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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스토리텔링, 포기하는 순간이 ‘게임오버’

NDC 11, 영웅전 시나리오 라이터의 삽질 투쟁기

안정빈(한낮) 2011-05-31 20:19:19

디렉터는 더 이상 컷신을 제공해 줄 수 없다고 못 박았고, 배경 모델러는 새로운 맵을 지원해 주기 어렵다고 말한다. 레벨 디자이너는 이야기보다는 기존의 콘텐츠를 재활용할 방법을 찾아 달라고 요구한다. 이럴 때, 선배 라이터가 한 마디 거든다. “포기해.

 

진짜 포기하면 될까? <마비노기 영웅전>(이하 영웅전)의 시나리오를 담당하는 이차선 라이터는 이렇게 말한다. “포기하는 순간 게임오버라고.

 

게임에서 시나리오는 필요할까? 필요하다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까? 각박한 현실 속에서 시나리오의 해결책을 찾겠다는 그녀의 강연을 정리했다. /디스이즈게임 안정빈 기자


<영웅전>의 시나리오를 쓰는 이차선 라이터. 

 

■ 스토리텔링은 게임이 가진 가장 강력한 힘

 

<퀘이크>의 아버지인 존 카멕은 게임의 스토리를 포르노의 그것과 같다고 말했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사실 게임에서 시나리오가 꼭 필요한 건 아니다.

 

치밀한 스토리와 설정으로 피터 몰리뉴에게 미래의 비디오게임이라는 평을 들었던 <헤비 레인>은 정작 GDC 개발자 초이스 어워드에서 하나의 상도 받지 못 했다. 반면 눈 뜨고 봐도 스토리는 찾아볼 수도 없는 <마인크래프트> 3관왕에 올랐다. 스토리를 완전히 배제하고도 게임이 성공할 수 있다는 예다.

 

 

그런데도 이차선 라이터가 시나리오에 신경을 쓰려는 이유는 뭘까? 그녀는 스토리텔링이야 말로 게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이기 때문이다”고 답했다.

 

<헤비 레인>에서 주인공이 죄 없는 사람을 총으로 겨눴을 때 플레이어는 그를 쏠지, 말지 결정할 수 있다. 버튼 하나만 눌러도 주인공은 총을 쏴서 그를 죽인다. 만약 영화라면 여기서 주인공에게 동조를 느낄 수도 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의 선택이라면서 공감대를 형성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동조를 넘어서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자신이 직접 선택한 행동이 결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3인칭으로 진행되는 영상과 1인칭으로 진행되는 게임의 차이다.

 

그럼 엄청나게 감동적이고 가슴에 와 닿는 시나리오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될까? 그건 또 아니다. 시나리오는 게임의 모든 것과 긴밀하고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어야 한다. 좋은 예가 <언차티드 2>다.

 

 

<언차티드 2>는 열차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데서 시작된다. 컷신이 아니라 실제로 떨어지고 있는 열차 속에서 플레이어는 손잡이를 잡고 열차 바닥을 달리며 절벽 위로 올라가야 한다. 긴박감이 넘치고 몰입감도 뛰어나다. 플레이어의 몰입을 깨지 않고 스토리를 전달한 좋은 예다.

 

온라인게임에서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가 같은 시도를 했다. 블리자드의 롭 팔도 부사장은 게임 속 세계와 스토리텔링이 따로 노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고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스토리의 진행 상황에 따라 실시간으로 주변 경관이 바뀌는 위상변화 시스템을 도입해 글로 읽는 것이 아닌 직접 보여 주는 스토리텔링을 구현했다.

 

 

 

쉽지 않았던 현실의 장벽

 

하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한정된 자원으로 무한대에 가까운 콘텐츠를 뽑아 내야 하는 온라인게임의 특성상 개발 속도는 유저의 콘텐츠 소비를 따라가지 못하고, 스토리는 콘텐츠 생산을 보조하기 위한 뺑뺑이수준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앞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예를 들었지만 그 정도로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개발사는 손에 꼽힌다.

 

그나마 스토리를 중시했던 <영웅전>에서도 개발 초기 시나리오는 어디까지나 시스템의 당위성을 설명해 주는 것에 불과했다.

 

디렉터가 기존 MORPG의 방 개념 대신 배를 타고 나가는 느낌으로 게임을 만들고 싶다고 말하자 모든 맵은 배를 띄우기 위해 커다란 강으로 연결됐다. 기획팀장이 플레이어의 대사를 없애고 싶다고 말한 뒤 모든 대화에는 플레이어 대신 이야기를 듣고 말해 줄 NPC가 한 명 이상 추가됐다.

 

레벨 디자이너가 어색하지 않게 4번의 전투를 더 반복했으면 좋겠다는 말에 4개의 조각을 모아오는 스토리를 만들었다. 각종 이벤트를 설명하고 싶다는 마케팅 팀장의 요청에 따라 NPC와의 대화를 통해 사용법을 알 수 있도록 유도했다.

 

꽥~! <영웅전>의 시나리오 라이터는 그렇게 죽었다.

 

 

 

NPC와의 소통을 통해 시나리오를 살렸다

 

이차선 라이터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NPC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스토리와는 크게 관련이 없는 잡담 기능을 추가해 NPC의 과거와 성격, 배경 등을 조금씩 드러냈다. 플레이어의 신분과 상황에 따라 같은 NPC라도 다른 반응을 보이게 만들었다.

 

처음에 플레이어를 무시하던 기사 드윈은 플레이어가 최고기사에 오른 후에는 꼬박꼬박 존칭을 쓰며 따른다. 쫓기는 몸이 된 플레이어에게 여관주인 에른와스는 허름한 여관이 불편하지는 않냐는 친절한 말을 건넨다. 위상변화까지는 아니더라도 대화의 변화로 현재 상황을 유추할 수 있도록 말이다.

 

도시를 오가는 길 한가운데 있는 양을 부각시키기 위해 털을 뽑아와 모자를 만드는 스토리도 넣었다. 플레이어가 심심하지 말라고 양이 털을 뽑으려면 플레이어를 밀쳐 내고, 털을 달라고 요청하면 자신의 털을 순순히 내주는 약간의 장난도 추가했다.

 

‘마족이 과연 무조건 쓰러트려야 할 적일까?’ 하는 생각이 들도록 주인이 떠난 성을 끝까지 지키는 골렘의 이야기도 집어넣었다.

 

 

 

만족스러운 결과, 아직 많은 시도가 남아 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NPC의 배신에 플레이어들은 놀라고 그 죽음에 충격을 받았다. 앞서 이야기했던 스스로의 행동과 선택에 따른 결과에 따르는 반응이다. 작년 연말에는 시나리오 대상도 탔다. 양의 입지도 높아졌다.

 

대표적인 성공사례가 게렌이다. <영웅전>에는 플레이어를 처음부터 끝까지 괴롭히는 게렌이라는 NPC가 등장한다. 죽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게 만들어 주는 얄미운 캐릭터다. 그래서 중요한 분기에 게렌을 죽일지 말지를 플레이어가 스스로 결정하도록 스토리를 구성했다.

 

보통은 분기 선택에 따른 플레이어의 득과 실을 따지기 마련이지만 <영웅전> 게시판에는 게렌을 진짜 죽일 수 있느냐는 말만 가득했다. 비록 시스템의 당위성을 위해 투입된 시나리오지만 그 과정에서 고민과 이유를 찾도록 유도한 것이다.

 

하지만 이차선 라이터는 이게 최선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싸우고 포기하지 않는 자세로 결실을 맺었지만, 아직도 많은 시도가 남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같은 3번의 전투라도 목적이 있는 전투 3번과 무조건 반복해야 하는 전투 3번은 분명히 다릅니다.그녀가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시나리오를 위해 싸우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