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이 처음 소개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여겨보는 것이 뭘까?
아마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래픽과 관련된 콘텐츠일 것이다. 한때 ‘그래픽’이라는 말로 사용됐던 것이 어느새 ‘아트’라는 말로 바뀌었다. 그만큼 아트는 게임 개발에서 가장 빠르게 변하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심지어 블록버스터 게임의 경우 규모가 커질수록 실패의 위험성이 제일 큰 것도 바로 게임 아트 분야다. 그런데 게임아트란 과연 무엇일까? 이를 보다 쉽게 이해하려면 우리가 ‘명화’라고 부르는 미술 작품을 통해 게임아트가 배울 점을 발견해 보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1일 넥슨 개발자 콘퍼런스(NDC) 2011에서 엔씨소프트 김형준 상무는 ‘명화와 함께하는 게임아트 이야기’라는 주제로 게임아트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돕는 강연을 진행했다. /디스이즈게임 정우철 기자
엔씨소프트 김형준 상무.
■ 아트란 무엇인가?
“아트는 게임의 성공과 실패에서 중요한 분야다. 그런데 아트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분야다.”
김형준 상무의 첫 마디였다. <아이온>을 개발하면서도 해당 아트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딱 찍어서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해당 담당자에게는 “이 몬스터가 맘에 안 든다”라는 말 외에는 하지 못 했다.
그렇다면 아트란 무엇일까? 이를 분석해 보면 미적 정보와 의미적 정보의 이중 구조를 가진 것이 아트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완성도(Visual Perfection)와 감성(Emotion)으로 구분할 수 있다.
완성도는 시각적인 정보가 풍부하고 빛의 묘사가 잘된 것을 말한다. 즉 대상에 대한 묘사의 정도가 얼마나 뛰어난지를 보는 것이다. 한마디로 빛, 컬러, 밀도, 균형이 얼마나 잘 표현됐는가를 의미한다. 반면 감성은 감각을 통해 대상을 주관적으로 표현한다.
실제와 똑같이 묘사하기보다 조금 더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가공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감성의 표현은 정서, 양식, 장르, 기호, 스토리텔링이 주된 표현 방식이다. 게임아트도 이와 비슷하다. 하지만 다른 점도 분명히 있다.
아트의 완성도와 감성은 회화의 발전과 함께했지만, 게임아트의 완성도와 감성은 3D와 함께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3D와 회화의 조형 요소는 유사하게 발전하고 있다. 다르면서도 같고, 같으면서도 다른 셈이다.
이것이 우리가 명화를 통해 게임아트를 이해해야 하는 이유다. 김형준 상무는 5개의 명화를 예로 들면서 그림의 의미와 왜 이 그림들이 오랫동안 사랑을 받고 있는지 말했다.
■ 인상주의, 모네에서 배울 점
앞서 완성도는 사물을 얼마나 실제처럼 묘사했는지에 따라 정해진다고 했다. 그런데 인상주의 화가의 그림들을 보면 사람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묘사하고 있다. 즉 묘사보다 붓 터치가 중심으로 그려지고 있다.
인상주의 화가는 빛의 이해와 감응을 그림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은 풍부한 빛과 색채의 묘사다.
지금의 렌더링은 빛의 원리로만 만들어진 3D 기술이다. 즉 3D는 빛으로 그린 그림이다. 조명의 힘만으로도 충분한 완성도를 가질 수 있다.
그가 예로 든 것이 <아이온> 3.0에서의 빛의 활용이다. 단순한 배경일지라도 조명을 어떻게 바꾸는가에 따라서 세상의 표정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조명은 묘사만을 위한 도구는 아니다. 더 정교한 그림이 될 수 있지만 그림에 표정을 만들 수 있다. 조명을 밀도만을 위해 쓰기보다 무서운 느낌, 혹은 포근한 느낌 등의 표정을 담는 데 중점적으로 사용돼야 한다. 앞으로 렌더링 기술은 색채가 아닐까 생각한다.
단 3D 표현 기법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형식주의에 빠지기 쉽다. 아티스트는 스스로 보이는 만큼 그릴 수 있다. 즉 아티스트의 열정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 미니멀리즘, 솔 르윗에게 배울 점
미니멀리즘은 난해하다. 추상파의 반대 의미로 나온 화풍이기 때문이다. 복잡함보다 단순함을 추구하는 그림이지만 절대로 단순하지는 않다. 사물의 본질적인 의미를 담는 완성도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니멀리즘은 많은 산업디자인에 영향을 주었고, 애플은 미니멀리즘의 미학을 최대한 살린 디자인을 선보이는 제품을 만들어 내고 있다. 단순함 속에 사물의 의미를 담는 완성도를 위해서 엄청난 비용을 투자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김형준 상무가 컴퓨터그래픽(CG)을 만들게 된 동기가 있다. 스퀘어에닉스가 영화산업에 뛰어든 작품인 <파이널 판타지>다.
당시에는 ‘하이퍼 리얼리즘의 실체’라는 카피가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로 하이폴리곤과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묘사할 정도로 캐릭터 완성도가 뛰어났다. 하지만 그 해 최고의 캐릭터에 선정된 것은 <툼레이더>의 라라 크로프트였다.
이는 리소스를 많이 투입한 캐릭터가 매력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다. 실제로 많은 아티스트들이 캐릭터를 만들 때 더 많은 폴리곤과 매핑을 쓰고 싶어서 고민한다. 하지만 이는 캐릭터의 본질적인 완성도와는 관계가 없다.
김형준 상무가 말한 미니멀리즘은 게임아트에서도 통용된다. 그는 이를 그릇에 비유했다. 너무 화려함을 추구하기보다는 세상을 모두 담을 수 있는 하얀 접시가 미니멀리즘의 대표적인 사례라는 설명이다.
“<아이온>의 초기에도 많은 묘사를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많이 넣는다고 좋은 복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은 디자인이란 더 할 게 없는 것이 아니라, 뺄 게 없는 것이다. 너무 많이 묘사하고 디테일하게 작업하는 것이 무조건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초현실주의, 르네 마그리트에서 배울 점
초현실주의는 말 그대로 상식적이고 근본적인 요소를 파괴하는 기법이다. 이는 그림을 그릴 때 눈에 보이는 그대로 옮기는 데 집착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는 게임아트에도 적용된다.
한마디로 고정관념을 깨고 상식의 너머를 그려야 한다는 뜻이다. 초현실주의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그러나 초현실적인 작품을 만들더라도 긍정적인 시각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너무 독창적이면 거부감이 든다. 너무 초현실적인 독창성은 오히려 거부감을 전달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긍정적인 시각으로 표현하느냐, 부정적인 시각으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대중이 받아들이는 정도가 달라진다. 이는 1980년대 이후 흥행한 애니메이션을 1위부터 300위까지 조사한 결과에서도 나온다.
1위부터 150위까지 차지한 애니메이션들은 긍정적인 시각언어를 사용했다. 원색, 고채도, 조화로운 색상을 사용했고, 선악 및 주연과 조연의 구분이 명확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익숙함을 느꼈고 대중적인 기호와 감성에 충실했다.
반면 150위부터 300위까지의 애니메이션들은 부정적인 시각언어를 사용했다. 전달하는 기호가 모호했고, 간색, 저채도, 튀는 색을 사용했다. 특히 특정한 문화와 코드를 눈에 띄게 만들어 이른바 마니아 층의 기호에 맞춘 것이 대부분이었다.
■ 르네상스, 산드로 보디첼리에서 배울 점
비너스의 탄생은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들 작품의 특징은 양식화된(Stylization) 묘사를 통해 시적인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대상의 본질적 특징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상화시킨 표현이 발달한 시기다.
재미있는 점은 양식화된 캐릭터는 시대를 초월한 퀄리티를 가진다는 점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캐릭터는 누구나 알고 있는 미키마우스와 헬로키티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한국 게임의 복식이 양식화되기 시작한 것도 <리니지>에서부터다.
김형준 상무는 “한국의 게임아트에서 복식의 양식화는 <리니지> 초기의 복식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실제 중세시대의 복식과 이를 충실히 따르던 서양 게임에서 보던 형식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복식의 양식화 외에도 게임에서는 캐릭터 특성을 표현하기 위해 양식화를 사용한다. 양식화된 그림은 실루엣만으로도 캐릭터의 특성을 표현할 수 있다. SD형, 미소년, 리더형, 신비주의, 카리스마, 마초, 거인괴수 등 다양한 캐릭터를 체형의 양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여성 캐릭터의 경우 체형 실루엣만으로 섹시함과 요염함, 순수함과 청순함을 표현할 수 있고 SD, 미니어처 형태로 귀여움을 느끼게 만들 수도 있다. 즉 양식화된 그림의 가장 큰 특징은 실루엣만으로도 캐릭터의 특성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양식화를 통해 전달력을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 본인의 개성을 살려 아무리 재미있게 표현해 게임에 적용해도 유저가 이해를 못하면 실패작이 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양식화는 개성을 만들지만, 공식화된 기호를 깨뜨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게임 안에서 표현되는 건물 중 은행이면 은행, 상점이면 상점 같은 모습을 인지할 수 있도록 보여 줘야 한다. 재미있게 표현한다고 무엇에 쓰이는지 알 수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 표현주의, 뭉크에게 배울 점
김형준 상무는 대상의 객관적인 표현을 모두 버리더라도 감성만은 전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티스트들이 그림을 잘 그려서 보여주는 것만으로 긍정적인 게임의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은 착각이라는 것이다.
그는 감성은 ‘마음의 소리’라고 정의했다. 예로 든 것이 신카이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이다. 1인 제작 방식의 애니메이션으로 불필요한 요소는 모두 없애고 감성을 극대화했다. 덕분에 할리우드나 디즈니 애니메이션처럼 화려한 묘사는 없지만 이를 보는 사람들은 멋지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감성을 저장하는 방법은 있을까? 지나친 감성의 자극은 극한의 반감을 가져온다. 대표적인 사례가 베네통 광고다. 사형수와 심장의 이미지를 통해 보는 이들의 감성을 자극해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덕분에 베네통 매장이 수십 군데 철수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게임에서도 캐릭터의 감성 충돌은 의외로 많다. 실제로 게임을 유심히 살펴보면 어울리지 않는 복식이 비일비재하다. 어울리지 않는 감성의 충돌에 주의해서 복식을 만들어야 한다. 이런 충돌을 제거하는 것이 세밀한 묘사를 하거나 매핑을 추가하는 것보다 중요하다.”
이것이 김형준 상무가 말하는 표현주의에서 배워야 할 게임아트의 감성 전달이다.
■ 명화로부터 얻은 게임아트의 힌트
김형준 상무의 강연을 정리하면 의외로 간단하다. 인상주의에서는 풍부한 빛의 색채를, 미니멀리즘에서는 사물의 본질을 그리는 방법을 배우라는 것이다.
초현실주의에서는 고정관념을 깨고 상식 너머를 그리는 방법을, 르네상스에서는 양식화된 아트를 만드는 방법을, 그리고 표현주의를 통해 감성을 전달하는 방법을 게임아트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명화와 게임아트의 또 하나의 공통점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영화라도 10번 이상 본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MMORPG는 최고레벨까지 몇 백 번은 봐야 한다. 즉 아무리 멋진 비주얼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지루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명화는 수백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명화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게임아트도 명화처럼 될 수 있을까? 김형준 상무는 이를 위해 다섯 가지 요소를 제시했다.
게임을 이해한 아트, 게임 요소와의 결합, 경험할 수 있는 아트, 계속 변화 가능한 아트, 마지막으로 대중적인 아트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아무리 멋진 그림이라고 해도 병풍은 병풍일 뿐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명화는 당시에 팔기 위해 만들었고 대중성을 위해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 그려졌다(게임아트도 상업미술이다). 자신의 그림에만 빠져 있지 말고 옆 사람과 대화하라. 세상의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질 때가 왔다. 게임아트도 이제 새로운 자극으로 진화해야만 한다”고 말하며 강연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