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게임산업에는 더 많은 기록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발자가 더 많은 목소리를 내고, 더 많은 기록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책 <한국게임의 역사>의 공동저자이기도 한 바닐라브리즈의 오영욱 수석개발자는 24일 개막한 넥슨 개발자 컨퍼런스(NDC) 2013 강연에서 이렇게 밝혔다. 일부 유명 개발자를 빼면 초창기 게임개발에 뛰어든 사람들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매년 들려오는 게임업계에 대한 문제나 지적도 20년이 넘게 반복되고 있다.
여기서 탈피하려면 게임업계에서도 ‘역사’를 만들어 보존해야 하고, 단순히 게임의 종류와 숫자를 적는 데 그치지 않는, 진짜 역사를 기록해 나가기 위해서는 결국 개발자들이 남긴 자료가 많아야 한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1970년대 오락실의 등장 이후 20년간 이어진 한국 게임산업의 역사와 기록의 중요성을 말하는 오영욱 개발자의 강연을 정리했다. /디스이즈게임 안정빈 기자
바닐라브리즈 오영욱 수석개발자
■ 게임업계에는 보고 배울 ‘과거의 기록’이 없다
오영욱 개발자는 강연에 앞서 자신이 게임의 역사를 기록하게 된 계기부터 이야기했다. 과거는 매번 반복되고 있다. 게임월드에서 1992년 5월 전자오락에 대한 책임 있는 비판을 요구한 기사는 지금 읽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공연윤리위원회의 PC게임 심의기준이 잘못됐다는 1994년 게임월드의 기사와 게임기에 특수소비세를 부과하겠다는 1995년 게임챔프의 기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한국 게임업계에는 과거의 상황을 돌아볼 수 있는 기록이 없다. 대부분의 산업에는 해당 산업의 역사와 발전과정 등을 다룬 개론서가 있지만 한국 게임업계에는 그조차도 없다. 이미 20년이 넘은 이야기를 자신의 기억에 의존해 이야기할 뿐이다.
대표적인 것이 초창기 게임 개발자들의 이야기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는 이원술, 서관희, 두 명이 만든 게임이 아니다. 하지만 다른 게임 개발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도 나누지 않는다. 다른 게임들도 마찬가지다. 일부 스타 개발자의 이야기가 아니면 누가 어떤 게임들을 만들어 왔는지, 어떤 상황에서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됐는지, 왜 성공했고, 왜 실패했는지 알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오영욱 개발자는 게임의 역사를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자료를 모았다. 하이텔과 나우누리의 자료들을 가능한 백업하기 시작했고, 잡지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자료를 정리하고 나면 과거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 1990년 황금기를 거쳐 32비트 발매 이후 몰락한 비디오게임
1970년대는 게임의 암흑기였다. 오락실에 대한 이야기가 가끔씩 언론에 노출됐지만 불법행위의 온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풍기는 내용들이 전부였다. 1980년대부터 보건복지부의 유기장 관리법에 따라 전자유기장으로 구분, 관리되기 시작했다.
게임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은 국가에서 1983년을 ‘정보산업의 해’로 지정하면서부터다. 이에 따라 정보산업(IT)에 대한 국가지원이 시작됐고 컴퓨터를 해야 21세기를 살아갈 수 있다는 일종의 계몽이 시작된 것도 이 시기다. 마이컴의 전신인 컴퓨터학습 잡지가 처음으로 생겼고, 국내에서는 첫 게임 공략인 <제비우스> 공략도 여기에 실렸다.
1987년 이후에는 외산 게임기들이 한국에 상륙했다. 본격적인 비디오게임기의 보급이다. 이후 비디오게임기는 1990년부터 1994년까지 황금기를 누리게 된다. 많은 게임잡지가 생겨났고, 삼성을 비롯해 많은 업체에서 한글화 타이틀을 출시했다. <드래곤볼 초무투전> <스토리 오브 도어> <판타시 스타> 등이 발매된 시기다. 일본에서는 사무라이의 전국 유랑을 다뤘던 <화랑의 검>을 국내에 들여오면서 주인공을 화랑으로 바꾸고 지도도 한국지도로 바꾸는 본격적인 현지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황금기가 지나고 1995년 32비트 게임기가 보급되면서 비디오게임 시장은 빠르게 몰락했다.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당시만해도 방송에조차 일본어가 나올 수 없었던 만큼 게임도 비슷한 문제로 콘텐츠 부족을 겪었을 거라는 게 오영욱 개발자의 예상이다. 비디오게임은 이후 플레이스테이션이 정식으로 발매되기 전까지 계속 암흑기를 걷게 된다.
■ ‘국산’ <스트리트 파이터 2>를 시작으로 IMF까지, 황금기를 유지했던 PC게임
PC게임은 비디오게임보다 조금 늦은 1987년부터 빛을 보기 시작했다. 당시 최초의 국산 상용게임 <신검의 전설>이 나왔고, 이후 1990년대에 접어들어 정품 게임시장이 열렸다. 이른바 ‘소프트하우스’라고 불리는 장소에서 돈을 받고 불법으로 소프트를 복사해 주던 시기다. 동서게임채널 등의 유통사도 생겨났으며 발매는 하지 않지만 잡지 등에 자신의 게임을 투고하는 <초롱이의 모험> 같은 아마추어 게임도 다수 늘어났다.
1992년부터는 IBM 호환 PC의 시대가 열렸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IBM PC용 게임으로 발매된 건 <폭스레인저>다. 이를 시작으로 다수의 국산게임이 나오면서 불법시장에도 특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소프트하우스의 주인들을 시작으로 국산게임은 불법복제하지 말자는 계몽운동이 벌어진 것. 스스로의 자정이 가능했던 시기다.
한국 PC게임은 1993년 ‘국산 <스트리트 파이터 2>’라는 게임이 개발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PC통신에 ‘류’만 등장해서 움직이는 <스트리트 파이터 2>의 소스를 올렸고, 다른 개발자들이 여기에 캐릭터를 붙이기 시작한 것.
당시 하이텔에서는 국산 <스트리트 파이터 2>를 위한 개발 세미나가 열리고, 이를 기폭제로 해서 하이텔 게임동호회가 분리돼 나올 정도였다. 엄연히 말하면 불법이고, 실제로 미국 저작권 업체에서 문제를 삼기도 했지만 한국의 게임 개발자가 크게 늘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이후 폭넓은 인프라와 함께 PC게임의 대도약이 시작됐다. 1995년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를 비롯해 <창세기전> <망국전기> 등의 게임이 쏟아져 나오고 1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1997년 이후 PC 보급이 증가하면서 <캠퍼스 러브스토리> <임진록> <장군> <서풍의 광시곡> 등 다양한 장르의 게임들이 만들어졌다. 한국 PC게임의 황금기다.
하지만 IMF 사태 이후 PC게임은 급격히 무너졌다. 회사들은 점점 사라지고, 게임 잡지에서 번들로 공짜게임을 주기 시작했다. 때마침 저장매체로 CD를 이용하게 되고,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불법복사 CD와 파일공유 문제도 생겼다. 팔린 양보다 업데이트의 다운로드 횟수가 100배 가량 높았다는 <화이트데이>나 2,000 장이 팔렸지만 게시판 문의는 끊이지 않았다던 <씰> 등도 이 시기의 게임들이다.
이후 <마그나카르타>와 <천랑열전>을 마지막으로 국산 PC게임은 사실상 전멸하게 된다.
■ 1994년 이후 발전을 거듭한 온라인게임
온라인게임 시장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도 PC게임과 비슷한 1994년이었다. 7월의 <쥬라기 공원>과 8월의 <단군의 땅>을 필두로 다양한 머드게임들이 개발됐고, 대학교 연구실 등에서 최신 소프트를 빠르게 접할 수 있었던 개발자들이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송재경 등의 개발자가 나타난 시기다.
그러나 수익 대부분을 통신사에 넘겨야 했던 머드게임은 수익구조가 좋지 못했고,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철수하게 된다. <쥬라기 공원> 역시 3를 끝으로 서비스를 종료했다.
1998년에는 <아크메이지> 등 웹게임도 모습을 드러냈다. <아크메이지>는 미국에도 수출하고, 투자까지 받는 등 다양한 활약을 보였지만 부분유료화 개념이 없던 당시에 광고수익으로만 게임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아크메이지>는 서비스 종료의 수순을 밟았다.
2000년부터는 하드코어한 온라인게임들 대신 <포트리스 2>와 <퀴즈퀴즈>, 그리고 한게임을 통한 다양한 캐주얼게임 등이 서비스를 시작하고 게이머의 연령대를 대폭 넓히는 데 공헌한다. 계속 몸집을 늘린 온라인게임은 <라그나로크> <팡야> <카트라이더> <리니지 2> 등 지금도 친숙한 게임들을 만들어내며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이후는 현재진행형이다.
■ 해외에서도 막 시작된 게임역사의 기록
오영욱 개발자는 게임역사를 기록하는 일이 해외에서도 고민 중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해외의 게임역사에 대한 기록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게임의 시대’와 ‘게임의 역사’ 역시 지금은 절판됐다. 판매량이 많지 않고 출판사에서 반기는 책도 아닌 만큼 최근에는 아예 킥스타터를 통한 공개 모금활동을 진행 중이다.
논란도 많다. 미국의 현대미술관에서는 최근 게임을 전시했지만 단순히 게임을 박제로 만들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심시티>의 그 콘텐츠를 단순한 영상만으로 어떻게 전시할 수 있냐는 것이다. 실제로 오영욱 개발자 역시 책을 쓰면서 기록으로 남지 않는 TCG가 미친 영향이나 인디게임의 영향 등 방대한 자료와 이야기를 어떻게 다룰지 문제에 부딪혔다.
다만 그 중요성은 다들 공감하고 있다. 올해 1월 일본 교토에서는 게임보존에 대한 학회가 열렸고, 오는 6월에는 게임역사 기록에 대해 논의하는 ‘히스토리 오브 게임 컨퍼런스’가 캐나다에서 열린다. 아직 늦지 않은 만큼 이제라도 게임역사 정리에 본격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오영욱 개발자가 조사한 국내의 게임 역사기록에 대한 상황은 열악하다. 하이텔과 나우누리가 폐쇄되며 자료가 모두 사라졌고, 온라인게임은 특성상 보존도 불가능에 가깝다. 지금의 <바람의 나라>를 보존한다고 해서 1996년의 <바람의 나라>를 즐긴 유저와 같은 경험을 제공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역사의 기록은 필요하다. 그래서 오영욱 개발자는 지금이라도 많은 개발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더 많이 내고 더 많은 기록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일례로 <킹 오브 파이터즈> 시리즈에 캐릭터로까지 등장한 김갑환 회장만해도 그 사람의 초창기 게임산업 이야기는 후대에게 엄청난 재산이 된다.
오영욱 개발자가 하이텔의 기록을 저장할 당시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기록을 뭐하러 남기냐”는 것이었다.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가 담길 수도 있는 만큼 기록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아까운 정보를 다른 이에게 주기 싫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게임산업 자체가 발전하고 후대에서도 보고 배울 수 있는 사례들을 만들고 싶다면 하나라도 더 기록하고 정리해야 한다는 게 오영욱 개발자의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