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IP를 기반으로 TV 시리즈나 영화와 같은 영상물을 만든다. 팬이라면 환호할 만한 소식이지만, 창작자의 입장에서는 고충이 있을 법한 일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게임의 서사는 기본적으로 수십 시간에 걸쳐 진행됩니다. 그렇다고 드라마처럼 그 시간이 모두 높은 밀도의 서사로 채워져 있느냐고 하면, 그렇지도 않죠. 영상의 형태로 전환하기 어려울 법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 원작 영화나 TV 시리즈를 만드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폴아웃> 드라마가 성공을 거둔 덕에 <폴아웃 4>가 여러 신작을 제치고 판매 순위 1위에 올랐는데요. 영상화는 IP의 외연을 확장하고 원작 게임에 대한 관심도를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한 이점이 있지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강점이 있어야 할까요?
※ 일부 내용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직설적인 각색을 피하는 현명한 선택" <폴아웃> 드라마
가장 최근에 출시해 화제가 된 작품이죠. 4월 10일 공개된 아마존의 <폴아웃> 드라마입니다. 드라마 <폴아웃>은 아마존 프라임 플랫폼 역대 최다 시청 타이틀 3위에 오를 정도의 흥행과 함께 원작 IP 전반의 인기를 다시금 견인하기도 했는데요.
드라마 <폴아웃>은 원작 IP의 팬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호평받고 있습니다. 세 명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전개하기 때문에 원작의 설정을 모르는 사람도 작품을 즐길 수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직설적인 각색을 피하는 현명한 선택" 등의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드라마의 흥행에 힘입어 <폴아웃 4>는 지난 21일 기준 유럽 지역 내 판매량이 75배 증가, 신작들의 판매량을 압도하고 1위에 등극했습니다. 드라마 출시를 맞아 IP 전반에 할인 프로모션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출시된 지 9년이 흐른 타이틀에 있어서는 놀라운 성적입니다.
쉘터와 생존자들의 생활이 실제로 구현되었습니다.
파워 슈트도 공개 당시 화제를 모았죠.
# 불후의 명대사를 남긴 <사이버펑크: 엣지러너>, "산데비스탄은..."
<사이버펑크: 엣지러너>(이하 엣지러너)는 참 미묘한 시기에 공개되었습니다. 원작 게임 <사이버펑크 2077>가 출시된 지 2년이 지난 시점이었는데요.
<엣지러너>의 제작은 게임 출시 이전에 확정된 사안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려의 시각이 많았죠. <사이버펑크 2077>이 <폴아웃>과 같이 오랜 기간 서사를 쌓아온 프랜차이즈도 아니고, 더군다나 원작 게임이 당초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퀄리티로 출시되어 실망한 유저가 많은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는 보란 듯이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그에 더해 <사이버펑크>가 여러 차례에 걸친 패치와 DLC <팬텀 리버티>를 통해 평가를 반전할 때까지 충실한 교두보 역할을 해 주었죠. <엣지러너> 출시 이후 <사이버펑크 2077>은 최다 동시 접속자 수를 경신했고, 스팀 판매 순위 1위에 올라섰을 정도입니다.
<폴아웃>과 마찬가지로 원작의 설정을 녹여 내면서도 게임을 해본 적 없는 사람도 즐길 수 있는 독자적인 스토리를 구성했습니다. 매력적인 캐릭터를 새로 등장시켰고, 오히려 게임에 대해 모르던 사람이 관심을 갖게 만들 정도였습니다. "(산데비스탄은) 기초적인 임플란트다"와 같은 불후의(?) 명대사를 뇌리에 새긴 것이 대표적입니다.
매력적인 캐릭터가 많이 등장합니다.
많은 패러디가 양산되기도...
# <더 라스트 오브 어스>, 브라운관에서 펼쳐진 엘리와 조엘의 모험
싱크로율이 대단합니다.
국내에 서비스하지 않는 HBO 맥스에서 방영한 탓에 국내 인지도는 약간 떨어지지만, 동명의 게임 원작 드라마 <더 라스트 오브 어스>도 빼놓을 수 없는 흥행작입니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앞에 소개된 <폴아웃>, <사이버펑크: 엣지러너>의 사례와 달리 원작 게임(1편)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원작 게임이 내러티브를 강조한 만큼, 드라마 역시 새로운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원작의 서사와 주제의식을 표현하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대신 게임에서 영상으로 형태를 바꾸는 과정에서 이야기를 보여주는 '방식'에 변화를 가했는데요. 대표적인 변화는 '시점'에 있습니다. 원작 <라스트 오브 어스>는 거의 대부분 주인공인 조엘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플레이어는 조엘의 입장에서 상황을 인지하고, 엘리를 지키기 위해 행동하게 됩니다.
반면 드라마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시점이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좀비 아포칼립스 세계관에서 인간 사이의 관계성을 조망하는, (원작과 동일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대상을 채택해 그 대상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원작 게임에서는 주인공 일행을 도와주는 조연에 불과했던 캐릭터 빌을 주인공으로 채택한 3번째 에피소드가 대표적입니다.
결과적으로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게임 원작 TV 시리즈 최초로 에미상에 노미네이트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주요 상을 수상하진 못했지만, 8개 부문에서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습니다. 다만 주제 의식을 표현하는 것에 집중한 만큼, 좀비 아포칼립스 배경의 처절한 생존기나 액션 시퀀스를 바란다면 기대에 미치지 못 할 수도 있습니다.
# 2023년 박스오피스를 강타한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작년 전 세계 박스오피스를 뒤흔든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도 있습니다. 닌텐도와 <미니언즈> 시리즈의 일루미네이션이 힘을 합쳐 만들었습니다.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역시 원작의 내용을 몰라도 즐길 수 있는 '왕도물'의 성격을 띄고 있습니다. 마리오와 루이지 형제가 모종의 이유로 이세계(?)인 버섯왕국을 구하기 위해 나선다는 설정을 가미해 '배관공'이라는 이질적인 캐릭터 설정에 당위성을 부여했죠.
2D 플랫포머 시절(최신작도 그렇긴 하지만)을 오마주한 연출부터 다양한 디테일까지 팬서비스를 위한 영화라는 평가를 받기도 할 정도입니다. 이동진 영화 평론가는 "서비스가 연출의 유일한 목표가 될 때 벌어지는 일들"이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으로는 호평받으며 흥행에 성공했고, 1억 달러(약 1,300억 원) 제작비로 세계적으로 13억 달러(약 1조 7,000억 원) 이상의 수익을 올렸습니다.
# 스크린에서도 이어지는 소닉 vs 마리오? <수퍼소닉> 시리즈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와 달리 실사 영화로 제작된 <수퍼 소닉> 역시 세계적인 흥행에 성공한 게임 원작 영화로 꼽힙니다.
제작 단계에서 다소
어색한(?) 소닉의 모습이 공개되어 우려 섞인 주목을 받기도 했는데요. 원작의 모습과 비교하면 머리가 작고 팔다리가 길어 불쾌한 골짜기가 느껴진다는 평이 대다수였습니다. 인간과 '어설프게' 닮아 꺼려진다는 거였죠.
이런저런 소동을 지나 <수퍼소닉>은 2020년 2월 개봉했습니다. 개선된 소닉의 디자인과 함께, 원작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펼치는 전투 등 결과물은 기대 이상이었는데요.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의 퀵실버를 패러디한 액션 시퀀스와 같이 '빠르다'는 소닉의 특성을 잘 살려냈다는 평입니다.
영화 개봉 이후에 출시된 신작 <소닉 프론티어>에서 영화에 등장한 액션을 도입하는 등, 창작 과정에서도 영향력을 주고 받는 모습입니다. 올해 개봉 예정인 3편에는 섀도우 소닉이 등장할 예정이라고 하네요.
첫 트레일러에서 충격을 줬던 소닉의 모습. 이때만 해도 <수퍼소닉> 시리즈가 계속 나올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 평가와 흥행 모두 잡지 못한... <어쌔신 크리드>
손익 분기조차 넘기지 못한 게임 원작 영화가 더럿 있지만, <어쌔신 크리드>는 그 정도는 아닙니다. 1억 2,500만 달러(약 1,700억 원) 제작비로 2억 4,000만 달러(약 3,300억 원)수익을 올렸는데요.
물론 마이클 패스벤더, 마리옹 코티야르 등 유명 배우가 출연한 AAA급(?) 영화 치고는 아쉬운 성과입니다. 메타크리틱에 등재된 38개 비평을 종합해 36점으로, 평단의 평가도 좋지 못했습니다. 게임에 등장하는 파쿠르 액션과 '신뢰의 도약' 등을 스크린에 재현했으나 거기에 그쳤다는 평입니다. "다들 멋지게 폼잡고 죽고 죽이고 뛰어다니는데 이유를 모르겠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사실 '애니머스'라는 기기를 이용해 선조의 기억을 체험한다는 <어쌔신 크리드>의 배경 설정은 상당히 난해한 편인데요. 영화에서 두 갈래의 이야기를 풀어내려다 보니 분량 조절에 실패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결과적으로 <어쌔신 크리드>는 영화를 통해 처음 접하는 이들은 물론,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조차 실패했습니다. 게임의 설정을 바탕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펼치는 것에도, 게임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재구성하는 것에도 실패한 셈입니다.
그래도 파쿠르 액션은 참 좋았습니다.
# <몬스터 헌터>, 제가 아는 그 몬스터 맞나요?
영화 <몬스터 헌터>에는 캡콤의 검수를 통해 디아블로스, 리오레우스 등 게임에 등장하는 몬스터들이 그대로 등장합니다. 움직이는 모습과 울음소리 같은 부분도 원작의 그것과 같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몬스터 헌터>는 혹평을 면치 못했습니다. (흥행 면에서는 <어쌔신 크리드>보다 약간 나았습니다)
<몬스터 헌터>가 가장 크게 비판받은 요소는 원작 게임에선 생태계의 일부를 이뤘던 몬스터를 '괴수물'의 괴수에 가깝게 표현했다는 점입니다.
원작의 무기인 대검이나 활은 물론 현대 화기조차 거의 통하지 않는 연출을 보여주다가, 결국에는 원작을 의식한 듯 냉병기로 몬스터를 쓰러뜨립니다. 원작에선 불에 완전 내성인 리오레우스를 불 속성 무기로 공략하기도 하고요.
현실의 군인인 밀라 요보비치가 이세계로 넘어간다는 설정부터, 외관을 제외하면 영화 <몬스터 헌터>는 굳이 '몬스터 헌터'여야 하는 이유가 없습니다. 게임의 설정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는 점에서 <어쌔신 크리드>가 '실패한 시도'라면, <몬스터 헌터>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인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