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노동이란 배우가 연기를 하듯 타인의 감정을 맞추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통제하는 일을 말한다. 은행원·승무원·전화상담원처럼 직접 고객을 응대하면서 자신의 감정은 드러내지 않고 서비스하는 직업 종사자들이 해당된다.
게임산업 역시 유저에게 게임을 서비스하는 산업인 만큼 유저를 응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 게임마다 게임 속에서 유저의 의견을 들을 수 있는 운영자와 보다 직접적인 상담을 위한 전화상담원 등 CS(고객만족)팀 상주하고 있다.
디스이즈게임은 게임 업체에서 근무하고 있는 감정노동자들과 직접 만나 대화를 통해 그들이 어떠한 일을 하고 있고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사례를 수집하고 정리했다.
※ 취재원에게 의도치않은 피해가 갈 수 있는 점을 고려해 게임업체와 상담원의 실명을 밝힐 수 없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각양각생 게임운영자와 콜센터의 모습
#1
모 게임회사 콜 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A양.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온 음침한 신음 소리에 A양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유저는 자신의 계정이 왜 차단됐냐고 따지며 당장 복구시켜달라는 요구를 했다. 차단사유를 확인한 결과 그 유저는 심각한 수준의 음담패설을 자유게시판에 적어 계정이 차단된 것이다.
A양은 차단 사유를 유저에게 말했지만 유저는 그런 적 없다며 자신이 쓴 글을 그대로 읽어달라고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하아... 난 그런 말 한적 없어. 내가 뭐라고 했는데? 한 번 읽어봐”
“고객님. 성적으로 심한 말이 많아서 불러드릴 수 없습니다. 대신 신고된 캡쳐화면을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 거 필요 없고, 그냥 니가 읽어봐. 내가 뭐라고 했는데?”
“아뇨, 고객님. 제가 메일을...”
“그냥 자기가 한 번 읽어봐. 빨리”
30분 넘게 유저와 실랑이를 벌이던 A양은 끝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2
“야, #%@# 빨리 내 무기 복구해달라고 이거 니네 책임이잖아!”
“고객님, 아이템 강화중 아이템 손실은 고객 과실이기 때문에 복구가 불가능합니다”
“어차피 회사에 찾아가면 다 해줄 거잖아. !@#& 서로 귀찮게 하지 말고 빨리 복구해달라고 !@#$”
“고객님. 회사 정책이기 때문에 회사에 찾아오셔도 아이템 복구는 불가능합니다”
“그래? 야 너 이름 뭐야? 내일 내가 너희 회사 찾아가서 어떻게 하는지 두고 봐. 각오 단단히 해라”
다음날 그 유저는 회사로 찾아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B씨의 이름을 부르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욕설을 퍼 붇기 시작했다. 겁이 나긴 했지만 B씨는 유저와 통화 당시 회사의 단호한 규정을 상부로부터 들었기 때문에 유저의 요구를 회사에서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을 가졌다.
하지만 B씨의 예상과 달리 윗 선에서는 유저의 요구를 들어주고 돌려 보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B씨는 이렇게 쉽게 들어줄 거면 대체 내가 왜 욕을 먹으면서까지 유저의 요구를 막은 것인지 업무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3
“임신입니다. 축하합니다. 임신 4주차니 몸조심 하세요”
결혼 1년 차 C양은 힘들게 아이를 가졌지만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 임신상태에서 계속 일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C양은 고등학교 졸업 직후 D게임회사 콜 센터에 입사해 현재 4년째 근무하고 있다. 남들은 전화상담원의 업무가 힘들다고 기피했지만 C양은 어려서부터 D회사의 게임을 좋아했던 만큼 애사심이 남달랐다. 고객과의 실랑이도, 다른 부서와의 힘 겨루기도 C양은 모두 회사 발전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버텨냈다.
하지만 아이를 가지고 나니 자신의 일이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주진 않을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유저의 욕설을 듣고 통화 내내 우는 여자 고객이나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사람과 통화하다 보면 태교에 악영향을 미치진 않을지 걱정이 되곤 한다.
한달 전 임신으로 같은 고민을 했던 동료 D양은 결국 퇴사를 했다. 병원에서 유산기가 있으니 당장 그만두라는 주의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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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먹는 건 일상 다반사. CS팀의 업무
전화상담원으로 일을 하면 가장 먼저 욕을 먹는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전화로 욕을 먹기 때문이다. 계속 욕을 듣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마음에 상처를 입고 우울증까지 오기도 한다.
욕을 하는 유저는 그나마 대응하기 수월한 편이다. 바라는 바가 뚜렷하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면 문제는 끝난다. 그런데 전화로 음담패설을 하거나 통화 내내 울기만 하고 또는 악의적으로 전화상담원을 괴롭히는 경우는 해결이 어렵다. 반복적인 실랑이만 오고 가게 된다.
운영자 역시 사정은 비슷하다. 직접적으로 욕을 듣지는 않지만 보스 몬스터 소환 아이템으로 몬스터를 잔뜩 소환해 초보 사냥터를 초토화시키거나 끊임없이 욕을 하고 시비를 걸며 다른 유저에게 피해를 주는 유저들을 수시로 제제해야 한다.
또한 게임 내 이벤트 등을 위해 운영자가 게임에 접속하면 끊임 없이 따라 다니며 말을 거는 유저들이 있다. 만약에 질문을 안 들어주거나 답변이 늦으면 이들은 자신을 무시한다며 공개적으로 운영자를 비난을 하기도 한다.
특히 게임은 다른 서비스와 달리 24시간 이어지는 만큼 게임운영 역시 끊임 없이 이어져야 한다. 게임운영자들은 새벽 세시에도 잠옷바람으로 회사로 뛰어가거나 애인과 데이트 도중에 회사로 돌아가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한 CS 담당자는 “사실 고객상담을 할 때 대부분의 유저는 별탈 없이 상담이 이뤄진다. 하지만 우리가 전화를 받자마자 심한 욕부터 하는 일부 유저가 있다. 하도 욕을 많이 들어서 이젠 욕에 무덤덤해진 것 같다. 그러면서도 가끔씩 울컥하고 올라오는 감정 조절이 어려울 때가 있다. 적성에 맞지 않거나 감정이 여린 사람들은 적응하지 못하고 금방 이탈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말했다.
■ 고객에게 진실만을 말하고 싶다
수년간 고객 응대 서비스를 해온 만큼 게임업체들도 CS팀을 보호하기 위한 기본적인 시스템이 마련돼 있다.
유저가 욕을 일정횟수 이상 할 경우 상부보고 없이 전화를 끊을 수 있고, 욕을 하지 않더라도 의도적으로 직원을 괴롭히기 위한 행위를 한다면 상부에 연락해 검토 후 상담을 연기하거나 전화를 끊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CS팀 보호 시스템을 벗어나 전화상담원이나 운영자를 괴롭히기 위한 행위는 여전히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일부러 퇴근시간에 맞춰 전화상담원에게 전화해 게임과 관련 있지만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을 계속 질문하며 3시간 이상 통화를 하며 퇴근을 막기도 한다. 심지어 유저가 잠시 볼일이 있을 때에는 보류를 눌러서 대기하도록 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욕설이나 음담패설이 아니고 게임관련 통화기 때문에 함부로 전화를 끊을 수도 없다.
또한 CS팀은 유저의 의견을 회사에 전달하고 회사의 정책을 대변하는 역할고리도 하는 만큼 유저와 업체 사이의 조율에 대한 압박도 크다.
예를 들어 서비스 규정에 명시돼 있는 부분대로 CS팀에서 처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저가 회사로 와서 소리를 지른다는 이유로 규정과 다르게 처리 되기도 한다. 또한 유저의 무분별한 욕이나 성희롱을 견디지 못해 전화를 끊었을 경우 CS팀에게 불이익이 가기도 한다.
이어서 그는 “유저들이야 그들이 원하는 것이 있으니까 욕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특별히 바라는 것은 없다. 그저 ‘고맙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만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게 우리가 이 일을 하는 목적인 만큼 우리도 그 말을 듣기 위해 유저들에게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