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시작하고 웅장한 화면을 배경으로 게임의 스토리가 화면 아래에서 서서리 올라온다. 세상의 평화를 위협하는 마왕이 어쩌고 저쩌고… 정의감에 투철한 용사가 어쩌고 저쩌고……. 무슨 게임이라고 지정할 필요조차 없이 많이 본 모습. 하지만 넥슨 기획조정실의 박범진 팀장이 말하는 ‘최악의 스토리’의 예다.
게임에서 스토리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스토리 텔링은 중요하다. 단순히 좋은 이야기를 쓰기보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공감시킬지 고민하라는 박범진 팀장의 넥슨 개발자 컨퍼런스(NDC) 강연을 정리했다. /디스이즈게임 안정빈 기자
박범진 팀장은 강연에 앞서 게임과 스토리에 대한 존 카멕의 유명한 말을 인용했다. “게임에서 스토리는 포르노의 그것과 같다” 그럼 포르노에는 정말 스토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박범진 팀장은 실제 포르노의 스토리를 종류에 따라 구분했다.
일단 병원과 사무실, 집, 거리, 전철, 목욕탕 같은 배경이 있고, 등장인물의 성별과 숫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진다. 등장인물의 직업이나 영상의 장르(?)도 중요하다. 이 조건들을 모두 섞으면 나올 수 있는 포르노의 스토리는 몇 천, 몇 만 개에 달한다. 스토리에 따라 팬층이 다른 만큼 구분도 확실하다.
사실은 포르노에서 스토리가 중요한 걸까? 그건 또 아니다. 포르노의 스토리 종류는 다양할 지 몰라도, 도입부의 사진 한 장만 갖고 대부분의 전개를 유추할 수 있을 만큼 평면적이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그럼 스토리가 중요하지 않은데 어떤 포르노는 명작(?)이 되고, 어떤 포르노는 명작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이유는 몰입감이다. 같은 배우에 비슷한 스토리를 채택하더라도 연출에 따라, 이야기의 플룻에 따라 각별히 몰입되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이 바로 ‘스토리 텔링’이다.
■ <다이하드>에서 첫 액션까지 20분이 걸리는 이유는?
게임도 마찬가지다. 스토리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스토리 텔링은 중요하다. 둘을 헷갈리는 사람도 많지만 사실 스토리와 스토리 텔링은 완전히 다른 존재다. 예를 들어 <다이하드>는 액션영화다. 액션영화는 화려한 액션이 주가 되고, 이야기가 있는 도입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스토리를 화면 가득 적어주고 곧바로 액션부터 시작하면 된다. 많은 게임들이 그렇듯.
하지만 <다이하드>는 그렇지 않았다. <다이하드>에서 첫 액션이 나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무려 20분이다. 영화의 1/4 이상이 액션 하나 없는 도입부에 사용된 것이다. 그 아까운 시간 동안 감독은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 관객과 주인공의 공감이다.
20분 동안 주인공의 이야기와 고민을 들으며 관객들은 주인공에 공감하고 몰입한다. 그리고 공감이 시작되는 순간 주인공의 경험은 곧 자신의 경험이 된다. 벌써 25년이나 지난 액션영화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전처와 재결합하기를 원하고 테러에 휘말리는 과정이 어렴풋이 기억나는 이유도 관객과 주인공이 공감했기 때문이다.
■ 스토리 텔링의 기본은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
그럼 스토리 텔링은 어떻게 할까? 여기엔 일정한 공식이 있다. 먼저 캐릭터 설계다. 잘 만든 스토리텔링에서는 주인공들이 비정상적일 만큼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의 목표는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다짜고짜 세계 평화 어쩌고 하는 주인공이 있더라도 관객들은 공감하기 어렵다. 당장 북한의 지도자가 세계평화를 위협한다고 총 들고 38선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 없듯.
<다이하드> 역시 주인공의 목표는 테러와의 전쟁이 아니었다. 그의 목표는 전처와 합치는 것뿐이었다. 테러와의 전쟁은 그 과정에서 생긴 일이다. <에일리언>에서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는 아이를 지키려는 리플리나, <반지의 제왕>에서 반지 하나를 위해 호빗들의 조력자가 되는 골룸도 목표는 거창하지 않고,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다.
잘 만든 캐릭터는 뚜렷한 장점과 단점을 갖고 있다. 아마추어가 자주하는 실수는 완벽한 캐릭터를 만드는 것이다. 잘 생기고 잘난 캐릭터는 단순히 보기엔 멋질지 몰라도 스크린에 올려놓고 나면 아무런 매력이 없다. 오히려 위선적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그래서 캐릭터에는 중요한 결점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스타워즈>의 한솔로는 심각하게 자기 중심적인 성격이다. 여자를 좋아하고 밥맛 없는 말투를 시종일관 보여준다. <가위손>의 주인공은 사회부적응자이고,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에서 잭 니콜슨은 강박증환자를 연기한다. 그리고 이들은 지금 최고의 캐릭터도 남아있다. 만약 자신이 강박증이라면, 만약 자신이 사회부적응자라면 저랬을 거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적대자도 마찬가지다. 그냥 순수한 악만 추구하면 비현실적이고 무섭지도 않다.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는 초창기 우주를 지배할 것이라 외치고 다니는 평면적인 캐릭터에 불과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마스크를 벗고 ‘아임 유어 파더’를 외치면서 최고의 악역이 됐다. 자신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찌르는 것을 지켜보고 그 칼로 자신의 입이 찢긴 조커도 마찬가지다. 약간의 인간적인 면모는 적대자를 더욱 사악하고 카리스마 있게 바꿔준다.
여기에 모든 스토리는 캐릭터의 잘못된 의사결정에서 시작돼야 한다. 만약 캐릭터가 제대로 된 의사결정을 했다면 그건 이미 스토리가 아니다. 해결된 스토리, 끝나버린 스토리일 뿐이다. 이야기가 계속되기 위해서는 잘못된 의사결정이 이어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도 관객의 공감대를 얻는 건 기본이다. 앞서 캐릭터에 강한 의지를 심어줘야 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악이 아닌 자신의 의지와 목적에 따라 잘못된 결정을 내림으로써 공감대를 형성하고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잘 만든 캐릭터를 설계할 때는 위의 조건에 맞추되 자신이 아는 사람을 대입하는 편이 좋다. 머릿속에서만 나온 캐릭터는 평면적이기 십상이지만 주변의 사람을 따온 캐릭터는 한층 복합적이고, 살아있는 느낌을 준다.
■ 스토리 텔링의 기본은 초반 10분과 계속된 반전
캐릭터를 만들었다면 세부적인 플룻을 짤 차례다. 플룻을 구성할 때는 먼저 진부함을 숨겨야 한다. 헐리우드의 시나리오 전문가 로버트 맥기는 세상 모든 스토리가 한 줄로 요악된다고 했다. 어느 날 주인공의 평온이 깨지고, 이를 회복하려는 주인공을 방해세력이 막는다. 사실 90%의 스토리는 이 틀 안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런 뻔한 스토리를 포장하는 것이 작가의 역할이다.
특히 최근 영화에서는 초반의 10분이 흥행을 좌우하게 되면서 많은 작가가 초반의 10분을 만드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한다. 실제로 작가들은 100개의 시놉시스를 짜서 90개를 버리고, 그중 하나를 골라 10분의 스토리를 전력으로 짠 후 주변에 보여주고 더 읽고 싶은지를 묻는다.
박범진 팀장은 게임도 똑같다고 판단했다. 게이머가 게임을 시작하고 10분 안에 재미를 보여주지 않으면 나머지 내용은 평가조차 받지 못한다. 그래서 10분 안에 개발리소스의 절반을 쏟아 부을 만큼 화려함을 보여줘야 하고, 모바일게임 같으면 1분의 플레이로도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현재 상황과 선택에 따른 미래를 계속 보여주고 거기서 예상과의 격차가 클수록 관객은 만족하게 된다. 사실 숨겨둔 동생이 있다거나, 정체 불명의 등장인물이 등장하는 것도 반전이다. 예상과 어긋난 결말은 호기심을 낳고, 호기심은 게임을 하는 데 가장 강력한 동기부여가 된다.
■ 스토리 텔링을 하되 ‘스토리’를 ‘텔링’하지 마라
공감대를 위해서라도 초반 몰입은 중요하다. 최근 영화는 사건이 생기는 1장과 이야기가 펼쳐지고 위기가 생기는 2장, 절정을 거쳐 결말에 다다르는 3장으로 구성된 3장 구조를 따른다. 그리고 대부분의 1장에서는 앞서 말했던 주인공의 평화가 깨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1장의 사건은 주로 공감대를 얻기 쉬운 비극으로 이어지는데, 이 비극이 무조건 관객의 공감을 얻고 시작해야 한다. 여기서 공감을 얻는데 실패한다면 그 이상의 이야기는 필요조차 없다. 주인공의 목표, 주인공이 목표를 이루지 못했을 때 생기는 문제 등이 모두 여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고 해서 단순히 스토리를 서술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곤란하다. 비주얼 미디어에서 말이나 글은 힘을 잃은 지 오래됐다. 이야기는 일련의 액션, 즉 행동이 모여서 스토리가 되는 방식으로 진행돼야 한다.
예를 들어 영화 <죠스>를 보면 영화 속에 나오는 건 상어를 막기 위한 일련의 행동들이다. 등장인물은 이제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 행동 자체가 스토리텔링이 된다.
게임에서는 플레이스테이션 2의 <이코>다 대표적이다. <이코>의 스토리는 주인공이 소녀를 만나서 탈출하는 것. 그 것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독특한 점이 하나 있는데, 특정 버튼을 누르면 주인공이 소녀의 손을 잡는다.
적에게 잡혀가는 소녀의 손을 잡아 끌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소녀를 잡아준다. 그리고 이 버튼을 누르는 동안 소녀의 심장박동은 패드를 통해 진동으로 전해진다. 그것만으로 <이코>는 최고의 스토리텔링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 스토리텔링은 RPG의 전유물이 아니다
박범진 팀장은 스토리텔링이 주로 쓰이는 일부 게임이 아닌 어디에나 붙일 수 있는 요소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가 가상의 예로 든 게임은 퍼즐이다. 장르와 상관없이 퍼즐게임을 하나 만들고 첫 시작을 ‘빚갚기’로 시작한다. 주인공은 사업을 말아먹고 광산회사의 빚을 갚아야 한다. 그 과정이 광물을 캐는 퍼즐로 구성됐다고 치자.
처음에는 빚을 갚는 것으로 시작한 퍼즐은 스테이지를 계속 클리어하며 일정 금액을 넘는 순간 빚을 모두 갚고 직원을 채용하며 사업을 확장하게 된다. 여기서부터는 사업영역이 넓어지며 게임에서도 다양한 모드를 즐길 수 있도록 변한다.
퍼즐게임은 이어지고, 이내 경쟁자가 등장한다. 경쟁자는 스토리 상으로 플레이어의 사업에 간섭하며, 이는 게임에서 퍼즐블록을 바꾸거나 방해아이템을 보내는 식으로 표현된다.
경쟁자를 이기고 나면 사실은 직원으로 채용했던 광순이가 첩자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광순이가 이어받은 경쟁자의 회사와 다시 전투를 벌이게 된다. 퍼즐을 계속 깨서 광순이까지 처치(?)하고 나면. 그녀가 사실은 주인공의 채굴산업으로 고향을 잃고 복수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서 게임은 엔딩이 나오고, 이후의 플레이는 채광회사가 아닌 각 마을마다 지하수를 대서 우물을 만들어주는 회사를 운영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이를 이용해서 실제로 게임을 클리어한 사람이 1만 명이 넘을 때마다 아프리카에 우물을 지어주는 마케팅도 함께 진행한다. 단순한 퍼즐 하나에 이야기를 심은 셈이다.
비디오게임이 사람들을 울릴 수 있을까? 박범진 팀장은 스스로의 질문에 가능하다고 답했다. 넥슨은 많은 자본을 갖고 있고, 자본은 최고의 인재를 모아줄 수는 있다. 하지만 사람을 움직이는 건 결국 마음을 움직이는 스토리텔링이다.
박범진 팀장은 마지막으로 좋은 스토리텔링을 원한다면 자신의 이야기를 게임에 담을 것을 주문했다. 캐릭터에서 말한 것처럼 머릿속에서 생각한 것과 실제로 겪은 것은 다르다. 실제로 마지막에 언급한 가상의 퍼즐게임 역시 결혼 후 사업에 실패하며 심각한 재정 문제를 겪고, 돈만 보며 살아오던 자신에 대한 반성과 두려움을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다.
그는 위의 규칙들을 지키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인생에 대한 화두, 자신의 가장 큰 고민들을 스토리텔링에 넣을 수 있다면 최고의 이야기가 될 것이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