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포기하는 순간 게임오버’라며 게임 라이터에게 의지를 잃지 말 것을 주문했던 그녀가 이번에는 초보 라이터들을 위한 강연으로 돌아왔다. 25일 넥슨 개발자 컨퍼런스(NDC)에서 진행된 엔씨소프트의 이차선 라이터의 강연을 정리했다. /디스이즈게임 안정빈 기자
엔씨소프트 이차선 라이터.
■ 라이터는 불가능한 것을 말이 되게 포장하는 존재
그 유명한 ‘투명드래곤 이야기’를 게임 스토리로 만들 수 있을까? 주인공이 너무 강해서 말도 안 될 듯하지만, 사실은 가능하다. 정확히는 이미 많은 게임에서 이를 시도했다.
<더블드래곤>에서 주인공 형제는 수 백 명의 상대 세력을 물리치고 여자친구를 구했다. <메탈슬러그>에는 나이프와 권총 한 자루로 외계인까지 격퇴하는 군인들이 등장한다. 소재가 특별해서 가능한 건 아니다. 그냥 위의 게임 모두 ‘짱쎄다는’ 영웅 이야기를 만들었을 뿐이다.
물론 특별한 소재를 살리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실제 게임 제작에서 라이터가 소재를 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미 방향성이 정해진 상태에서 그걸 변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라이터는 어떤 소재에도 어울리는 설정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포털 2>의 영상이 처음 공개됐을 때 사람들은 저렇게 높은 곳에서 땅에 떨어지면 죽는 게 아니냐고 비판했다. 그리고 밸브에서는 자신들의 뛰어난 낙하부츠를 소개하는 영상을 만들었다. 불가능한 것을 말이 되게 하는, 좋은 라이터의 본보기다.
■ 구성력을 갖추려면 어떤 글이든 완성해 보자
그럼 설정과 소재만 잘 맞춘다고 될까? 아니다. 이야기도 재미있어야 한다. 대표적인 예가 게임계의 악동(?)인 우베볼 감독이다. 그가 만드는 영화는 언제나 뛰어난 게임을 원작으로 하지만 같은 소재라고 꼭 영화까지 재미난 건 아니다. 동일한 소재라도 표현 방식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차선 라이터는 개인작품을 무조건 많이 써보기를 권한다. 일기도 좋고, 낙서도 좋다. 다만 무슨 이야기를 쓰든지 끝까지 완성해야 한다. 글의 구성력을 늘리기 위해서다. 집을 지을 때도 설계가 아닌, 직접 집을 짓는 과정에서 문제를 겪게 된다. 글도 마찬가지다. 끝까지 마무리하지 않았다면 정작 중요한 부분은 배우지 못했다는 뜻이다.
어차피 라이터로 일하면서 배울 수 있지 않을까? 게임을 완성하려면 최소 3년에서 길게는 9년이 걸린다. 그동안 회사를 옮기거나 퇴사할 확률도 있다. 운이 좋아 프로젝트를 끝까지 마쳐도 몇 년 만에 이야기 하나씩을 완성해서는 구성력이 늘지 않는다.
“이야기를 끝맺는 경험은 결국 회사 업무에서는 배울 수 없다”는 게 이차선 라이터의 주장이다.
■ 꼭 글만이 라이터의 표현수단은 아니다
스토리는 꼭 글로만 전달해야 하는 건 아니다. 인터넷에는 각종 광고의 배경음악을 바꾼 영상들이 떠돈다. 조인성이 나오는 커피 광고에서 배경음악 하나를 바꿨더니 호러물이 되기도 하고, 남자 둘이 뜨거운 애정행각을 벌이던 장면이 알고 보면 레슬링의 일부장면을 편집한 것일 때도 있다.
딱히 설명이 붙은 것도 아니다. 단지 음악이 바뀌었을 뿐이다. 이차선 라이터는 이를 “서술하지 않아도 되는 힘”이라고 불렀다.
물론 음악 역시 라이터의 영역은 아니다. 라이터가 알아야 할 것은 음악으로 이런 힘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행복한 가정의 외출, 하지만 그 뒤에 닥칠 비극을 보여주고 싶다. 그래서 영상 제작자에게 말한다. ‘행복하지만 슬픈 영상을 만들어줘.’ 답변이 돌아올 리가 없다.
하지만 영상 제작자에게 ‘지금은 행복하지만 분위기는 슬펐으면 좋겠으니 음악만 슬픈 걸로 깔아줘’라고 말하면 의도대로 영상을 만들 수 있다.
라이터의 머릿속에만 있는 느낌을 구체화하기 위한 기능을 알아둬야 한다는 뜻이다. <포털>의 벽면에 등장하는 ‘케이크 이즈 라이’라는 낙서나 <이코>의 심장박동도 좋은 스토리 전달수단이다. 때로는 글이 아닌 작은 변화로도 큰 효과를 낼 수 있다.
■ 게임 플레이는 스토리에 우선한다
자, 이제 이야기도 재미있고 표현도 끝내준다. 그런데 게임 안에서도 재미있을까?
경매장에서 한 노인이 세상에서 두 장밖에 없는 우표를 낙찰받았다. 모두가 노인을 축하할 때, 노인은 갑자기 일어나 그 우표를 찢었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이 우표를 두 장 다 갖고 있는데, 방금 그 중 한 장을 찢었소. 이제 이걸로 이 우표는 전 세계에서 한 장밖에 없는 우표가 됐소.” 짧지만 반전이 있는 흥미로운 스토리다.
그런데 만약 이 스토리가 게임 속 퀘스트였다면 어땠을까? 유저들은 우표를 찢고 ‘하나밖에 없는 우표’를 갖는 순간 이미 무수히 많은 다른 유저들이 이 퀘스트를 진행했다는 걸 알게 된다. ‘하나밖에 없는 우표’가 유저 모두에게 있는 셈이다. 이처럼 게임의 스토리 재미요소는 다른 스토리와 다르다.
<파이널 판타지 8>에서 플레이어는 우주에 떨어진 리노아를 30초 안에 구하기 위해 노력한다. <파이널 판타지 7>에서 에어리스가 죽었을 때 그녀를 주요 캐릭터로 키우던 플레이어들은 분노했다. <모던 워페어 2>에서는 플레이어가 적에 의해 자행되는 민간인 학살을 보며 진저리를 친다. 모두 ‘플레이를 고려한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로 PS3용 게임인 <저니>가 있다. 여행을 떠난 플레이어가 다양한 동료들과 힘을 합치는 이 게임의 개발과정에서 개발자들은 ‘협동’을 위해 캐릭터에 물리판정을 넣었다. 혼자서는 올라갈 수 없는 곳이 나오면 동료를 밟고 올라가는 등 힘을 합치란 뜻에서였다.
하지만 플레이어들은 협동은커녕 낭떠러지에서 다른 사람을 밀쳐서 죽이고 다시 살리고를 반복했다. 협동보다 그 편이 더 재미있기 때문이다. 게임 라이터는 언제나 게임 플레이가 항상 스토리에 우선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스토리는 게임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됐다. <포털>이나 <헤비레인> <바이오쇼크> 같은 콘솔게임은 물론 국내에서도 전민희 작가를 기용한 <아키에이지>나, 시네마틱 영상을 강조한 <블레이드 & 소울>처럼 스토리에 많은 힘을 쏟는 게임들이 늘고 있다.
하지만 이건 일부 업체의 이야기일 뿐, 아직까지도 스토리에 대한 인식은 전반적으로 매우 낮다. 이차선 라이터는 “엔씨소프트 내부에도 설정이라는 직무는 있지만, 라이터라는 직무는 없는 팀이 있을 정도”라며 아직까지는 국내에서 라이터가 필요할 정도로 스토리에 관심을 두는 게임이 많지 않다며 아쉬워했다.
그만큼 라이터에게 필요한 능력도 많아졌다. 글은 물론이고 다른 매체를 통한 스토리 전개도 꾸준히 염두에 둬야 한다. 그만큼 평소에도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접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이 모든 것을 만족시키더라도, 게임에서 스토리는 혼자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게임 스토리는 출시되고 나서 유저 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평가받지 못한다. 팀 동료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라이터는 자신의 스토리를 만드는 것보다 자신의 스토리가 왜 재미있는지 설득하는 데 보다 많은 시간을 쓴다.
때문에 팀이 라이터를 믿어주고, 라이터는 그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어야 제대로된 이야기가 나온다. “결국 모든 개발자의 마지막 덕목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게 이차선 라이터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