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스(디지털 일루전)에는 더 이상 애니메이터가 없습니다.”
<배틀필드 3>를 개발한 다이스(DICE)의 토비어스 달 프로듀서와 미카엘 김 획스트룀 애니메이션 디렉터는 8일 한국게임컨퍼런스(이하 KGC 2012)에서 이렇게 말했다.
게임의 그래픽 퀄리티가 올라가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애니메이터들에게도 점점 더 많은 역할이 요구되고 있다. 그만큼 단순한 애셋 만들기에서 벗어나 기획과 연출 등 다양한 부분에 신경 써야 한다는 게 두 개발자의 주장이다.
물론 이에 따른 개발 상황과 과정의 변화도 필요하다. 다이스 두 개발자의 강연을 디스이즈게임에서 글로 정리했다. /디스이즈게임 안정빈 기자
■ 몇 년 사이에 확 바뀐 애니메이터의 역할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다이스에서 애니메이터의 역할은 단순했다. 사무실 구석에서 게임에 필요한 이미지와 동작들을 만드는 것. 완성된 이미지들은 다른 개발자의 손에 넘어갔고, 이를 게임에 붙이는 것도, 그 결과물을 확인하고 점검하는 것도 다른 개발자들의 역할이었다. 심지어 애니메이터가 자신의 결과물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몇 년 사이에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애니메이션 기술이 발달하고 유저들의 눈높이도 높아졌으며 이로 인해 애니메이터에게 바라는 요구도 대폭 늘었다. 컷신 하나에 수 천 개의 로컬 애니메이션이 들어가고, 런사이클과 얼굴 애니메이션까지 포함하면 할 일은 부지기수로 많다.
여기에 기술이 발전하면서 현실적인 모션캡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되고, 애니메이터의 역할도 단순한 이미지 만들기에서 게임의 기획을 함께하고 전체적인 개발을 주도하는 보다 넓은 범위로 확대됐다. 지금 다이스의 애니메이터는 컷신의 기획과 콘셉트를 함께하고, 스튜디오에서 녹화를 도우며 스턴트맨과 함께 작업하고, 이렇게 얻은 데이터를 직접 손보는 팔방미인의 역할을 맡고 있다.
앞서 다이스에는 더 이상 애니메이터가 없다고 밝힌 이유다. 아래는 다이스의 애니메이터들이 실제로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을 영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회의실에서 (다소 과격한 동작으로) 허가를 받고, 배우들과 함께 촬영하며, 이를 편집하는 과정이다.
애니메이션의 작업 규모가 커지면서 체계적인 프로세스도 필요하다. 다이스에서는 이를 위해 핵심목표들을 바탕으로 애니메이션 작업을 시작한다. <배틀필드 3>의 핵심목표는 사실성, 서사성, 그리고 물리효과였다.
<배틀필드 3>는 사실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믿을 수 있는 그래픽을 위해서다. 게임의 배경은 실제 도시나 지형을 바탕으로 했고 이를 위한 답사도 잦았다. 캐릭터도 실제 군인의 모습을 모델로 삼았고 애니메이션에서는 긴박함도 강조했다. 급하게 총기를 재장전하거나 서두르는 모습을 보이는 등이다. 아름다운 눈이나 배경 대신 급박한 애니메이션에 신경을 썼다는 게 그들의 이야기다.
대신 배경에서는 서사를 강조했다. 프로스트바이트 2 엔진을 이용해 대규모 환경효과를 구현할 수 있었고 빛의 처리도 보다 방대해졌다. 보다 서사적인 배경을 만들기 위해 전장 속에서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전투기나 음영효과에 집중한 도시 등의 이미지를 사무실에 붙여 놓고 영감을 얻기도 했다.
마지막은 물리적인 표현이다. 여기서 물리적인 효과란 단순한 애니메이션을 넘어서서 사운드와 몰입이 뒷받침되는 사실적인 효과다. 예를 들어 아래쪽를 보면 자신의 다리가 보이고, 문을 발로 차서 부숴 버리거나 다른 상대방과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미카엘 김 획스트룀 애니메이션 디렉터는 “이런 목표들이 <배틀필드 3>를 더욱 사실적으로 만들어줬다. 보다 나은 결과물을 위해서는 협력이 잘 돼야 하고, 협력이 잘 되려면 명확한 애니메이션의 목표를 세울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목표를 정했다면 이제 본격적인 제작을 시작할 때다. 다이스는 먼저 애니메이션 제작에 필요한 기능들을 정의했다. <배틀필드 3>를 위해서는 많은 그래픽 리소스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애니메이터들이 직접 자신의 결과물을 빠르게 작업하고 신속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결론적으로 새로운 툴이 필요했다.
다이스가 찾아나선 곳은 같은 EA 내부의 스포츠팀이었다. 자연스러운 사람의 움직임 구현하기 위해서다. 특히 <피파> 시리즈에서 무게 중심을 실어주는 움직임에 주목했고 ‘ANT’라는 내부툴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다이스 역시 <배틀필드 3>를 위해 이 툴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빠르게 결과를 확인한 후 아니다 싶은 동작들은 과감히 버렸고, 각 동작에 이름을 붙여 놓은 후 이를 마치 레고 블록처럼 조합했다. 아래는 다이스에서 ANT를 이용해 미션을 구축하는 영상이다.
남은 문제는 무게감과 얼굴 애니메이션이다. FPS게임에서는 무게를 표현하기가 어렵다. 관성이나 무게를 넣는 순간 유저들은 이를 ‘캐릭터가 제어되지 않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래서 캐릭터의 마무리 동작에 신경을 썼다. 속도를 줄이며 서서히 멈추거나 총기를 돌릴 때 총기 무게 때문에 약간 더 움직인 후 돌아오는 모습 등을 눈속임 모션으로 집어넣은 것이다. 물론 자신이 보는 총의 위치는 그대로다.
애니메이션에서는 모션캡처를 활용했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건 없다는 판단에서다. 먼저 배우들의 움직임을 촬영한 후 하이퀄리티 카메라를 통해 얼굴색과 주름, 표정을 따로 찍었다. 배우들이 먼저 연기한 자신의 목소리를 이어폰으로 들으며 표정을 연기하는 방식이다. 이후 얼굴 표정과 동작을 각각 게임에 적용해 하나의 완성된 모션을 만든다.
토비어스 달 프로듀서는 “우리가 만드는 건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더 좋은 게임이며 게임의 작은 부분을 만드는 것보다 적극적인 참여로 모두와 함께 게임을 만들어 가는 일이 더 값지고 재미있었다”고 밝혔다. 아래는 모션캡쳐 및 적용과정과 개발 도중 생겨난 버그 영상이다. 다이스의 두 개발자는 버그 영상을 공개하며 “꼭 모든 일이 의도대로 되는 건 아니다”는 재치 있는 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