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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조승희 총격사건, 또 근거 없는 ‘게임 탓’

태무 2007-04-20 13:02:27

미국 버지니아 공대 조승희 총기난사 사건에 대해 국내외 주요 일간지들이 ‘게임’을 범행 동기로 지목하면서 네티즌들 사이에서 근거가 취약한 추측 기사라는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가 조승희 씨의 고교 동창(익명)과 가진 인터뷰를 통해 “평소 폭력적인 컴퓨터 게임, 특히 <카운터 스트라이크>를 즐겼다”는 내용을 보도했으며, 지난 2000년 한인교회에서 조승희 씨를 지도했다는 목사(익명)는 “승희는 집에서도 방에 틀어박혀 컴퓨터 게임에 지나치게 몰두했다는 게 어머니의 걱정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런 익명의 증언을 인용한 북미 초기 보도를 접한 국내 일간지와 TV 뉴스들도 일제히 게임을 범행의 주요 동기로 보도하고 있다. 중앙일보, 동아일보, 한겨레신문 등은 사설 및 기사를 통해 조승희 씨가 게임을 통해 폭력적인 성향을 익혔으며, 충격적인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 美 경찰 조사에서 드러난 게임관련 증거는 '전무'

 

하지만 현재까지 드러난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조승희 씨와 게임을 연관시킬 수 있는 증거는 거의 없다. 미국 경찰이 조승희 씨의 기숙사 방에서 압수한 물품 중에는 어떤 게임 타이틀이나 콘솔 게임기도 없었다. 또, 현재까지 그의 노트북 속에서는 어떤 게임도 발견되지 않았다.

 

조승희 씨의 룸메이트 버지니아 공대의 오스트 씨는 CNN 뉴스에 출연해 “조승희가 기숙사에서 비디오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락, 힙합 등 음악에 심취해 음악을 다운로드 받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조승희의 기숙사에 대한 경찰의 수색 결과물 목록. 게임관련 물품은 하나도 없었다.

 

조승희 씨의 기숙사 방에서 나온 물품 목록

 

• Chain from top left closet shelf
• Folding knife & combination padlock
• Compaq computer from desktop
• Assorted documents, notepads, writings from desktop
• Combination lock
• Dremel tool and case
• Nine books, two notebooks, envelopes, from top shelf
• Assorted books & pads from lower shelf
• Compact discs from desktops
• Items from desktop & drawers: winchester multi tool, 3 notebooks, mail, checks, credit card
• Items from 2nd door: Kodak digital camera, Citibank statement
• Two cases of compact discs from dresser top
• Drive: Seagate: 80 Gb
• Six sheets of green computer paper
• Mirror with blue plastic housing
• Dremel tool box with receipt
• Dell Latitude service tag

 

 

◆ 일간지들, 명확한 근거 제시 없이 게임을 범행동기로 지목

 

국내 주요 일간지들의 조승희 총격사건 게임관련 보도는 명확한 근거가 제시되지 않은 채 추측과 주장으로 채워져 있어 네티즌들 사이에서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20일자 사설에서 “쌍권총이 등장하는 홍콩 누아르 영화, 컴퓨터 게임 <툼 레이더>의 전사를 흉내 내려는 그의 복장과 몸짓”이라고 표현했으며, 스타뉴스는 18일자 기자 칼럼에서 “무차별 살륙의 일상화가 저질러지는 인터넷 게임 탓이 아니라는 단언을 누가 할 수 있는가”라고 말했다.

 

내일신문은 지난 18일 “조군은 외톨이 생활에다가 우울증세가 겹치고 비디오 게임 등의 영향을 받아 이번 총기난사극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고 보도했으며, 제주일보는 19일자 기사에서 “그래서 말인데 충격적인 이번 사건의 배후는 조기유학 광풍, 청소년들의 사회성 상실, 컴퓨터 게임 등이라 할 수 있다”고 결론 지었다.

 

헤럴드경제는 20일 게재한 ‘<美 총기참사> 인터넷과 게임이 빚어낸 폭력성’라는 기사를 통해 “지난 2005년 게임광이었던 김모 일병이 일으킨 ‘GP 총기 난사’ 사건이나 빈번히 빚어지는 청소년 폭력사건으로 게임 중독의 심각성은 항상 논란이 되어왔다”며 <리니지>를 비롯한 FPS 게임들 모두가 문제라고 언급했다.

 

한겨레신문은 20일자 기사에서 ‘버지니아 총기사건, 32킬 1데쓰… 놀라운 실력’이라는 제목으로 일부 네티즌들의 ‘악플’을 마치 게이머 전체의 문제인 것처럼 보도해 네티즌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중앙일보는 앞서 언급한 워싱턴포스트의 인터뷰를 매 기사마다 인용하며 조승희 씨와 게임을 계속 결부시키고 있다. 중앙일보는 지난 18일 워싱턴포스트의 인터뷰를 그대로 받아서 ‘총기난사 조승희, 외톨이에 폭력적 게임 즐겼다’는 기사를 인터넷판 헤드라인으로 올렸다.

 

이어서 중앙일보는 조승희 씨의 사진이 공개되자 그의 복장과 <카운터 스트라이크>의 기본 복장이 비슷하다며 <카운터 스트라이크>를 대대적으로 분석하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 또, 조승희 사건 이후 한국 학부모들이 ‘게임을 즐기는 자녀에 대한 대책을 내놓으라’고 학교에 요구했다는 기사도 게재했다.

 

 

◆ 네티즌과 게임업계, '게임 마녀 사냥'에 분통

 

네티즌들은 게임을 동기로 제기한 기사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인 댓글 반응을 보이고 있다. 네이버 아이디 Goromon을 사용하는 유저는 “그의 행적 가운데 게임이 등장하는 것은 ‘익명의 인터뷰’에서 뿐이다. 왜 그의 정신병적인 측면이 아니라 게임을 부각시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또, 구글의 Rooney라는 유저는 “조승희는 희곡을 썼고, 많은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아무도 ‘독서’나 '책'의 해악성을 들먹이지 않는 것인가? 왜 그가 하지도 않은 게임만 탓하고, 책은 말하지 않는 것인가?”라고 지적했다.

 

조승희 씨가 게임에서 어떤 영감이나 영향을 받았는지는 앞으로 진행될 조사에서 확연히 드러날 일이다. 사건 초기에 한 두 차례 제기된 익명의 증언에서 게임이 언급된 가운데 국내 일간지들이 앞다퉈 게임을 범행의 동기로 지목하고 있는 것에 대해 국내 게임업계는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사회적으로 게임이 무조건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이 굳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게임업계의 한 관계자는 "직접 취재를 통해 얻은 정보도 아니고 아직 아무런 팩트나 연관성을 찾을 수 없는 가운데 신뢰를 생명으로 하는 ‘일간지’에서 벌써부터 ‘게임이 원인이다’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