론에 보도되는 등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 게임은 이렇듯 ‘1인 개발 신화’를 다시 한번 썼다는 점 외에도 제작 과정과 흥행, 영향력 등에 있어 짚어볼 만한 구석이 꽤 있다. 시장에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낸 <뱀파이어 서바이버즈>가 던진 화두 3가지를 살펴봤다.
<뱀파이어 서바이버즈>는 이탈리아 개발자 ‘폰클’(Poncle, 본명 Luca Galante)이 웹 개발에 흔히 쓰이는 HTML, CSS, 자바스크립트, 그리고 2D 게임엔진인 페이저 3(Phaser 3)를 이용해 만든 게임이다. 상업 게임 개발에 있어 흔히 쓰이는 조합은 아니다. 실제로 ‘통상적 게임엔진’으로 갈아타는 것이 폰클의 2023년 목표 중 하나이기도 하다.
폰클은 원래 슬롯머신 게임 업계에 있었다. 휴직 중이던 2020년 <뱀파이어 서바이버즈> 개발을 시작해 약 1년 만인 2021년 12월에 얼리엑세스를 시작했다. 주요 개발 비용으로는 게임 아트, 배경음악 등 애셋 구매에 약 1,100파운드(약 160만 원) 정도가 들었다.
개발 규모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뱀파이어 서바이버즈>의 겉모습은 좋게 말해 단출하고, 나쁘게 말해 종종 엉성하다. 예컨대 기본 맵에서는 ‘복붙’된 잔디밭 타일이 그리는 격자무늬가 뚜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일부 폰트는 지나치게 확대하는 바람에 뿌옇게 보인다. BGM 역시 출시 초기에는 종류가 적어 여러 맵에서 같은 음악이 흘렀다.
그러나 소비자 중 <뱀파이어 서바이버즈>의 프로덕션 퀄리티를 진지하게 단점으로 지적하는 사례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비주얼과 음향의 세련미나 완성도는 비록 부족할지라도 게임플레이를 뒷받침하는 데는 한점 모자람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UI 적 측면에서만 바라본다면 영리한 시각적 아이디어를 여럿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피격된 몬스터가 하얗게 빛나는 이펙트는-이 게임에서 매우 중요한-무기의 효과 범위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몬스터, 경험치 보석, 적 투사체 등 상호 시각적 변별성이 필수적인 요소끼리 색상 톤을 뚜렷이 구분한 점도 눈에 띈다. 어딘지 힘빠지는(?) 주인공 피격 사운드는 조금 어색하지만 다른 소리에 전혀 묻히지 않아 효과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게 해준다.
게임의 프로덕션 퀄리티가 최신/첨단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궁극적 목표인 ‘재미’에 온전히 복무한다면 괘념치 않아 하는 태도는 이제 분명한 소비자 트렌드다. 레트로 그래픽의 꾸준한 인기 역시 그 증거가 된다. 당장 2022년 출시작 중에서도 PS1 시절 그래픽 스타일을 따라 만들어진 <시그날리스>, <글룸우드> 등 여러 게임이 사랑을 받았다.
이러한 담론은 트리플A의 지속가능성 문제로까지 확장해볼 수 있다. 경쟁적으로 올라가는 그래픽 퀄리티로 인해 트리플A 게임의 제작비는 해마다 많이 증가하는 추세다. 그러나 천문학적 제작비를 들이고도 정작 게임 기획상의 허점이나 타성적 반복으로 인해 투자한 만큼의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사례는 아주 많다.
반대로 명실공히 2022년 최고 게임에 등극한 <엘든 링>은 그래픽면에서만큼은 여타 트리플A에 미치지 못한다는 소비자 평가가 많다. 프로덕션 퀄리티와 게임 흥행 가능성이 반드시 양의 상관관계를 가지지 않는다는 점을 한 번쯤 숙고해볼 만하다.
현재 <뱀파이어 서바이버즈>는 모바일에서 무료 버전으로 출시한 상태다. 광고 영상을 시청하면 ‘1회 부활’ 등 게임플레이 보너스가 제공되는 BM을 가지고 있다. 1월 3일 폰클은 <뱀파이어 서바이버즈> 스팀 페이지에서 모바일 버전 출시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팬들에게 밝혔다.
설명에 따르면 폰클은 PC판의 흥행 직후부터 모바일 버전 출시를 함께할 비즈니스 파트너를 물색했으나 적당한 기업을 만나지 못해 이식을 미루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 <뱀파이어 서바이버즈>의 ‘무단 복제’ 게임들이 마켓에 다수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에 출시를 예정보다 빨리 단행하게 됐다는 것.
폰클은 “단순히 ‘<뱀파이어 서바이버즈> 같은 게임’이 아니라, 게임의 코드, 애셋, 데이터, 진척도 등을 1대1로 복제한 진짜 복제품(clone)들이 사방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모바일 버전 출시를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모방과 표절은 명확히 선을 그어 구분하기 어려운 문제지만 위 사례처럼 원본의 ‘복제’가 이뤄졌을 때는 이야기가 다르다. 자체적 창작 노력이 거의 투입되지 않은 복제품들이 원작의 유명세를 이용해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면 부당이익으로 볼 수 있다. 이를 막으려 실력행사에 나선 폰클의 대응도 온당해 보인다.
하지만 폰클에게도 유사한 '혐의'가 적용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만하다. <뱀파이어 서바이버즈>에 코나미의 <악마성> 시리즈에 등장한 것과 유사한 스프라이트가 다수 사용됐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게임의 폭발적 흥행 이후 이어진 언론 인터뷰에서 폰클은 이러한 도용 의혹에 대한 해명을 내놓았다.
설명에 따르면 폰클은 원래 게임 개발 과정 중 배경 설정이나 캐릭터 창작 등에서 어려움을 느꼈고, 이 때문에 프로젝트를 아예 중단하기 일쑤였다. 폰클은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임의의 애셋팩을 구한 뒤 게임에 무작위로 적용하면서 게임에 나름의 ‘분위기’를 부여해보는 시도를 했다.
외신 NME인터뷰에서 폰클은 “그러다가 <악마성> 시리즈에 영감을 받은 애셋 팩을 다운로드 받았다. 그 애셋들이 마음에 무척 들어 다른 모든 프로젝트에도 사용하게 되었고, 그래서 <뱀파이어 서바이버즈>에도 똑같이 적용했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악마성> 시리즈에 '영감'을 받았다는 문제의 스프라이트들이 실제 원본과 지나치게 유사할 수 있다는 염려는 없었던 것일까? 외신 PC 게이머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물론 얼리엑세스 단계에 앞서 해당 이미지들이 <악마성>에서 직접 복제된 것인지 여부를 검토했고,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폰클은 결국 <악마성> 팬들의 지적에 따라 <뱀파이어 서바이버즈>에 사용된 이미지 상당수를 교체한 바 있다. 직접적인 '복사 붙여넣기'가 아니었을 뿐, 상호 유사하다는 사실을 얼마간 인정한 셈이다. 인터뷰에서 그는 "어떤 이미지는 <악마성>을 지나치게 많이 연상시킨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일부 팬들은 이미지가 무단도용 된 것이라고 100% 확신하고 말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직접적 복제'만 아니라면 유사성이 높아도 문제 없다는 폰클의 당초 인식은 프로 개발자로서는 상당히 느슨해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아직도 <뱀파이어 서바이버즈>에 사용되는 이미지 중에는 <악마성> 시리즈의 스프라이트와 비교했을 때 그 유사성이 강하게 인식되는 것들이 남아있다.
또 하나 주목할 사실은 해당 문제에 소비자, 업계, 언론 모두가 상당히 미온적 반응을 보여왔다는 사실이다. '게임 메카닉'처럼 표절과 모방의 구분이 비교적 어려운 추상적 사례들에 비해 상당히 구체적인 근거들이 제시되었음에도, 이 문제는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다는 인상을 준다.
원인으로 짐작되는 사안은 많다. <악마성> 시리즈가 오래된 작품이라는 점, 원작자 코나미가 침묵하고 있다는 점, 코나미가 해당 사건으로 치명적 피해를 보지 않을 대기업이라는 점, 그에 대비하여 폰클은 1인 개발자라는 점, <뱀파이어 서바이버즈>와 <악마성>의 게임성이 확연히 다르다는 점 등이 있다.
더 나아가 <뱀파이어 서바이버즈>가 저렴한 가격 대비 풍성한 콘텐츠로 유저 친화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 논란이 충분히 확산하기 전 이미 <뱀파이어 서바이버즈>를 구매한 유저가 매우 많았다는 점 역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다른 게임이었다면 쉬이 넘어가지 못했을 논란을 높은 인기 덕분에 효과적으로 면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 봄 직하다.
<뱀파이어 서바이버즈>와 다른 2022년 흥행작과의 가장 큰 차이는, 이른바 ‘뱀서류’로 지칭되는 새로운 장르적 흐름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이다. <20 미니츠 틸 던>, <브로테이토>, <소울스톤 서바이벌>, <프로젝트 라자러스> 등 유사한 형식의 게임이 시장에 쏟아지는 중이다.
전에 없던 새로운 유형의 게임이 인기를 끈다고 해서 해서 언제나 이런 파급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뱀파이어 서바이버즈>는 어째서 일종의 장르로 굳어질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기에 앞서 ‘뱀서류’ 게임이 공통으로 참고하는 핵심 아이디어의 대부분이 사실 국산 모바일 게임 <매직 서바이벌>에서 왔다는 사실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두 게임의 연관성은 폰클이 직접 스팀 페이지를 통해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 있다. 그는 “<뱀파이어 서바이버즈>의 초기 프로토타입에 많은 영향을 줬다”면서 <매직 서바이벌>의 플레이를 유저들에게 권했다.
실제로 ▲탑 다운 시점 ▲자동 공격 시스템 ▲화면을 가득 채우는 적 무리 ▲경험치 구슬 획득을 통한 레벨업 ▲레벨업 때마다 주어지는 무기(매직 서바이벌의 경우 ‘마법’) 선택지 등 현재 ‘뱀서류’의 핵심 특징으로 꼽히는 요소 상당수는 <매직 서바이벌>에서 이미 확립된 것들이다.
이처럼 기존하던 메카닉을 다듬어 만든 게임으로 글로벌 히트를 기록해 새로운 트렌드를 촉발했다는 점에서 <뱀파이어 서바이버즈>의 사례는 <PUBG>사례와 겹쳐 보이기도 한다.
다만 ‘글로벌 히트’는 <뱀파이어 서바이버즈>(그리고 PUBG)가 하나의 지류를 형성할 수 있었던 여러 원동력 중 하나일 뿐이다. <뱀파이어 서바이버즈>가 장르로 굳어질 수 있었던 조금 더 궁극적 원인으로는 생산자 입장에서의 뛰어난 ‘투자 효용성’을 꼽을 수 있다.
일단 <뱀파이어 서바이버즈>의 게임 메카닉은 시장에서의 인기에 비해 그 구현 난도가 높지 않은 편이다. 진입 허들은 낮고 잠재적 수익성은 높은 사업 아이템이라면, 사업자가 몰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
또한 <뱀파이어 서바이버즈>의 간결하고 담백한 룰은 다른 개발자들이 각자의 테마와 아이디어를 접목해 차별화를 꾀하기에 알맞다. 중심 메카닉을 그대로 참고하면서도 적/맵 디자인, 전반적 아트, 무기/버프의 작동 방식 등을 다르게 조율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다른 게임’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현재 ‘뱀서류’ 게임들은 외계인, 로봇, 좀비 등 다양한 소재를 차용해 <뱀파이어 서바이버즈>(그리고 매직 서바이벌)와 사뭇 다른 분위기와 플레이 감각을 선사하고 있다. 이는 한편으로 ‘원작’과 구분되는 자체적 매력을 확보하는 판매 전략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제품 평판에 치명적일 수 있는 ‘표절 논란’에서 효과적으로 벗어나는 안전장치 역할도 함께 해준다.
마지막으로 막대한 원작의 인기 덕분에 ‘공짜 마케팅’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상품의 기본 특성을 소비자에게 이해시키고, 그 매력을 설명하는 것은 모든 마케팅의 근본적 숙제다. 많은 상업 영화와 게임이 특정 장르에 맞춰 제작되고 마케팅되는 것 역시, 이를 통해 제품 설명의 과정을 크게 축약하고 보다 직접적인 매력 어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르 자체가 시장에 새로 소개되어 화제 몰이를 하는 상황이라면 생산자 입장에서 눈길이 갈 만한 기회다. 상대적으로 낮은 제작 난이도 덕분에 도전에 따른 리스크가 작다는 점까지 감안한다면, 등장한 지 이제 갓 1년을 넘긴 ‘뱀서류’ 장르 게임이 지금처럼 다양하게 존재하는 이유 또한 수긍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