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 국회 법사위에서는 게임물등급위원회의 등급심의 민간이양이 명기된 게임산업진흥법 일부 개정안이 통과됐습니다. 이로써 이르면 오는 7월, 우리나라도 민간 심의기구에 의한 게임물 자율심의가 시작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보다 앞서 민간기구에 의한 게임물 등급분류를 진행하고 있는 다른 나라는 어떤 과정을 통해 게임물을 심의하고 있을까요? 심의에 대한 문제점이나 그들이 생각하는 앞으로의 과제는 무엇이 있을까요?
2일 서울 상암동 누리꿈스퀘어에서 열린 ‘게임시장미래전략’ 포럼에서는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소프트웨어 등급 위원회’(ESRB) 페트리샤 반스 의장이 강연을 진행했습니다. /디스이즈게임 현남일 기자
■ 1994년 설립된 미국의 자율심의기관 ESRB
페트리샤 반스 ESRB 의장 |
ESRB는 지난 1994년 설립된 미국의 대표적인 게임물 자율규제기관이다. 닌텐도와 세가 등 당시 미국 시장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대표적인 게임기업들이 참여해 설립한 비영리 기관으로, 현재는 미국만이 아니라 캐나다에서도 게임 심의를 하고 있다.
ESRB는 게임물의 폭력성, 성적표현, 비속어, 도박 등 30여 개가 넘는 항목을 심의해 3세 이용가부터 6세, 10세, 13세, 17세, 18세의 6가지 등급 중 하나를 부여한다. 또한 해당 게임물의 상세한 심의 내용을 고지하며, 이용자들은 ESRB 웹사이트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등을 통해 이에 대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에서 게임을 판매하려는 사업자들은 반드시 ESRB를 통해 등급심의를 받아야 하며, 게임에 대한 모든 콘텐츠가 담긴 DVD를 제출해야만 한다.
■ 미국 부모의 85%가 게임물 등급심의를 알고 있다
게임사가 게임을 제출하면 ESRB는 3명의 전문위원이 해당 게임의 심의를 진행하게 되며, 최종적으로 전문위원들이 합의하면 등급이 확정된다. 이 과정은 보통 5일에서 7일 정도가 걸리지만, 그보다 훨씬 빠른 시간 안에 심의가 끝나는 ‘약식심의’도 운영되고 있다.
특히 Xbox LIVE 아케이드 게임이나 플레이스테이션 네트워크(PSN) 게임 같은 경우에는 굉장히 저렴한 비용에 약식심의가 진행되며, 보통 24시간에서 48시간 안에 심의가 마무리된다. 이후 약식심의가 진행된 게임은 지속적으로 모니터링을 진행해 심의 내용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체크한다.
ESRB는 미국 전역의 TV 방송과 라디오 등을 통해 등급분류 내용을 홍보하며, 또한 베스트바이 같은 유명 소매점들에서도 홍보영상물과 안내물을 방영한다. 유명 스포츠 인사와 주지사 등을 통한 지역 캠페인도 병행한다. 그 결과, 현재 미국에서는 3세~17세의 자녀를 둔 부모들의 게임물 등급심의에 대한 인식률이 85%에 달한다.
또한 ESRB는 산하에 별도의 광고심의위원회(ARC)를 두고 게임 패키지에 게임등급 분류정보가 바르게 나와 있는지 계속 점검한다. 각 게임사가 진행하는 게임 광고에도 등급정보가 제대로 표시되는지 항상 살펴보고 문제가 있을 경우 시정을 요구한다.
미국에서 3세~17세 자녀들의 ESRB에 대한 인식도를 조사한 그래프. 파란색 그래프가 인식하고 있다고 답한 사람들이며, 2011년 기준으로 85%에 달한다.
■ 영화와 음악에 비해 청소년 보호가 더 잘된다
게임사들은 등급심의에 대해 전폭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만약 게임물에 대한 정보를 심의과정에서 제대로 공개하지 않거나, 게임 광고에서 광고심의위원회(ARC)가 제시하는 기준을 지키지 않는 등의 행위를 한다면, ESRB는 해당 게임사에 법적으로 제재를 가할 수도 있다. 벌점을 매기고, 벌금을 부과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아예 게임물의 등급을 취소하거나 판매를 중지시킬 수도 있다.
ESRB는 산하에 소매업위원회(ERC)도 두고 있다. ERC에는 미국의 대표적인 게임 유통사들이 참여하고 있는데, 자율적으로 6개월마다 감사를 진행하며, 성인 게임물이 아동들에게 판매되는지 등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해 만약 이를 지키지 않는 업소가 있다면 강력한 제재를 가한다.
실제로 현재 미국에서는 게임이 다른 문화 콘텐츠(영화, 음악 등)에 비해 청소년 보호가 굉장히 잘 이루어지고 있다는 조사결과가 나오고 있다.
성인용 문화 콘텐츠가 청소년들을 얼마나 차단하는지를 조사한 그래프. 오렌지색이 바로 게임물로, 영화나 음악 등 다른 문화 콘텐츠에 비해 더 잘 보호되고 있다.
이런 ESRB의 심의 시스템은 미국 내에서도 신뢰할 만한, 그리고 강력한 자율규제로 인정받고 있다. 물론, 미국 일부 지역에서 ESRB의 심의 외에 더욱 강력한 규제로 게임의 판매를 제한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지난 2005년 캘리포니아주의회는 자체적으로 특정 폭력성이 포함된 게임에 대해 무조건 18세 이상 이용가 표시를 의무화하고 이를 어기는 소매상에 벌금을 부과하는 등의 법률을 제정했다. 하지만 미국연방대법원은 해당 법률이 수정헌법 1조에서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폐지시켰다.
■ 나라별 등급분류기관이 모인 국제위원회 설립 추진
기본적으로 ESRB는 PC용 패키지게임과 비디오게임의 심의가 주요 업무였다. 하지만 게임시장의 급격한 변화로 온라인게임과 모바일게임 시장의 규모가 커지면서, 이에 대한 새로운 체계를 마련하는 일이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그래서 최근 ESRB는 전통적인 게임등급 심의구조를 개선한 ‘애플리케이션 등급심의’ 체계를 마련했다. 새로운 애플리케이션 등급심의에 따르면 개발사들은 ESRB가 제시하는 등급양식을 스스로 체크해서 자율적으로 등급을 결정하게 된다. 물론 이후 ESRB는 각 게임사들이 심의를 제대로 진행하고 있는지 계속 모니터링하게 된다.
이런 양식을 모바일 게임사들이 스스로 체크해서 자율적으로 등급을 매긴다.
현재 ESRB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국제 애플리케이션등급심의위원회(가칭 IARC)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IARC 설립 기본계획에 따르면 이 기구는 각국의 등급분류기관 대표들로 구성된 ‘국제위원회’를 통해 운영된다. 위원회는 각국 고유의 등급기준에 기초해 각 국가에 적절한 등급을 분류하기 위한 표준 질의양식을 도출하고, 각국 개발자들과 등급 불만사항에 대한 협의를 진행하게 된다. IARC의 최종목표는 단일 질의양식을 통해 전 세계에 모두 통용되는 등급심의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다.
[페트리샤 반스 의장과의 질의응답]
Q) 등급심의와 홍보에는 막대한 예산이 들 텐데,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가?
기본적으로 ESRB는 게임사들이 내는 심의료를 통해 운영된다. 매출의 대부분이 심의료를 통해 달성되며, 자급자족하고 있다.
정확한 심의료 액수는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일반적으로 약식절차에 따른 심의료는 평균 500 달러(약 55만 원) 정도라고 보면 된다. 100만 달러(약 11억 원) 미만의 개발비가 들어간 저 예산 게임 역시 이 정도의 저렴한 비용으로 심의가 이루어지며, 반대로 그 이상의 개발비가 들어간 블록버스터급 게임은 그만큼 심의료가 비싸다.
Q) 게임의 ‘몰입도’는 별도로 심의하지 않는가?
온라인게임 등에서 유저들이 장시간 게임을 플레이하는 요소에 대해서는 별도로 심의하지 않는다. 물론 ‘게임을 적당히 즐겨라’, ‘절제하라’ 같은 것을 권장하며, 다양한 방법을 통해 캠페인을 벌이기는 한다. 하지만 이는 등급심의기관이 판단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게임사와 가정이 판단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