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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액션 게임 '앨런 웨이크 2'가 소설처럼 읽히는 이유

13년의 기다림을 잊게 하는 재미

에 유통된 기사입니다.
방승언(톤톤) 2023-10-30 19:21:48
그러고 보면 레메디는 줄곧 그래 왔다. 창립 초기부터 게임 외 전통 미디어들의 포맷을 게임 문법에 접합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90년대 액션 누아르 영화의 슬로우 모션 연출을 핵심 메카닉으로 썼던 <맥스 페인>, 호러 소설과 미스터리 TV쇼의 이야기 전개 방식을 모티브 삼은 <앨런 웨이크> 등이 그 예시다.

2019년 작 <컨트롤>의 경우 예외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잘 알려진바 <컨트롤>은 인터넷 창작 문화의 일종인 ‘SCP’에 영감을 많이 받았는데, SCP는 말하자면 불특정 다수가 참여해 만드는 피카레스크 소설이다.

SCP는 초자연적 위협을 비밀리에 확보·격리·보호하는 가상의 기관이다. SCP 공식 사이트에는 이런 설정에 입각한 ‘격리 보고서’들이 업로드되는데, 이는 실제 네티즌들이 작성한 것으로, 격리 대상의 특징과 관련 사건 등을 기술한다. 각각은 하나의 단편 소설로 볼 수 있다. 엄격한 보고서 형식을 따르지만, 그 안에 내러티브와 인물, 메시지를 담고 있다.


<컨트롤>의 핵심 소재는 SCP를 패러디한 ‘연방 통제국’(FBC)이다. FBC 본부가 초자연적 현상(AWE라고 불린다)에 잠식되어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다. 게임에는 각종 AWE 보고서가 등장, 게임플레이 힌트가 되거나 복선을 제시하거나, 분위기를 연출하는 등의 다양한 역할을 한다.

끔찍하고 무서운 현상을 무미건조하게 암시하는 SCP 특유의 우회적 묘사 방식이 게임의 감상을 풍부하게 한다. 예를 들어 ‘잠시라도 눈을 떼면 안 되는 냉장고’에 대한 보고서를 읽은 주인공의 귀에 “눈이 아파, 교대해줘”라고 울부짖는 NPC 목소리가 들려 오는 식이다. 텍스트 몇 줄과 간단한 장면 연출로 공포를 조성하는 이 영리한 장면은 이어지는 냉장고와의 보스전에 효과적으로 서스펜스를 부여한다.

<앨런 웨이크 2>는 레메디의 이러한 ‘미디어 융합’ 시도에 있어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타이틀이다. 이는 비단 레메디의 기존 업적을 능가한 것 이상으로, 액션 장르 전반의 텍스트 기반 스토리텔링이 지녀 왔던 한계를 창의적 방법으로 극복하고 있어 높이 평가할 만하다.




# <앨런 웨이크> 지난 이야기…

<앨런 웨이크 2>의 핵심 플롯을 제대로 이해하고 즐기려면 이전까지의 이야기를 잠시 살펴봐야 한다.

미스터리 TV시리즈 극본을 쓰던 작가 웨이크는 형사 ‘앨런 케이시’ 시리즈로 대대적 인기를 끌지만, 새로운 작품을 쓰고픈 욕망에 케이시를 사망 처리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로 이렇다할 작품을 내지 못하던 웨이크는  슬럼프 극복을 위해 아내와 함께 산골 마을 ‘브라이트 폴즈’의 ‘콜드론 호수’에 있는 별장을 찾는다.

여행을 계기로 재기를 꿈꿨던 웨이크 부부는 그러나 브라이트 폴즈에 오랜 기간 도사려 온 정체불명의 사악한 힘, ‘어둠의 존재’의 표적이 되고 만다. 어둠의 존재는 앨런의 아내 앨리스를 납치하고, 아내를 구하려 동분서주하던 웨이크는 사고로 한동안의 기억을 잃게 된다.

그리고 다시 깨어난 웨이크의 앞에는 기억에 없는 자신의 공포 소설 원고가 하나둘 나타난다. 심지어 원고의 내용이 눈앞에 현실로 펼쳐지는 기현상 속에서 웨이크는 사건의 전말을 알아내고자 분투한다.


작가 겸 디렉터 샘 레이크가 설명하는 이전 이야기

노력 끝에 이 또한 ‘어둠의 존재’의 소행이란 점이 밝혀진다. 앨런 부부가 방문한 콜드론 호수에는 창작물의 내용을 현실로 만드는 기묘한 힘이 있고, ‘어둠의 존재’는 이 힘을 통해 자기 영향력을 미치려 시도해 왔다. 그래서 앨리스를 볼모로 앨런을 협박, 자신이 해방되는 내용의 소설을 쓰게 했던 것.

전말을 알게 된 웨이크는 새로운 내용을 집필, 어둠의 존재에 맞설 방도를 찾지만, 결국 아내를 구하려면 자신이 대신 어둠에 갇혀야 함을 깨닫고 희생한다. 이것이 1편까지의 내용이다. 이후로 앨런은 13년 동안 어둠의 공간에서 탈출하기 위해 새로운 소설을 써 바깥의 현실에 영향을 미쳐 왔다는 설정이다.

흥미롭게도 레메디는 이러한  <앨런 웨이크> 1편의 이야기를 <컨트롤>의 세계관에 통합시킨 바 있다. 이는 <컨트롤> DLC AWE에 상세히 묘사된 내용이다. 어둠의 장소에서 우연히 FBC의 존재를 알게 된 웨이크가 소설을 통해 FBC의 새 국장(‘컨트롤’의 주인공)에게 접근, 자신의 사례를 조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DLC의 스토리다.

<컨트롤>은 DLC 에서 앨런 웨이크의 스토리를 본격적으로 편입했다.


# 두 사람의 주인공

<앨런 웨이크 2>의 주인공은 두 사람이다. 미연방수사국(FBI) 특수 수사관으로서 살인 사건을 조사하다가 예상치 못한 미스터리를 맞닥뜨리게 되는 사가 앤더슨, 그리고 그 미스터리의 배후로 지목되는 기존의 주인공 앨런 웨이크다.

플레이어는 앤더슨과 웨이크를 번갈아 플레이하게 된다. 앞선 내용들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사가 앤더슨은 현실에서 활동하며 웨이크가 집필한 소설에 영향을 받은 여러 기묘한 상황들을 수사하게 된다. 반면 웨이크는 어둠의 장소를 누비며 현실 세계로 탈출하기 위한 과정을 모색한다.

앤더슨의 파트는 비록 비현실적 사건들이 잔뜩 벌어지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현실에 발붙이고 있으며, 그런 만큼 앤더슨 역시 수사관으로서 사건에 접근해 상황을 유추해 나간다. 웨이크의 경우는 다르다. 웨이크는 집필 능력을 이용, 어둠의 장소를 나름대로 ‘재창작’해 돌파구를 찾고자 한다.

여기서 레메디는 양쪽 게임플레이 모두에 전에 없던 방식의 보조 수단을 도입했다. 게임플레이 중 탭(tab) 키를 누르면 로딩 없이 별도의 ‘사무실’과 같은 공간으로 순간이동 된다. 이들은 앤더슨과 웨이크의 정신세계를 표현하며, 각각은 ‘마음의 공간’과 ‘집필 공간’으로 불린다.

앤더슨(가운데)과 웨이크(오른쪽)


# ‘공간’들이 가지는 특별한 의미

먼저 ‘마음의 공간’(mind place)은, ‘장소법’(Method of loci)이라고도 불리는 실존 기억술의 일종이다. 머릿속에 미리 만들어 둔 가상의 공간에 기억을 심상적으로 저장해 체계화하는 기법으로 실제 정보 기억과 회상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앤더슨의 마음의 공간에서는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다. 기존 게임들의 ‘로그’ 기능과 유사하게 수집한 텍스트를 다시 읽거나 오디오·영상을 재감상할 수 있고, 지도를 볼 수도 있다.

이것뿐이라면 기존하던 메카닉을 화려하게 재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겠지만, ‘마음의 공간’은 전례 없는 기능 하나를 제공한다. 바로 ‘사건 보드’다. 사건의 전체 그림을 쉽게 파악하기 위해 키워드, 단서, 증거사진, 핵심 인물들의 관계를 게시판에 고정한 뒤, 이를 선으로 연결해 도식화한 것이다.

마음의 공간

앤더슨은 주요 사건 현장에서 증거와 증언을 수집, 이 보드 위에 배열한다. 이 과정은 간단한 퍼즐처럼 작동하는데, 증거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모이면 여기서 도출되는 새로운 궁금증이 여러 갈래로 퍼져 나가고, 새로 수집된 증거들을 각각의 질문 옆에 제대로 배치하면 다시 다음 질문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식이다.

모든 질문이 빠짐없이 등장하고, 각각에 해당하는 증거들 역시 전부 수집되고 나면, 앤더슨이 비로소 전말을 파악하면서 사건이 종결된다.

이것이 본격적인 추리를  요구하는 도전적 메카닉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어치피 유저는 정해진 위치에 증거를 배치해 선형적 이야기를 확인할 뿐이다. 그런데도 이런 별도 요소가 도입된 이유는 무엇일까?

사건 보드는 스토리 전개에 꼭 필요하지만 전개는 선형적이다.


# 소설 처럼 읽히는 액션 게임

그간 많은 액션 게임이 텍스트·컷씬·보이스 등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 배경과 인물을 설명하는 스토리텔링 기법을 선택해 왔다. 하지만 디테일한 세계관 설정, 주요 사건들의 인과관계, 숨겨진 배경 사건 등의 디테일을 대사와 컷씬만으로 설명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많은 제작사들이 텍스트를 활용해 왔다. 게임에서 수집되는 디지털/아날로그 텍스트 혹은 오디오 로그를 통해 추가적 정보를 유저에게 전달, 전체 경험을 풍부하게 하려는 시도다.

그런데 이런 기법에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유저에게 이러한 정보의 수용을 강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경우 감상을 풍부화하기 위한 일종의 ‘보조 수단’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텍스트/오디오 로그를 무시하는 유저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사건 보드

‘사건 보드’는 이런 스토리텔링 상의 난점 상당 부분을 상쇄하는 영리한 장치로 기능한다.

먼저 사건들의 도식화는 앤더슨뿐만 아니라 플레이어의 상황 이해를 돕는다. 앤더슨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며 플레이어는 새롭게 등장한 요소들이 전체 플롯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사건을 관통하는 핵심적 질문과 이에 대한 해답은 무엇인지 등을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이해하며 전체 이야기를 깊이 있게 소화할 수 있다.

그러나 ‘사건 보드’의 진정한 장점은 주인공이 겪는 내면세계의 혼란과 동요, 의문 등의 강렬한 감정에 유저를 간단히 동참시킬 수 있다는 것에 있다. (초반 스포일러 주의) 예를 들어 첫 장에서 지극히 현실적 논리로 살인사건을 조사하던 앤더슨은, 심장이 사라진 ‘나이팅게일’의 시체가 갑자기 일어나 공격해 오는 상황에 큰 충격을 받는다.

기존의 액션 호러 게임에서는 이렇듯 초현실적 사건이 현실의 장벽을 허무는 순간이 큰 감흥을 주지 못할 때가 많다. 주인공의 내면세계까지 그리기 힘든 장르 속성상,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이 겪는 충격 또한 ‘저 괴물은 대체 뭐야’ 따위의 전형적 대사로 ‘적당히’ 묘사된 뒤 넘어가기 쉽다.

사건 보드는 상황을 더 명확하고 생생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역할을 한다

주인공의 사고방식과 상세한 추론의 내용까지 스토리텔링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전개 방식은 전지적 작가 시점의 소설에서 흔히 접할 법한 것이며, 그동안 액션 장르 게임에서는 재현하기가 쉽지 않았던 문법이기도 하다.

한편 웨이크가 사용하는 ‘집필 공간’은 조금 다른 의미를 지닌다. 집필 공간에는 ‘플롯 보드’가 존재하는데, 이는 ‘사건 보드’와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도구지만 ‘증거’가 아닌 ‘영감’을 중심으로 동작한다. 웨이크는 어둠의 장소에서 발견한 영감(일종의 키워드)을 모아 특정 공간의 묘사를 다시 쓸 수 있다.

이 경우 해당 공간의 실제 구성이 바뀌면서, 이전에 없던 물건이나 통로가 드러나게 되고, 이를 통해 웨이크가 돌파구를 찾는다는 설정이다. 따라서 ‘사건 보드’와 같이 상황의 명확한 정리를 도와주는 역할은 하지 못하지만, ‘창작물의 흐름에 따라 세계의 구조가 바뀌는’ 몽환적인 이야기 전개를 가능한 한 체계화해 주는 역할은 수행하고 있다. 더 나아가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웨이크의 정신세계를 전달하는 데에서는 별도의 효과를 발휘한다.

미스터리를 이해하려는 강한 동기를 유저가 공감하게 만든다


# ‘최적화 실패’가 아니라 ‘차세대’다?

‘사건 보드’와 ‘플롯 보드’를 이용한 소설 형식의 스토리 전개가 실제로 게임플레이에서 긍정적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고수준의 텍스트가 요구됨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추론’의 과정을 흥미롭게 할 깊이 있는 미스터리 설계, 그리고 실제 게임플레이 파트에서의 시청각 연출이 모두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앨런 웨이크 2>는 이 중 대부분에서 합격점을 줄 만하다. 특히 전례 없는 차세대 그래픽이 국내외에서 회자하고 있다. 물론 그 이면에는 현세대 최고 스펙의 GPU를 동원해도 고프레임 구현이 어렵다는 비판이 양날의 검처럼 자리한다.

하지만 클리핑 현상이 전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움직이는 식생의 표현이나 현장감을 자아내는 파티클과 컨트라스트 표현, 그리고 무엇보다 레이 트레이싱을 적용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계속해서 놀라움을 자아내는 광원과 반사 이미지의 표현은 낮은 프레임을 감내할 정도의 시각적 경이를 선물한다.

프레임을 타협하면 RTX 2070에서도 놀라운 비주얼을 경험할 수 있다.

따라서 적어도 ‘그래픽 수준에 비해’ 최적화가 충분치 않다는 비판은 <앨런 웨이크 2>에는 적용하기 힘들다는 것이 개인적 감상이다. <크라이시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현존하는 시스템 대부분에서 ‘풀 옵션’을 구현하기 힘들지만, 그런 만큼 ‘차세대’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은 수준의 새로운 경험을 구현하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이 조금 더 공평하다.

더 나아가 이는 현실에 중첩된 기현상, 그리고 독자적인 논리로 구축된 환상적 공간을 번갈아 누비는 와중에도 유저가 현장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발판이라는 점에서, 게임의 전체 기획을 빛내는 전략적 선택으로 평가할 만하다.

다만 ‘옵션 타협’마저 특정 고사양의 PC 유저들에게만 허락된다는 사실은 지적할 만한 지점이다. <앨런 웨이크 2>는 엔비디아의 DLSS와 AMD의 FSR 등 양대 GPU 제조업체의 AI 업스케일링 기술을 모두 지원하며, 이를 이용하면 RTX2070에서도 평균 50프레임에 가까운 플레이 환경이 보장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DLSS가 지원되지 않는 GPU 사용자가 많으며, FSR로는 동일한 스펙 구현이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몽환적 세계의 묘사에 탁월하다.

<컨트롤>에서 체계화한 AWE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조금 더 명확해지고 추가적인 깊이가 생긴 전반적 이야기 얼개 역시 1편에 비교해 높이 살 만하다. 레메디의 탄생부터 지금까지를 함께 하는 작가 겸 디렉터 ‘샘 레이크’의 조예가 잘 드러나는 문장과 대사들 역시 게임플레이를 내내 즐겁게 만든다.

다만 1편에서 크게 발전하지 않은 액션 파트는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나름의 합리성을 가지고 상대할 수 있었던 일반 적들이 이번 편에서는 주인공 앞으로 순간이동 하는 등 곤란한 패턴을 지니면서 전반적 전투 피로도가 올라간 점은 오히려 ‘일 보 후퇴’로 바라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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