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기술은 국방력 증진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게임을 이용해 군사훈련을 하고 있고요. 게임을 단순한 오락으로만 치부하지 말고, 군사 목적으로 활용할 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KGC 2013에 국방과학연구소 제7기술연구본부가 참여했다. 제7기술연구본부는 공군과 관련된 신규 장비를 고안하고 개발하는 부서다. 이 부서는 KGC 2013에서 강연을 했고, 전시 부스를 차려 일반인들에게 소형 무장 헬기 ‘가상시제’를 체험할 기회도 제공했다. 이 가상시제에 들어가는 소프트웨어는 게임 개발에 쓰이는 하복 엔진으로 개발됐다.
왜 군사장비를 만들고 시험하는 기관이 게임 기술을 이용해 신형 헬리콥터를 가상으로 체험하는 설비를 만들었을까? 그리고 왜 게임업계 행사에 참여했을까?
이러한 의문에 김성호 선임연구원은 “게임을 이용해 국방력을 향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고 답했다. 그 이유를 인터뷰와 강연을 통해 들어봤다. 먼저 소형 무장 헬기 ‘가상시제’를 조작하는 원리와 방식을 영상으로 살펴보자. /디스이즈게임 전승목 기자
국방과학연구소 협력업체 ‘리얼타임비쥬얼’의 임익환 대리의 시연
■ 게임 기술로 ‘가상시제’를 만들어 군비를 줄인다?
국방과학연구소 제7기술연구본부 김성호 선임연구원
먼저 김성호 선임연구원은 ‘가상시제’가 무엇인지부터 설명했다. 가상시제는 ‘아직 개발되지 않는 무기를 가상으로 미리 체험할 수 있는 장치’를 뜻한다. 그는 ‘이미 개발된 무기’를 100% 가상으로 재현하는 군사 시뮬레이션과 다른 개념임을 강조했다.
용도도 다르다. 군사 시뮬레이션은 이미 있는 장비를 참고해 100% 재현했기 때문에 조종 훈련에도 쓸 수 있지만, 가상시제는 개발 중인 신규 장비를 가상으로 구현한 것이라 군사 시뮬레이션보다 정밀도가 떨어진다.
단, 사용자는 가상시제를 통해 앞으로 개발될 장비가 어느 정도의 성능으로 만들어질지, 어떻게 조작해야 하는지 실감나게 체험할 수 있다. 기술자의 설명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규 장비의 기능을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장치라고 볼 수 있다.
소형 무장 헬기의 가상시제는 하복 엔진을 이용해 만들어졌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상시제로 장비를 개선할 방도를 찾는 것도 가능하다. 가상시제로 신규 장비를 생생하게 체험한 사용자는 장비 운영 순서를 실전에 맞게 간소화하거나 조작방식을 사용자의 편의에 맞게 고쳐달라는 아이디어를 쉽게 떠올리기 때문이다.
이는 실전에 쓰일 무기를 만들어야 하는 제작자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시험기를 만들지 않아도 신규 장비의 개선점을 찾을 수 있어서다.
가상시제는 사용자에게도 도움을 준다. 조종 훈련을 할만큼 정교하게 제작되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전술을 시험하는 용도로 쓸 정도는 되기 때문이다. 김성호 선임연구원은 “실전 장비를 다뤄본 사용자라면, 가상시제와 현실의 차이를 감안하며 전술을 테스트할 수 있다. 이론으로만 배워온 포위전술, 협동전술을 격추당할 걱정 없이 마음껏 써볼 수 있는 셈이다”며 가상시제의 이점을 강조했다.
■ “군대보다 그래픽 기술이 좋은 게임업체의 힘을 빌리고 싶다”
가상시제의 정의와 필요성을 소개한 김성호 선임연구원은 왜 게임 기술에 관심을 보이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본래 군사 시뮬레이션과 가상시제의 영향을 받았던 게임들이 이제는 현실의 전쟁을 생생하게 재현해내는 수준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물론 군대가 게임 기술을 활용하지 않고도 전쟁을 재현할 수는 있다. 하지만 ‘게임 기술’로 전쟁을 재현하는 것과 ‘군대가 보유한 기술’로 재현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군대의 기술은 수치상으로 매우 정확하고 사실적인 전략적 상황을 재현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래서 게임처럼 ‘눈에 보이는 전황’을 사실적인 그래픽으로 재현하는 기술은 뒤떨어져 있다.
군사훈련용 게임 <버추얼 배틀 스페이스 2>(Virtual Battle Space 2).
현대 군사훈련은 눈에 보이는 상황도 사실적으로 만들어야 더 효율적으로 실행할 수 있기에, 군대가 사실적인 그래픽을 만들어내는 기술에 욕심을 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군대에는 전문적인 그래픽 디자이너가 부족하다. 사실적인 그래픽을 구현하려면 내부에서 기술자를 키우기보다 게임업계의 기술을 도입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고 빠르다.
게임 기술을 이용한 군사훈련을 유용하게 활용하는 미군에게 자극받은 탓도 있다. 김성호 선임연구원은 “미군은 <버추얼 배틀 스페이스>라는 군사용 게임을 사용하고 있다. 이 소프트웨어를 활용하는 미군은 날씨와 지형, 예산에 구애받지 않고 훈련을 한다”고 밝혔다.
물론 게임 기술을 있는 그대로 당장 군대에 도입할 수는 없다. 게임에서 구현된 물리효과가 실제 물리현상과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게임에서 총을 쏘면 벽에 구멍이 나지만, 실제 총으로 벽에 구멍을 내지 못할 수도 있다. 이 차이가 해결된 뒤에야 게임 기술이 군대에 도입될 수 있을 것이다.
■ 오큘러스 리프트, 더 발전하면 군용 훈련장비 대체할까?
흥미롭게도, 김성호 선임연구원은 게임 하드웨어가 군대에 도입될 가능성도 가늠해 보고 있었다. 그 이유를 직접 물어봤더니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인상 깊지 않았는데, 올해는 오큘러스 리프트의 품질이 상당히 좋아졌습니다. 물론 품질자체는 군대에서 사용하는 헤드 마운티드 디스플레이, 헬멧 마운티드 디스플레이(이하 HMD)가 좋죠. 다 좋은데, 군용 HMD가 살인적으로 비쌉니다. 헬리콥터 조종사용 HMD 중에는 1개에 3억 원씩 되는 제품도 있습니다. 그마저도 외국 생산업체가 한국에게 팔지 않아서 못 구하는 형편이죠.”
반면 오큘러스 리프트의 가격은 (군대의 입장에서 보면) ‘고작’ 300 달러 수준이다. 오큘러스 리프트의 품질이 더 좋아진다면 가격 대비 효율 면에서 군용 HMD와 경쟁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를 일이다.
KGC 2013 오큘러스 VR 부스에서 오큘러스 리프트를 체험하는 모습.
물론 오큘러스 리프트도 개선돼야 할 점이 많다. 화면 품질도 품질이거니와, 군대는 바깥 세상도 볼 수 있는 HMD를 선호한다. 작전 지도를 보면서 가상의 전투를 수행해야 훈련의 효과가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김성호 선임연구원은 “오큘러스 리프트 같은 제품이 발달하는 것도 좋은데, 국내업체들도 이런 장비를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생산 비용 때문에 HMD 개발 프로젝트를 끝까지 추진하는 업체가 적다는 것은 알지만, 적어도 국방력을 증진시킬 게임 기술이 우리나라에서 나와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끝으로 그는 “현실이 이런데 아직도 게임이라는 단어만 보고 연구를 무시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게임 기술에서 영감을 얻고 있는 형편인데 연구 제목에서 게임이라는 단어를 빼야 하나 고민도 된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