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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고마운 ‘발더스 3’ 한국어 지원, 그래도 유저 번역을 기다린다?

정성으로 무장한 ‘발더스 게이트 3’ 유저 번역 분석

에 유통된 기사입니다.
방승언(톤톤) 2023-12-15 11:40:25
12월 1일, 한국 게이머들에게는 한 가지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전 세계 게이머 사이에서 ‘올해의 게임’으로 칭송받는 <발더스 게이트 3>의 공식 한국어 패치가 배포된 것이다.

대형 희소식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씁쓸한’ 뉴스이기도 했다. 아무 대가 없이 번역에 힘썼던 유저 번역팀을 생각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공식 한국어 지원이 없었던 지난 4개월 동안 유저 번역팀은 많은 팬들에게 유일한 희망이 되어줬다. 그들의 노고가 무의미해졌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마음 한쪽을 무겁게 했다.

그러나 유저 번역의 가치가 정말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본래 번역에는 정답이 없는 법이고, 번역본끼리의 비교는 우열보다는 호불호의 문제일 때도 많다.

그리고 <발더스 게이트 3> 유저 번역은 아직 미완성이기는 하지만 완료된 지점까지 게임을 즐기는 데 있어 무리가 없다. 더 나아가 유저들의 정성이 아낌없이 투입된 만큼, 정식 번역과 비교해서도 돋보이는 지점들도 있다. 

무사이 스튜디오의 <발더스 게이트 3> 공식 번역과 유저 번역의 차이를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들을 살펴봤다.



# 들어가기에 앞서

아래 제시된 단편적 비교 몇 가지로 두 그룹의 ‘실력’을 견주는 것은 무의미한 시도다. 번역은 정답이 없는 분야이며, 두 그룹의 작업 환경 또한 전적으로 달랐기 때문에 공정한 비교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기사의 목적은 공식 번역 발표로 가려질지 모르는 유저 번역팀의 열정과 노고를 조명하는 데 있다.

무사이 스튜디오는 지난 8월 게임 정식 출시 이후에야 번역 의뢰를 받아 작업에 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경우 고작 4개월 남짓한 작업 시간이 주어졌던 것인데, 게임의 방대한 텍스트양을 고려할 때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다. 일반적인 트리플A 게임 번역은 개발 중간에 시작돼 1년여 이상이 소요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발더스 게이트 3> 유저 번역 패치의 경우 얼리액세스 시점부터 시작됐다. 2020년 라리안이 게임의 초반부 콘텐츠를 미리 출시했고, 일부 유저들이 해당 분량의 번역을 이미 끝마친 상태였다. 출시 후 공개된 추가 분량에 대한 번역 마감 기한도 따로 없었다. 따라서 절대적으로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있던 셈이다.

반면 유저 번역팀은 철저한 무보수로 작업에 임했다는 사실을 짚어볼 만하다. 더 나아가, 신뢰할 수 있는 번역 인력을 상시 확보한 기업들에 비교했을 때 유저 번역팀은 인력 및 번역 프로세스 관리에서 더 큰 어려움을 겪는 것이 보통이다.



# 이해도와 명확성

맨 처음 캐릭터 커스터마이징 화면에서부터 두 번역본의 차이가 조금 드러난다. 캐릭터 외형 편집 메뉴 하위 항목인 ‘body art’의 번역을 살펴보자. 공식 버전은 이를 ‘신체 예술’, 유저 버전은 ‘문신’으로 옮겼다.

‘신체 예술’은 과도한 직역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body art’의 번역으로 널리 사용되는 말이다. 몸을 매개로 하는 모든 예술 양식을 의미하며, 바디 페인팅, 문신, 그리고 신체에 흉터를 내 형태를 새기는 난절법(scarification) 등이 두루 포함된다(영화 <블랙 팬서> 속 악역 ‘킬몽거’의 몸에 새겨진 그것이다). ‘문신’은 신체 예술의 하위 개념이므로 공식 번역이 더 적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영어 문화권에서 ‘body art’가 꽤 일상적 단어인 데 반해, 한국어 사용자에게 ‘신체 예술’이라는 말은 훨씬 낯설게 느껴진다는 차이가 있다. 유저 번역본은 정확도 보단 단어의 친숙도(이해도)에 집중한 것처럼 보인다. 다만 이는 엄밀히 말하면 오역에 가깝다. 실제로 해당 항목의 외형 옵션 중에는 문신 외에 바디페인팅도 포함되어 있다.

낯설지만 정확한 번역이다.

한편, <발더스 게이트 3>와 같은 복잡한 게임에서 툴팁 및 UI 설명은 게임 이해를 돕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며, 번역 중요도 역시 매우 높다. 여기서도 몇 가지 차이가 두드러진다.

대표적으로 캐릭터 생성창에서의 다음 예시를 보자. <발더스 게이트 3> 캐릭터들은 특정 스탯의 높낮이에 따라, 월드에서 벌어지는 관련 판정에서 보너스 혹은 페널티를 받게 된다. 예를 들어 지능이 가장 낮게 설정된 경우 지능 관련 판정에서 -1을 받게 된다.

이를 공식 번역에서는 ‘-1 지능 판정’이라고 번역했고, 유저 번역은 ‘-1만큼 지능 판정에 합산’ 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전자의 경우에도 물론 그 의미를 충분히 추론할 수 있지만, 유저 번역 쪽의 명확성이 조금 더 돋보인다.

직관성 차이가 꽤 크다


# 뉘앙스 재현의 노력

원문의 어감을 재현하는 방식에서도 두 번역본은 차이가 있다. 이는 <발더스 게이트 3>의 최고 익살꾼인 게일을 만나면서 두드러진다.

첫 등장에서 모종의 실수로 차원 문 너머에 끼어버린 게일은 주인공이 일행이 다가서자 손만 내민 채 도움을 요청한다. 게일은 ‘손 좀 줄래? 아무나?(A hand? Anyone?)’라고 말하는데, ‘손을 주다’는 ‘도움을 주다’라는 의미의 관용어다.

이때 유저는 게일을 바로 꺼내주는 대신, 게일의 손에 자기 손을 세게 마주칠 수 있는데, ‘손을 주다’(give hand)라는 관용구에는 그러한 의미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 당황한 게일은 “아야! 더 정확히 말했어야 하나보군, 도와달라는 말이었어”라고 덧붙인다. 물론 중의적 표현을 이용한 가벼운 개그 씬이다.

유저 번역팀은 이 부분 게일의 대사를 각각 “손 좀 빌려줄래? 아무나?”, “좀 더 명확하게 말해줄 걸 그랬네. 도움의 손길 좀 줄래?”라고 옮기면서 ‘손’이라는 농담 소재를 최대한 살렸다. 반면 공식 번역에서는 “도와줘! 아무도 없어요?”, “이거 의도를 정확히 밝혀야겠군. 도움의 손길 좀 주지 않을래?”라고 옮겼다. 원래의 의도가 조금은 희석된 것을 알 수 있다.

'손'이라는 말장난 소재를 되도록 살리고 있다.

다음 대사에서도 비슷한 차이는 확인된다. <발더스 게이트 3>의 메인 스토리는 일리시드 종족이 주인공들을 함선으로 납치한 뒤, 안구 구멍을 통해 올챙이 형태 기생충을 머리로 집어넣으며 시작된다. 게일은 주인공과 자신이 끔찍한 일을 함께 겪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친근감을 표시하려 한다.

공식 번역에서 이 부분의 대사는 “너한테도 안구 부위에 불쾌한 물질을 비집어 넣지 않았어?”라고 번역됐다. 그런데, 이에 대해 주인공은 “아무리 머릴 짜내도 그렇게 징그러운 표현은 못 내겠네”라며 꽤 강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주인공이 이렇게까지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얼핏 잘 와닿지는 않는다. ‘상상 못 할 정도로 징그러운 표현’이라는 강렬한 평가에 비해 게일의 대사는 오히려 점잖은 우회적 묘사처럼 들리기도 하기 때문.

주인공의 반응이 조금 더 명확히 이해되는 것은 유저 번역을 보고 나서다. 유저 번역에서 게일은 “너도 안구 부위에 꽤나 달갑잖은 삽입을 당했을 것 같은데, 아니야?”라고 말한다.

주인공의 불쾌감이 이해되는 대사

게일이 말한 ‘달갑지 않은 삽입’(rather unwelcoming insertion)이라는 문구는, 점잖은 어휘로 되어 있음에도 어딘지 성적이거나 노골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주인공이 질색하는 반응을 보인 것이 비로소 납득되는 지점이다.

유저 번역에서 주인공은 “그보다 더 역겹게 표현하는 게 가능하긴 할까 싶네”(Couldn't have phrazed it more repellently myself)라고 답한다. 여기서 phrase는 ‘단어를 조합해 문장을 만들다’라는 의미의 동사다.

‘불쾌한 물질을 안구에 비집어 넣었다’는 문장은, 게일 특유의 학자연한 말투는 잘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담백한 사실 묘사에 가까운 데다, 특별히 이상한 단어를 선택한 것은 아니어서, 맥락에 덜 어울리는 편이다.

공식 번역은 이처럼 원문의 농담 재현에 다소 소극적인 모습인데, 이는 앞서 언급한 촉박한 스케줄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농담 번역은 같은 분량의 일반 문장 번역에 비교해 품이 훨씬 많이 드는 작업이다. 서두를 경우 오역이나 톤 조절 실패 위험도 크다. 일정이 지나치게 바쁘다면 기본적 의미 전달에만 집중하는 것이 안전한 접근일 수 있다.

기본적으로 문학 번역의 속성을 띤다. 공을 들이려면 단어 하나에 몇 시간이 걸릴 수도 있는 문제다.


# 퀄리티의 균질성

앞선 예시들에서 보이듯 유저 번역팀은 게이머의 원활한 이해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위해 원문에는 없는 숨은 맥락까지 전달하는 모습도 보인다.

주인공과 동료 섀도우하트의 초반 대화를 예시로 꼽을 수 있다. 일리시드 함선에서 탈출한 직후 섀도우하트에게 말을 걸면 해당 시점까지의 사건들에 대한 의견을 물을 수 있다. 공식 번역에서 주인공은 이때 “너도 우리의 작은 밀항자에 대한 생각이 있겠지”라고 묻는다.

‘우리의 작은 밀항자’란 일리시드 올챙이를 말하지만, 지칭하는 대상이 단숨에 이해되지는 않는다. 심지어 두 사람은 조금 전까지 일종의 함선에 승선해 있었기 맥락적 혼란이 더 클 수 있다. 유저 번역에서는 이를 “우리의 몸속 작은 밀항자”라고 번역했다. 원문에는 ‘몸속’을 직접 지칭하는 단어는 없지만, 지시 대상을 명확히 하기 위해 약간의 부연 설명을 더한 것이다.

이처럼 유저 번역은 어감과 의미 양쪽에서 돋보이는 지점이 많다. 그렇다면 굳이 공식 번역을 고집할 이유는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유저 번역에도 물론 상대적 약점은 있다. 바로 번역의 균질성, 즉 퀄리티의 ‘평균치’다.

맥락을 고려해 단어를 더했다.

아마추어와 프로 인력이 섞여 있고, 프로세스의 체계성도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유저 번역은 작업물의 품질 유지가 조금 더 어렵기 마련이다. <발더스 게이트 3>의 유저 번역에서도 이런 퀄리티 급변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은 드루이드 마을에서 만나는 소년/소녀 티플링 도둑들과의 대화다. 대화의 작은 디테일까지 신경 써서 번역된 이전까지의 대화에 비해, 이 구간의 대사들은 직역투가 상당 부분 남아 있고 의미 전달 역시 부정확한 편이다.

예를 들어 도둑들의 두목 ‘몰’은 주인공이 자기 부하의 도둑질을 눈감아 준 것에 고마움을 표한다. 그러자 주인공은 ‘앞으로도 항상 똑같이 빠져나갈 순 없을 것’이라는 충고와 함께 부하들을 단속하라고 주의를 주는데, 여기에 대해 몰은 “아 그래(Is that true?)”라고 반문한다.

맥락과 어투상 이는 진짜 질문이 아니라 ‘말 안 해줬으면 모를 뻔했다’는 투의 조롱과 비꼼에 가깝다. 하지만 유저 번역에서는 실제로 이 조언을 고맙게 받아들인 것처럼 “그게 사실이야? 그 애들한테는 조심히 행동하라고 말할게”라고 번역됐다.

실제 성우 연기까지 들으며 번역했다면 뉘앙스를 놓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많은 게임 오역이 이런 문제에 기인한다.

한편 직역 어투의 문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번역문들을 나란히 놓고 보면 눈에 잘 들어온다.

유저 번역: “너희는 왜 이런 계획과 사기극을 벌이는 거야? 너도 알겠지만, 위험하잖아.”
공식 번역: “왜 작당까지 해서 설치는 거야? 덜미라도 잡히면 그때는 어떡하려고.”

유저 번역: “그래, 너는 힘든 시기를 이용하려고 하잖아. 그런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들이 있지”
공식 번역: “그래, 어려운 시기에 남을 등쳐 먹기나 하고. 그런 놈들을 뭐라고 하는지는 알아?”


# 공식 번역 감사하지만, 유저 번역 계속 응원하는 이유

<발더스 게이트 3>의 두 번역본 사이의 눈에 띄는 차이 몇 가지를 비교해 봤다.

유저 번역본은 더 많은 작업 시간이 주어졌던 만큼 일부 디테일과 정확도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여줬다. 물론 정반대였던 지점도 있다. 배경지식의 부족이나 톤 조절 실패, 지나친 직역투 등의 문제는 유저 번역에서도 마찬가지로 발생했다.

중요한 것은 두 버전 모두에서 게임플레이에 치명적 방해를 주거나 감상을 크게 방해하는 유형의 문제는 많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게임의 방대한 규모를 생각할 때, 그리고 짧았던 작업 기간을 볼 때 특히 놀라운 점이다.

다만, 유저 번역팀이 지금까지와 같은 노력을 앞으로도 지속하길 희망하게 된다. 유저 번역은 상업 번역이 가진 몇 가지 한계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상업 번역은 일반적으로 일회성을 띤다. 번역 회사는 계약에 의해 정해진 기한까지 번역물을 납기한 다음 다른 프로젝트로 넘어가는 게 당연한 수순이다. 물론 중대한 번역 오류가 있다면 원청 기업의 요구로 수정 작업이 이뤄진다. 그러나 자잘한 오류는 원청 기업 스스로도 인식할 능력을 결여한다. 그렇게 실제로 많은 게임의 번역 문제들이 영영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이는 기업 규모, 혹은 번역 상태와 전혀 무관하게 발생할 수도 있는 문제다. 단적인 예로 최근 출시한 대작 <앨런 웨이크 2>의 한국어 번역은 명백한 오역이 빈출하는 등 다양한 문제로 유저 불만이 컸지만 아직 후속 작업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다.

유저 번역팀의 향후 로드맵

<발더스 게이트 3> 유저 번역팀은 이용자 피드백을 받기 위한 별도 창구를 만들고, 번역을 빈번하게 수정, 보완해왔다. 번역의 품질은 들이는 시간만큼 높아지기 마련이다. 유저 번역팀이 과업을 계속해 주길 희망하게 되는 지점이다. 실제로 이런 노력은 이어지고 있다. 유저들은 공식 한국어 버전 출시 이후, 공식 번역의 내용까지 흡수한 '완결판' 번역을 내놓는 것을 목표로 작업 중이다.

한편 이 지점에서 짚어볼 사실 하나는 라리안 스튜디오가 공식 번역 상당 부분을 배포 후 빠르게 수정했다는 점이다. 8일 있었던 핫픽스를 통해 중요한 번역 오류 400여 가지가 수정되었다. 이 또한 유저들이 수집해 라리안에 전달한 피드백들이 뒷받침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앞으로도 유사한 패치가 거듭 진행될 것인지 여부는 아직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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