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의 디지털 유통, 디지털 라이브 서비스 시대가 왔음에도 정부의 규제는 과거에만 머무르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한국게임법과정책학회는 3일, 서울 양재동에서 ‘게임물 내용규제의 방식’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현재 유통되고 있는 게임물의 특성과 이를 감독하는 정부 정책, 그리고 더 나은 정책을 위한 논의가 있었다. 특히 디지털 시대를 맞아 급증한 개인 개발자, 그리고 라이브 게임에 대한 이슈가 핵심이었다. 행사에서 나온 내용을 정리했다. /디스이즈게임 김승현 기자
■ 마이크로소프트 “자율규제는 세계적인 트렌드”
“대부분의 국가 주도 등급 제도는 패키지게임에 맞게 만들어진 것이다. 각 국가는 디지털 세계에 걸맞은 게임 등급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게임 등급 부문을 총괄하는 ‘그렉 워드’는 이날 행사에서 국가 주도의 등급 제도는 패키지 게임 시절에서 비롯돼 현재와는 걸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패키지 형태로 판매되는 게임(이하 박스형 게임)과 디지털로 유통되는 게임(이하 디지털 게임)은 매우 상이한 특성을 가진다.
‘그렉 워드’ 마이크로소프트 게임 등급 부문 총괄
박스형 게임은 그동안 고비용 고퀄리티 게임으로 상징되어 왔다. 이 때문에 박스형 게임의 개발사는 대부분 특정 규모 이상의 자본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유통 과정의 한계 때문에 개발사는 필연적으로 지역 기반의 유통망을 가질 수 밖에 없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더 고비용 고퀄리티 게임을 생산하게 된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박스형 게임의 연간 생산량은 삼천여 개에 불과하다. 참고로 이러한 박스형 게임의 성격은 국내의 PC 온라인 게임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반면 모바일 마켓이나 스팀 등 디지털 마켓을 통해 유통되는 디지털 게임은 유통 특성 상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게임이 대부분이다. 낮은 유통규모나 작은 규모 덕에 개인 단위의 생산자도 많고, 디지털이라는 특성 상 유통 지역도 넓다. 소규모 게임이 많기 때문에 매월 생산되는 게임물의 수도 만 단위가 기본이다.
네트워크 기술의 발전, 모바일 디바이스의 대중화는 박스형 게임의 시대를 디지털 게임의 시대로 변화시켰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가 주도 등급제도는 박스형 게임에 초점이 맞춰져 시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기존 제도는 게임 하나의 등급을 분류하는데 짧게는 2주, 길게는 2개월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디지털 게임은 매월 만 개 이상 생산된다. 실질적으로 현행 제도로써는 등급을 분류하는 것이 불가능한 셈이다.
그렉 워드는 이러한 실태를 꼬집으며 세계 각국은 이에 대처하기 위해 자율규제 정책으로 선회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PEGI(범유럽 게임 정보)다. PEGI는 유럽 31개 국가가 사용하는 민간 자율 등급 제도다. PEGI는 본래 박스형 게임 등급만 분류했지만, 시대의 변화에 빠르게 적응해 2012년에는 모바일게임 등급 분류를 위한 전용 애플리케이션을 출시했고, 2013년에는 전세계 주요 국가들의 공동 게임 등급 분류 기준인 ‘국제연령등급연합’(IARC)의 창립멤버가 되었다.
IARC의 목적은 쉽고 빠른 자율 등급 분류, 그리고 각국의 문화적 환경에 걸맞은 등급 부여다. 개발자는 IARC의 툴에 접속해 자신의 콘텐츠에 대한 내용을 입력하고, 각국의 스토어는 이를 바탕으로 자국의 문화적 특성에 걸맞은 등급을 자동으로 분류한다.
이 시스템에는 PEGI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빡빡하기로 유명한 등급 분류 단체인 호주의 ‘영화 및 문학 등급 분류 사무국’(OFLC), 독일의 ‘엔터테인먼트 소프트웨어 자율 규제 단체’(USK)도 함께 하고 있다. 전세계 국가들이 자율규제로 기조를 바꾸고 있다는 의미다.
■ 정부의 사전 게임 검수,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더 많다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고학수 교수는 게임물관리위원회의 ‘사전 검수’라는 제도 자체가 사실상 본래 목적도 달성 못한 채 역기능만 생산한다고 지적했다.
고 교수의 말에 따르면 현재 게임물관리위원회 시스템은 과거 <바다이야기> 사태에 큰 영향을 받았다. <바다이야기> 사건 이후 사회적으로 게임의 사행성에 대한 경계는 커졌고, 정부는 이에 답하기 위해 새로운 게임법과 게임 전문 등급 분류 기관이 탄생했다. 게임물관리위원회의 빡빡한 사전 검수 제도는 이러한 역사의 잔재다.
문제는 이러한 사전 검수 제도의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이 더 많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검열’ 문제다. 대한민국 헌법은 국민 모두에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 하지만 게임법에 따르면 등급을 받아야만 게임이 유통될 수 있고 만에 하나 등급이 보류되면 게임 유통의 길이 막힌다.
이러한 문제는 론칭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현재 국내에서 유통되는 게임 대부분은 주기적으로 콘텐츠를 수정하고 더하는 온라인 라이브 방식을 취한다. 그리고 게임산업진흥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등급분류를 받은 게임물은 내용이 수정되었을 때마다 위원회에 신고해 새롭게 등급을 받아야 한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패치 한 번이 될 때마다 새로운 게임으로 취급되는 셈이다.
물론 이 때문에 등급이 반려되는 경우도 존재한다. 업체는 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콘텐츠를 원래대로 돌려놔야 한다. 콘텐츠를 적용한 지 하루가 지났던 일주일이 지났던 간에 무조건 보류를 피하려면 콘텐츠를 수정하거나 되돌려야 한다. 문제는 이러한 보류 고지는 십중팔구 두루뭉실한 언어로 이유가 써 있기 때문에 업체로서는 재발방지나 효율적인 수정이 어렵다. 이 때문에 업체는 자연히 패치 전 위원회와 콘텐츠에 대해 논의하게 된다. 사실상 사전 검열, 자체 검열과 같은 모양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기능을 만들어낸 게임법의 주요 목적 ‘사행성’은 잘 걸러지고 있을까? 고학수 교수는 사전 검수라는 기준이 오히려 사행성 게임이 빠져나갈 구멍을 주고 있다고 꼬집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2013년 화제가 되었던 ‘어플방’이다.
어플방은 일종의 가상 재화를 이용한 도박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디자인 상 현실의 재화가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게임법이 규정하는 ‘사행성 게임’에 분류되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선 사업자가 어플방을 이용해 재화를 지급해 사실상 사행성 게임처럼 운영되었다. 프로그램과 재화를 분리해 제도를 피해 간 셈이다.
이러한 사례는 어플방 하나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위원회에게 사행성을 막기 위해 사행성 기준을 확대 해석하게 하는 단초를 준다. 위원회에서 사행성이 있는 게임뿐만 아니라, 사행성이 있을 법한, 혹은 그러한 가능성이 있느냐까지 자체적으로 판단하는 셈이다. 이 때문에 사전 검수는 더욱 복잡하고 까다로워지고 수많은 게임들이 이에 불편해 한다. 반면 정작 이 제도가 목표로 하는 사행성 게임은 기준을 교묘히 피하며 검수를 피해간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고 교수는 이러한 실태를 지적하며, 게임을 검수함에 있어 특정 기준에 따른 사전 검수보다는 출시 후 게임의 콘텐츠나 환경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사후 검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일부 적합하지 않은 게임이 짧은 시간이나마 유저들에게 노출될 수도 있다. 이에 대해 고 교수는 “법죄율 0%는 환상이다. 법의 가장 큰 목적은 특정 사안의 박멸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억지’다”라고 답했다.