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그 오브 레전드>에 밀린 e스포츠 종목. ‘형만 한 아우 없다’는 속담처럼 1편의 흥행을 뛰어넘지 못한 2편. 아마도 현재 <스타크래프트 2>를 플레이하지 않는 유저들이 가진 생각일 겁니다.
국내에 한정됐다면 아예 틀린 말은 아닙니다. 유저풀은 <리그 오브 레전드>에 못 미치고, PC방 이용률은 전작 <스타크래프트: 부르드 워>보다도 낮습니다. 꾸준히 리그가 열리고 있고 한국 선수들의 활약도 엄청나지만, e스포츠의 한 종목으로 흥행에 성공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해외라면 반응이 다릅니다. 이를 가장 크게 느낀 계기가 이번 블리즈컨이었는데요, <스타크래프트 2>의 본진(?)에서 열리는 행사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월드 챔피언십 시리즈(WCS) 글로벌 파이널에 쏟아진 팬들의 관심은 제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었습니다.
우승한 김유진 선수조차 애너하임에 도착해서 팬들의 반응을 보고 놀랐고, 부러웠다고 말했을 정도죠. 블리즈컨에서 열린 WCS의 현장 분위기를 전합니다. /애너하임(미국)=디스이즈게임 안정빈 기자
“한국 기자세요? 그럼 MC(장민철 선수) 아시나요?”
입에 영어 좀 붙여 볼까 하는 얄팍한 생각으로 외국 기자들에게 말을 걸 때마다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 왔다 = <스타크래프트>를 잘한다’는 선입견이야 많이 겪어 봤지만 블리즈컨에서는 이 공식이 곧바로 프로게이머까지 연결됩니다.
“MC를 아나요? 나 팬인데.”
“나 이제동 선수 좋아해요.”
“한국 기자면 e스포츠 때문에 여기 온 건가요?”
모두 e스포츠에 대한 이야기를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은 상황에서 들은 말입니다. 블리즈컨에 온 목적이 오직 WCS 때문이라는 팬도 만났습니다. 해외 팬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선수에 대해 저보다 오히려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더군요. 기자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자기는 e스포츠 담당이 아니라는 기자까지도 선수들을 꼼꼼하게 파악하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였습니다.
앞으로는 뭔가 더 열심히 공부하고 와야겠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더군요.
당연한(?) 만원 관중. 메인 스테이지까지 꽉 채웠다
WCS 글로벌 파이널이 열리는 <스타크래프트 2> 토너먼트 스테이지는 블리즈컨에서 메인 스테이지 다음으로 큰 공간입니다. 결승전이 열릴 때는 메인 스테이지까지 중계 및 관중석으로 활용되죠.
WCS 8강이 시작된 토요일(9일, 미국시간) 오전부터는 스테이지가 가득 찼습니다. 결승전이 시작되고 나서는 앞에 있는 프레스 자리까지 진입하기가 어려울 정도였죠. 의자도 턱없이 부족해서 바닥에 앉아서 구경하거나 아예 서서 보는 관객도 적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아이템을 주는 것도 아니고, 다른 게임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이나 <디아블로 3: 영혼을 거두는 자> 같은 쟁쟁한 신작과, 각종 이벤트가 곳곳에 펼쳐져 있죠. 비싼 입장료를 내고 몇 시간에 걸쳐 경기를 지켜볼 정도로 열성적인 팬들이 그 정도였다는 뜻입니다.
혹시나 경기 도중에 자리가 비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가져 봤지만… 8강 이후에는 김유진 선수의 승리가 결정될 때까지 다들 자리를 뜨질 않더군요.
종교에 가까웠던 이제동 선수의 인기
선수 개개인에 대한 ‘팬심’도 굉장합니다. 특히 이제동 선수의 인기는 ‘종교’를 방불케 할 정도였는데요, 인터뷰에 나선 마이크 모하임 대표가 이제동 선수가 이겼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을 비롯해서 이제동 선수가 결승에 오르자 곳곳에서 환호성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짧은 시간에 응원도구를 만든 팬도, 구호를 만들어 외치는 팬도 있었죠. 승패와 상관없이 한 경기, 한 경기가 끝날 때마다 이제동 선수를 응원하는 목소리가 쏟아집니다. 발음이 어려운 탓에 ‘동’(DONG)이라는 별명을 만들어 부르는 팬도 있죠. 아래는 그 일부입니다. “렛츠 고! 제동!”을 외치는 현장 모습을 영상으로 보시죠.
결승전에서 이제동 선수가 패하자 곳곳에서 탄성이 들려옵니다. 상대였던 김유진 선수가 무슨 적진에라도 온 듯한 기분입니다.
김유진 선수의 우승. 넉살 좋은 응원 문화
결승전은 세트스코어 4:1, 김유진 선수의 승리로 돌아갔습니다. 광자포 러시를 비롯해서 경기마다 다른 전략을 선보인 압승이었죠. 재미난 점은 팬들의 태도인데요, 김유진 선수가 승리하자마자 SOS(김유진 선수 닉네임)를 외칩니다. 조금 전까지 이제동 선수를 응원하던 팬들도 모두 함께요.
쏟아지는 박수 속에 김유진 선수가 트로피를 거머쥐고 돌아오자 사인을 받기 위해 잽싸게 김유진 선수의 카드를 찾는 팬들도 보입니다.
기자들의 관심도 마찬가지였는데요, 외신 기자들은 자신들의 인터뷰가 끝나고 한국 기자들의 인터뷰가 시작됐는데도 나갈 생각을 안 합니다. 통역도 없고, 한국어도 모르지만 남아서 사진이라도 찍고 영상이라도 녹화하겠다는 겁니다. 결국 일부 기자들은 한국 기자들의 인터뷰가 끝난 후에야 같이 일어나더군요.
아래는 WCS 결승전이 끝난 직후의 모습입니다.
부스에서 나오자마자 뛰어오르며 기쁨을 표현한 김유진 선수.
승자가 있으면 패자도 있는 법이죠. 이제동 선수는 부스에서 한동안 그대로 있었습니다.
인터뷰 중인 김유진 선수. 앞에 거대한 트로피가 보입니다.
트로피에 입을 맞추는 김유진 선수. 이 장면을 오랫동안 꿈꿔왔다고 합니다. 경기에서 이기고 나면 사람들의 환호에도 응해줄 생각이었는데 정작 이기자마자 머릿속이 하얗게 돼서 트로피를 향해 달렸다네요.
트로피를 높이 치켜든 김유진 선수. 팬과 기자들의 요청에 방향을 바꾸며 같은 자세를 서너 번이나 반복해야 했습니다.
무대에서 벌어진 해프닝입니다. 팔이 너무 아픈 김유진 선수가 트로피를 몸에 잠시 기댔는데요, 애매한(?) 위치에 트로피를 올려 놓자 이를 퍼포먼스로 받아들인 팬들이 여기저기서 환호성을 날립니다. “오오~ 그레이트!” “빅가이!” 등등의 말이 들려옵니다.
“그런 거 아니예요~” 주변의 환호성과 웃음을 듣고 나서야 상황을 파악한 김유진 선수가 당황하며 그게 아니라며 손짓하고 있습니다.
승리의 포즈를 취한 김유진 선수. 이렇게 WCS 글로벌 파이널의 모든 행사가 끝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