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러한 업계의 관행을 깨부수고 데뷔후 첫 EP 앨범을 발표한 걸그룹이 있다. 넷마블과 카카오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메이브'가 그들이다.
게임으로 유명한 두 기업이 K-pop 아이돌을 만들었다는 소식은 언뜻 들으면 다소 이상하게 들린다. 하지만 멤버 전원이 'AI 버추얼 휴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메이브'는 네 명의 가상인간으로 구성된 걸그룹이다. 올해 초 디지털 싱글 <판도라>를 발표하며 K-pop에 반향을 일으켰다. 얼마 전 11월 30일 발표된 새로운 EP 앨범 <What's my name?>도 발표 이틀만에 미국과 영국을 포함한 10개국의 음원 차트에 안착하며 순조로운 출발을 알렸다.
이렇듯 메이브는 다른 버추얼 휴먼 인플루언서들과는 다르게 대중들로부터 '진짜' 인기를 얻고 있었다. '메이브'는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끌 수 있었던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적받는 점은 무엇이었을까? 게임사에서 만든 다른 버추얼 휴먼 인플루언서들의 사례를 통해 비교해 본다.
'메이브'는 <판도라>를 발표한 직후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2023년 12월 기준으로 뮤직비디오의 조회수가 2,100만 회가 넘었다. 이는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2군 아이돌에 준하는 이례적인 성적이다. 참고로 게이머들 사이에서 히트했다고 유명한 '이세돌'의 <리와인드> 뮤직 비디오가 1,800만 회 정도이고, <키딩>은 1,100만 회 정도이다.
메이브가 데뷔한 이래로 앨범의 타이틀 곡은 맥스 송과 카일러 니코가 맡아왔다. 이 둘은 SM 엔터테인먼트 소속의 여러 가수들을 담당하며 K-POP 계에서 이미 유명하다. 맥스 송은 귀엽고 통통튀는 느낌의 작업을 주로 해왔고, '레드벨벳', '오마이걸', '에스파', '빌리' 등 많은 여자아이들들의 곡을 썼다.
카일러 니코는 '엑소'와 '슈퍼주니어', 'NCT 드림' 등 주로 남자아이돌들의 곡을 맡아왔다. 최근에는 여자 아이돌들과 실험적인 시도도 많이 했다. 아이브의 <러브 다이브>, 르세라핌의 <피어리스>와 <언포기븐>, 에스파의 <thirsty>의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메이브의 경우 안무에도 신경을 굉장히 많이 썼다. 댄서 그룹인 '프리마인드'가 참여했다. 이들은 남녀 아이돌 할 것 없이 수려한 안무를 잘 만들기로 유명하다. 대표작으로는 아이즈원의 <피에스타>, 아이브의 <일레븐>, <러브 다이브>가 있다. 특히, 이번 앨범에서는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에 출연하여 유명해진 스타 안무가 '조나인'도 참여하기도 했다.
아래에서 소개되는 영상은 '프리마인드'가 공개한 <판도라>의 안무가 버전이다.
이러한 점은 다른 업체들에서 만든 버추얼 휴먼과 차별화된다. 일례로, 한유아는 스마일게이트에서 만든 버추얼 휴먼이다. 대형 연예 소속사인 YG 엔터테인먼트의 지원을 받아 국내에서 가장 큰 모델 에이전시인 YG 케이플러스에 소속되어 디지털 싱글 <I like that>으로 데뷔했다. 이후에는 강수지의 <보라빛 향기>를 리메이크한 곡을 발표하는 등 독특한 행보를 보여주었지만 큰 관심을 받진 못했다. 대중들이 관심을 가질 법한 요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정한 비인간> 표지(좌)와 서울국제도서전에 참석한 한유아(우)
이러한 메이브의 대중 취향의 노래와 춤은 여러 알고리즘을 통해 퍼져나갔다. 특히 가장 큰 반응을 보인 것은 SNS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던 청소년 층이다. 이들은 아이돌 문화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연령대이기도 하다.
메이브는 데뷔 직후부터 여러 숏폼 플랫폼을 대상으로 마케팅을 진행해왔다. 특히 데뷔곡 <판도라>의 하이라이트 부분 안무를 찍어 올리는 '<판도라> 챌린지'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판도라> 챌린지'가 독특한 점은 국내와 해외에서 서로 다른 양상으로 동시에 유행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는 댄서들이 평범한 사람들은 쉽게 시도하지 못할 강도 높은 안무를 일취월장하게 해내는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반면, 버추얼 휴먼에 대한 거부감이 비교적 적은 해외에서는 공공장소에서 랜덤하게 흘러 나오는 K-POP 음악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춤을 추는 'K-pop in public' 문화를 통해 알려져 크게 사랑받았다.
다른 여자 아이돌들이 메이브의 안무를 따라추는 상황도 생겼다. '메이브'가 직접 판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판도라> 챌린지에 참여한 여자아이돌 그룹 '위클리'의 지한, 수진, 소은 (출처: 위클리 공식 영상 갈무리)
사실, 이 부분에는 이미 많은 버추얼 휴먼 인플루언서들이 도전해왔다. '버추얼 휴먼 하트 만들기' 영상으로 화제를 모았던 '이솔'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솔은 자이언트스텝과 네이버가 공동개발한 리얼타임 엔진 기반의 버추얼휴먼이다. 24살 사회 초년생이라는 콘셉트로 '솔이는 성장중!'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활동하고 있다. 네이버 쇼핑라이브의 쇼호스트로 처음 데뷔하여 JTBC의 예능 <뉴페스타>에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JTBC 예능 <뉴페스타>에 출연한 버추얼 휴먼 인플루언서 이솔
우선, '버추얼 아이돌'이라는 단어에 대한 명확한 논의가 필요하다. '버추얼 아이돌'은 '메이브'를 공식적으로 홍보할 때 자주 쓰이는 단어다. 그러나 이 단어는 서브 컬쳐 문화에서는 '실제 사람의 움직임을 트렉킹하는 기술을 이용해 만들어진 캐릭터들로 구성된 아이돌'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플레이브'와 '이세계 아이돌'이 대표적이다.
'이세계 아이돌'은 2021년 데뷔한 6인조 걸그룹이다. <VR 챗>으로 유명한 게임 스트리머 우왁굳이 자체 세계관인 '왁타버스'에서 활동할 아티스트를 뽑는 오디션을 주최하여 결성되었다. 평소에는 멤버들 각자의 방송을 진행하다가 그룹 활동 때가 되면 뭉쳐 콘서트, 페스티벌 등 무대를 진행한다.
'플레이브'는 5인조 남자 아이돌이다. VFX 그래픽의 경우 블래스트가 맡아 제작했다. K-pop과 버튜버 문화를 결합하여, 캐릭터의 모습으로 앨범과 안무 영상을 공개하면서도 정기적으로 인터넷 라이브 방송을 켜서 여러 콘텐츠들을 진행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두 그룹은 한국에서 유이하게 멜론차트 TOP100의 순위에 오른 버추얼 유튜버들이기도 하다.
가장 큰 차이는 아무래도 캐릭터의 뒤에 사람이 실재하는지 아닌지이다. 언뜻보기에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도, 셀링 포인트와 소비하는 타겟층이 서로 다르다. 그렇기에 이미 다른 뜻으로 익숙하게 사용되고 있는 '버추얼 아이돌'이라는 문구로는 K-pop 팬들에게 어필하기 힘들다.
'이세계 아이돌'과
'플레이브'
참고로 '불쾌한 골짜기'는 인간이 인간이 아닌 존재를 볼 때 해당 존재와 인간의 유사성이 높을 수록 호감도가 높아지지만,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오히려 불쾌감을 느낀다는 이론이다. 보통 휴머노이드 로봇을 두고 자주 사용되는 말이다.
한편에서는 버추얼 휴먼 아이돌의 외관이 활동 중인 다른 여자 연예인들과 너무 닮아 기분이 나쁘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이들은 이제는 실제 사람처럼 움직이고 말하기에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외관은 악용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브'가 데뷔한지 아직 만으로 1년도 채 지나지 않았으며, 새로운 앨범을 발표한지도 아직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 이들이 '버추얼 휴먼 아이돌' 씬에 가져다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